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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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文藝理論)을 처음 접할 때 나는 그의 존재에 대해 그렇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보았다. 사실 나는 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을 본 것은 작년 진중권 씨의 “미학 오딧세이” 3번째 편과 그리고 같은 저자의 “숭고와 시뮬라크르”라는 도서였다. 전자의 책은 미학에 대해 전무한 상태에서 읽은 책이라 발터 벤야민이란 인물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나온 서적은 상당히 읽기에 어려운 도서였기 때문에 그 책 초반에 나온 발터 벤야민이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역부족였다.

나의 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이 다가온 것은 작년이었다. 그런 직후 책을 이래저래 조금씩 읽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도서를 통해 나의 사고력을 증가할 것이 필요하여 도서 추천을 기거저기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추천받은 것이다. 예전에 들어온 발터 벤야민이란 사람이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 직후 도서를 찾아보고 구매하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눈이 조금 아파왔다. 책에 읽혀지는 글씨 크기가 너무 작았다. 특히 각주에 달린 글자의 크기는 모니터에 보이는 글자를 읽는 것보다 더욱 난해(難解)했다. 게다가 책도 제법 페이지 수가 있었으므로 보통 양장본 서적을 보급판으로 내어 책의 크기도 글자의 크기도 미니멈하게 낸 도서같이 느꼈다. 그런 발터 벤야민 하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은 아우라(Aura)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에서 내가 아직 그렇게 깊은 통찰력을 가지지 못함에 유감(遺憾)스럽게 느끼지만, 그래도 발터 벤야민의 엄청난 업적은 이른바 기술복제시대(技術復除時代)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과학기술과 문명발달로 통해 많은 물질적 혜택(惠澤)을 받는다. 물론 그 혜택은 자본주의사회구조(資本主義社會構造)에서 재력(財力)에 의해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나, 적어도 최소한으로 도로, 전기, 상수, 하수 등의 인프라 - 이것 역시 재력이 작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나 - 등으로 통해 그 편리함을 누린다.

그렇지만 당시 발터 벤야민의 사회상은 그렇지 못하다. 1920~30년대 주요 활동과 저술을 맡은 발터 벤야민의 시대에서는 이제 막 기술복제로 통해 특히 영상이미지가 복제되는 것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영상이란 것은 마치 신기한 도구와 같았다. 예전에 사람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은 오로지 미술가들의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상당히 많은 노력과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많은 시간을 고정된 자세로 유지해야만 했다.

또한 그림이라는 것은 화가의 관점에서 시작되므로 화가가 눈에 보이는 것이기 보다는 화가의 눈 이외의 내부의 관념적인 부분까지 더해지면 조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가령 어느 인물화에서 그 인물에 대한 특징적인 부분을 강조하거나 의미를 둘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진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구의 등장은 기술복제시대에서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영상의 잔상이 그 때 그대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에서 그런 사진의 역할은 그림에서 보이지 못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보았으며, 또한 사진은 이때까지 우리가 보이지 않은 표상까지 잡음으로 그것이 새롭게 보아야 한다는 사고까지 추가했다. 특히 나같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발터 벤야민의 사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애니메이션이라 하여 실사영상이 영화(映畵)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오히려 애니메이션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면 결국 영화의 세계와 조우(遭遇)하게 된다.

그런 영화세계에서 기술복제로 통한 이미지 재현에서 같은 작품을 토대로 영화와 영화 이전의 서사(敍事)를 보여준 연극(演劇)과의 사이를 밝힘은 참으로 놀라웠다. 사실 영화와 연극을 2가지를 놓고 실제 진행 시간은 2시간이라고 치자. 그런데 연극은 그 연극이란 공간 속에서 2시간을 그대로 Running Time으로 통해 다 보여준다면 영화는 2시간이란 시간 속에서 그 공간적인 영화관에서 보여주는 것은 2시간만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2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2시간의 백배 혹은 천배 이상의 들어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연극의 2시간은 무대감독, 연출, 소품담당자 등과 같은 스텝들이 2시간 동안 연속적인 행위로 이루어진다. 즉 일련의 시간과 공간이 인물에 의해 연속적인 모습이 연출되는 시퀀스는 무대 위의 연기자들이 연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연기자들의 모습에서 막과 극과 같은 시간, 공간, 상황적 배경 및 사건 등이 서로 나누어져 보인다면 무대 위에는 분명히 시퀀스가 이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밖의 세계는 시퀀스가 연속적이다. 영화는 이런 시퀀스를 모두 해체해 버렸다. 영화의 시퀀스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화관 안에서 계속 화면을 바라보는 영화관객과 영화 상영을 위해 기계를 조작하는 영화관 직원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모든 것을 분리하여 하나의 조각을 모아 거대한 틀로 만들 수 있는 재구성력을 소유한 것이다. 또한 영화는 필름을 복제할 수도 혹은 하나의 필름을 가지고 계속 상영할 수 있다.

따라서 연극은 한 번의 쇼로 마무리 짓는 것이라면 영화는 한 번의 쇼로 보여줄 뿐이다. 여기에 연기자들의 반응도 달라진다. 가령 연극무대 위의 연기자들은 관객을 직접적으로 의식해야만 하고, 그들은 그들의 연기에서 일순간의 실수조차 수정할 수 없다. 그들의 연기 자체가 완벽은 때와 시간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반복되는 행동이나 실수를 편집하여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로 구성한다. 따라서 연기자는 연극무대의 긴장감을 놓치기가 쉬울 것이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관객이 아닌 단지 카메라맨이 들고 있는 카메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카메라를 통해 비추어지는 모습을 관객이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가 연기하는 그 짧은 순간에는 관객들은 그를 보지 않는다. 단지 그 카메라의 영상이 복제되어 하나의 영화라는 예술 혹은 상업적 매체로 탄생할 때만 가능해진다. 지금의 이런 글들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과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나의 지식으로 적은 글이다.

물론 내가 적은 지식은 일반 대중들이 지닌 상식보다 더 깊이 있게 논의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특별히 누군가에게 통제된 지식이 아니다. 단지 통제되지 않은 것을 대중들이 스스로 통제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당시 발터 벤야민은 적으려고 했다. 이제 그 시대의 영상문화는 막 태동했다. 그러나 영상문화는 하나의 대중예술로서 자유로운 담론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이용당하는 객체적인 존재였다. 정치도구로서의 영화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상 안의 텍스트는 일반 서적 안의 텍스트와 비교하여 우리가 책을 읽을 것들을 더 이해하기 쉽고도 혹은 더 작은 시간으로 통해 어떤 사람 내지 단체가 의도하는 바를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에서 영화 즉 영상이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기술복제시대에는 정보의 전달력을 알리기에 좋은 도구들이 많았다. 혹은 “태초에 말이 있었다”처럼 우리 인간들은 정보의 수용능력을 오랫동안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정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대한 접근성과 언문능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언어라는 것은 서구사회에서 근대화 이전에는 거의 제한된 존재인 듯하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을 구사하는 사고력이 있어야 하고, 사고력을 뒤받쳐주기 위해서는 언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하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의 조건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은 일반 프롤레타리아에게 열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기술복제시대에는 다양한 매체에 따라 정보가 복제되었다. 이전의 정보는 한정적이라면 근대시대에는 그 정보가 인쇄술의 발달, 녹음기술 발달, 영상기술 발달로 통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정보력을 누군가가 통제하여 일반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정보를 가져다 준 만큼 오히려 대중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을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발터 벤야민은 이미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여기서 사용했다.

조금 문예이론에서 면에서 이런 사회구조와 역사적 흐름을 잡는 것이 아닐까 하나 사실 문학과 예술 역시 사회적 현상과 역사적 흐름을 무시할 수 없다. 예술에서 역사적인 가치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받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가령 우리는 문화제 중에서 1,000년 전에 귀족이 사용하는 칼이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문학과 예술은 어떻게 본다면 그 때 당시의 인간이 가진 가치관과 상황을 전달하는 매체일 수 있다.

그런 매체를 후대의 인간들이 보는 것은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지금은 내가 뭐라고 할 그런 입장은 아니나 발터 벤야민의 경우 그는 유대교적인 종교적 관념과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을 동시에 무장되어 있다고 이 책 어느 부분에 적혀 있다. 물론 그런 문예의 대한 부분에서 이 책 후반부에 가면 발터 벤야민의 언어철학과 역사철학에 대한 담론이 적혀 있다.

어째든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이나 발터 벤야민이 가진 철학적, 문학적, 역사적, 종교적인 학문적 그릇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발터 벤야민이 살아가던 시절은 파시즘과 1차 세계대전, 그리고 많은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 발터 벤야민은 유럽인으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발터 벤야민에 대한 소개에서 발터 벤야민은 파리가 베를린처럼 베를린이 파리처럼 여겼다고 한다. 파리는 자유와 혁명이 숨쉬고, 코뮈나르의 영혼이 불탄 채 잠을 자는 영토였다.

그런 영혼을 가진 땅을 사랑한 발터 벤야민이듯이 이 서적 초반의 자전적 프로필에서는 발터 벤야민의 어리고 젊은 시절의 글은 상당히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우면서도 섬세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문학적인 정보와 접근성이 없는 본인에게 많은 작가를 소개해주었다. 카프카, 프루스트, 보들레르, 그 외의 작가들, 또한 다양한 이야기 소재로 통한 비평적인 글들을 말이다. 서사라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이나, 그 이야기 내부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이야기를 보고 그것을 외적으로 읊어주는 해설가인가? 아니면 그 이야기를 통해 안에 들어가 무엇이 있는지 끄집어내려는 비평가인가? 아직 많은 학문적 도전이 필요한 본인이나, 발터 벤야민이 비평에 대한 비평적인 문구는 매우 인상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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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의 혁명
라울 바네겜 지음, 주형일 옮김 / 이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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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스펙타클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영어철자로 spectacle이며, 그 영어적인 풀이는 look on, remain a spectator이다. 즉 그저 방관하는 사람,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의미이다. 보통 스펙타클이라고 하면 대부분 스펙타클한 연출, 세계, 공연, 화려함을 말하지만 사실 스펙타클이란 그렇게 좋은 의미를 가진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스펙타클을 오히려 긍정적인 단어로 혹은 뭔가 있어 보인다로 생각한다. 흔히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뽀대가 난다”라는 것처럼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고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스펙타클이다.


사실 스펙타클은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같의 사회 관계를 뜻한다. 스펙타클하다는 것은 곧 이미지 인간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인간들 자신이 만들어 버린 각종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은 존재에 의해 오히려 인간이 지배당한다. 그래서 스펙타클은 인간 자체가 능동적으로 살아온 것이 이제는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된다.


또한 스펙타클은 계속 인간들로 하여금 계속 재생산되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거대한 급류이다. 하지만 그런 스펙타클은 인간들을 지배하기도 하나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조장되기도 한다. 흔히 우리 현대사회를 소비의 사회로 불리기도 하고 혹은 시뮬라시옹(Simulation) 세계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는 정말 진실을 앞에 두고 보지 못하는 장님처럼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이른바 스펙타클이라는 인간을 수동적으로 변하게 하는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예전에 상황주의자 사상가이면서 전위예술 영화감독인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를 읽어보았다. 스펙타클에 의해 소외되어가는 사람들 그들은 이른바 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고 있던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은 기 드보르와 함께 국제상황주의자에 소속된 인물이었다. 이들은 스펙타클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이들은 인간 스스로에 대해 자기 존재감을 성립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것을 위해 투쟁을 하였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이 2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스펙타클로 작용하는 것을 우려하여 각자 다른 방법으로 살아간다.


기 드보르는 국제상황주의협회를 탈퇴한 뒤 시골 오두막에서 지내며 조용히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서적처럼 자신이 군중들에게 스펙타클로 존재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자신의 심장에 권총을 당겨 심장병에 대한 고통을 모두 해소한다. 여기에 반해 라울 바네겜은 최대한 자신의 모습에 미디어에 노출되기를 거부했다. 물론 그도 기 드보르처럼 스펙타클 요인으로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런 인물들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보는 순간 왜 그런가를 생각하고, 이들을 단순히 쫓아가기 바라는 것보단 이들의 생각과 의미를 돌아봄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 사회라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기도 하나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정치적인가 아니면 타인의 속박에 의한 정치적인가가 중요하다. 이른바 헤게모니적인 요소로 어느 집단이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여 여러 인간들을 속박시키게 하거나 그런 속박을 위해 문화의 장치로서 스펙타클의 사회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는 노동자와 예술가가 자유로운 사고를 표출해야하나 오히려 표출할 수 없다고 한다. 이미 미디어에서 그런 자유로운 사고를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을 통제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미디어에 의존하고 그것의 방향에 따라 우리도 변해간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생각나던 노래가 있었다. 가수 김종서의 플라스틱 신드롬(Plastic Syndrome)이란 노래였다. 이 노래는 예전 학창시절 김종서 노래를 자주 따라 부른 나의 추억의 노래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들을 보면 마치 스펙타클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 모든 걸 다가지려 하지만 꿈은 꿈대로 남겨둬 오늘 늦은 밤 TV토크쇼 너를 천사로 만들 패션 매거진 세상은 슈퍼맨만을 기억해 거리엔 똑같은 얼굴의 사람들

나는 나 너는 너 서로 비교하려 하지마 나는 나 너는 너 모두 똑같이 살 순 없어

세상 모든 걸 다가지려 하지마 꿈은 꿈대로 남겨둬 세상 모든 걸 꾸미려고 하지마 지금 이대로 살면 돼

너의 화려한 겉모습보다 네안에 숨어 있는 향기를 사랑해 지갑속 가득한 신용카드가 영원한 행복을 줄거라 믿지마


스펙타클로 채우진 이 세상은 인간의 욕망이 그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본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책에서 자크 라캉 편에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한 것이 있었다.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정말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가 아니라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여 자기의 존재는 거기에 맞추어야 하는가 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에는 문화라는 것이 필수불가결적으로 따라 다닌다. 그런데 이 문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이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소비의 사회라고 한다. 인간의 문화는 소비로 통해 이루어진다면 결국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능력에 달라진다. 누가 어느 것을 시작한다면 대중들은 그것을 따라할 의무도 없이 따라한다. 그것이 곧 스펙타클이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스펙타클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른바 군중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스펙타클의 영향을 받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계속하여 타인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또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본인의 의지가 아님에 따라 계속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게 된다. 인간들은 자신의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소비를 한다. 현대 사회에서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라는 말이 있다. 본래 상품적 가치는 본래 기능에 비해 반도 못 미치지만 그 상품을 산다는 것은 기호를 소비하게 되어 그 기호의 소비로 통해 군중은 문화의 소비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스펙타클은 계속 인간의 욕망과 허영심에 의해 재생산되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간들은 다시 스펙타클로 이어지는 문화적 소비를 계속 하게 된다. 인간이 문화사회를 접하는 순간 스펙타클은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그 스펙타클이 인간 스스로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다.


이 책의 마무리 부분에서 역자의 말을 본다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청소년은 이미 스펙타클의 지배로 통해 이 사회에 길들어져 있다. 그는 아직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나 육체적으로 어른 못지않다. 어른과 어린이라는 중간에서 그들은 소외된 부류로 되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다. 그런 처지를 비관하여 어른으로 가고 싶으나 어른이 되는 순간 자신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는가에 고민한다.


왜냐하면 모든 어른들은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고, 다시 소외가 더욱 심해지고 기계적인 인간생활로 전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도 불안하나 내일의 미래도 더욱 불안하다. 군중 그리고 그 중에서 노동자의 삶을 방관하게 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어떻게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가?


이 책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혁명 중에서 5월 혁명을 이끌어 낸 책이다. 1968년 프랑스 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여성들이 인권을 위해 일어섰다. 솔직히 말해 나는 5월 혁명은 잘 몰랐다. 프랑스하면 떠오른 혁명은 1789년 7월에 일어난 루이정권을 전복한 혁명이다. 역사책에서는 그 혁명이 성공했다고 하나 결코 성공한 혁명만은 아닌듯하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농민과 노동자는 계속 소외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인물들이 소개된다. 이른바 아나키스트라는 반정부주의자이다. 이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는 별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그런데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면서 싸울까? 물론 폭력이란 이름은 정당화 될 수는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이 “노예 없는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노예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노예제도를 넘어 인간 그 자체가 노예도 아닌 주인도 아닌 인격체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인간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권력이란 이름이 정의의 심판으로 변질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책표지 뒷부분에 나오는 “우리가 얻을 것은 즐거움의 세계요, 우리가 잃은 것은 권태뿐이다!” 문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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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날의 꿈 - Green Day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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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의 꿈을 보았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생각한 것은 단순히 소중한 날의 꿈이 주인공인 오이랑으로 통해 이야기하는 고교시절의 추억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한국 애니메이션의 꿈을 과연 날아갈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해 준 작품입니다.


작품 전반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 애니메이션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아동용” 위주라는 점에서 많은 시나리오 구성이 부족하다는 점인데, 그런 문제를 상당히 많이 개선했습니다. 게다가 장면의 전환과 전환이 상당히 부드럽고 내용의 전개가 매우 자연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기존 작품에서는 스토리 중간 중간 이어지는 부분이 매우 부자연스럽거나 혹은 작품 내의 캐릭터가 스토리진행에서 너무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다행히도 오늘 본 소중한 날의 꿈에서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흐름을 상당히 개선했다는 점과 캐릭터에 부여된 개성과 성향을 끝까지 잘 이어나갔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모두 만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한국 애니메이션 중에서 극장용으로 나온 작품으로 상당히 좋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관람기준은 초등학생 이상 볼 수 있는 전체 관람이지만, 사실 막상 제가 볼 때는 고등학생이나 어른들도 편하게 보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시나리오 구성에서 상영할 때 보러 오는 사람들이 아동보다는 아동 이상도 같이 봤다는 것은 좋은 듯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작품에서 느끼지 못한 부분은 확실한 재미와 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작품 자체가 천천히 배경화면이 움직이며 캐릭터의 심적 변화를 잘 보이려고 했기 때문에 다소 작화 부분에서 배경적인 부분은 매우 좋았습니다.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에서 햇빛이나 그림자의 구도, 그리고 인물이 움직일 때마다 얼굴에서 흐르는 땀, 또한 철수가 자신의 가게에 찾아온 이랑이를 위해 우산을 건네 줄 때 이랑이는 기분 좋은 얼굴로 우산손잡이 잡고 우산을 돌립니다. 이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이랑이의 우산에서 팅기는 빗물의 연출은 절묘했습니다.


소중한 날의 꿈에서 제가 가장 놀란 부분은 이런 장면에서 작은 하나하나까지 다 잡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작품 초반에 어느 시골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침 운동장 조례에서 어느 학생이 더위를 이기지 못해 쓰러진 장면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스쳐가는 자동차의 매연, 지나가는 행인들의 의상이나 걸음걸이까지 잘 연출했습니다.


특히 제가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주인공 이랑이가 자신이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랑이가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특별활동을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이때 여고생들이 서로 쪽지를 접어 서로에게 던져 보냅니다. 이랑이에게 쪽지가 가다가 다른 친구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그 쪽지가 오고가는 사이에 영상의 대상이 교실 내부가 아닌 창문 너머의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푸른 하늘은 내일이나 미래 그리고 희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미래와 희망을 암시하던 푸른 하늘에서 쪽지 싸움은 시커먼 콘크리트 교실천장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곧 이랑이의 꿈이 아직도 막혀 있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철수를 만나 뒤에 같이 돌아다니며 이랑이의 시선에 보인 푸른 하늘은 시커먼 교실 천장이 아니라 모든 것이 탁 트인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랑이가 철수를 만나 자신이 가진 희망과 미래를 찾아내었다는 의미입니다. 언제나 이랑이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았습니다.


그런 부분은 처음 장면의 달리기 시합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랑이는 평소 달리기를 잘하지만 달리기시합에서 자신보다 더 빨리 달리는 동기 때문에 달리기를 포기합니다. 그런 이랑이의 승부가 패배로 정해졌는지 이랑이의 라이벌은 영상에서 관객 쪽으로 가깝고, 이랑이는 그 라이벌의 어깨 너머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어깨너머 샷으로 화면에서 어깨 너머로 보이는 피사체가 화면상 가까이 보이는 캐릭터에 비해 열등하다는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랑이의 고민은 달리기의 패배로 통해 자신이 자신 있었던 달리기마저 의미가 없어지자 즉 교실의 막혀버린 푸른 하늘로 되었던 겁니다. 그런 이랑이에게 자신의 슬럼프를 도피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서울에서 전학온 수민입니다. 수민이는 자기는 나이 33살까지 살다 죽을 것이라고 하며, 언제나 도도하고 남들과 다른 사람인양 행동합니다.


동요된 상태에서 수민이의 전학은 이랑이에게는 새로운 바람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랑이 수민이의 뒤를 쫓아가려 했으나 결국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수민이가 따라가려 했던 수민이도 결국 자기의 허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던 사람이 수민이의 가치를 몰랐고, 수민이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예술은 삶을 광학적으로 본다는 말이 있듯이 수민이가 짝사랑한 남자는 수민이에게 오히려 현실에 있는 친구들과 일상에서 즐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랑이에게 달리기시합에서 꿈을 접게 만들고, 새로운 우상처럼 보이던 수민이도 결국 의미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랑이에게 다시 그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것은 철수였습니다. 철수라는 인물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실패를 하나의 경험 내지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지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철수에게는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삼촌이 있습니다. 그 삼촌이 이랑이와의 대화에서 작은 돌덩어리를 보여주며 여기에 수많은 흔적과 세월 그리고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실패나 성공이나 모두 그 돌덩어리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철수는 그런 돌덩어리처럼 자신의 꿈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한국 최초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던 철수는 그저 기계에 빠져있는 순박한 남자 고등학생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꿈에 대한 열망은 강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랑이는 처음에 철수가 엉뚱하게 보였으나, 철수의 비밀기지인 언덕으로 갈 때 철수의 진지한 마음을 알게 되자 자신도 솔직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마음 아래 깊숙이 두고 있던 고민과 자기 양심을 철수에게 털어 놓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인 압박을 벗어 던집니다. 작품 마지막에 공룡발자국을 찾아 가기 위해 철수와 여행을 떠난 이랑이는 아주 아름다운 꿈속에서 철수 삼촌이 이야기해준 우주로 사라진 공룡을 만납니다. 꿈이 없다고 믿은 이랑이가 철수와의 여행에서 단잠에 빠져 꿈을 꾸고 다시 자신의 꿈을 찾기를 시작합니다.


작품 마지막에서 마라톤대회가 열리는데, 이때 이랑이는 자신에게 하나의 억압으로 보이던 라이벌과 벅찬 승부를 펼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승부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이랑이는 1등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과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한 겁니다. 공룡은 모두 사라져도 공룡발자국은 아직도 살아남아 자신의 형태는 없어질 망정 자신들이 살았다는 흔적을 남긴 것처럼 이랑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남기려고 합니다.


작품 마지막에서 하얀 눈이 오는데, 늘 남의 뒤만 보던 이랑이는 조금 다른 행동을 취합니다. 영화 러브스토리에서 주인공 남녀의 모습을 처음 떠오려 보기 보다는 그저 자신의 생각을 수민이에게 이야기합니다. 수민이도 처음에 도도하고 가식적인 모습에서 다소 솔직한 자신의 모습으로 가려 합니다. 과연 소중한 날의 꿈에서는 이런 꿈을 어떻게 보이려고 했던 것일까요?


이랑이처럼 쉽게 포기하고 남의 눈치 보면서 늘 뒤만 바라보려 한 사람인가? 아니면 그저 도도하고 가식적으로 남과 다르다는 식으로 살아가려 하던 수민인가? 혹은 너무 자신의 세계에만 집착하여 조금 엉뚱한 모습만 보이던 철수인가? 어떻게 본다면 철수는 이랑이에게 이랑이는 철수에게 수민이는 이랑이에게 조금 다른 모습을 보며 꿈을 키워간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젊은 날의 꿈을 꾸면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절하게 바라는 소중한 날의 꿈은 우리에게 그런 꿈이란 단순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가지고 살아가며 보이지 않는 골이더라도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골문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소중한 날의 꿈으로 통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꿈을 다시 이어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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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 천둥의 신 - Tho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천둥의 신 토르라는 영화는 내가 판단한다면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영화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에 가깝다고 본다. 왜냐하면 실재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보다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용한 애니메이션 영상이 훨씬 압도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토르가 살았던 그 전설(傳說) 속의 장면에서는 모든 영상이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나 불굴의 의지를 가진 게이트의 수호자가 길을 열고나서는 거의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영상이다. 단지 그 애니메이션 영상 안에 등장인물의 실사영상 촬영모습을 대입할 뿐입니다. 차라리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영화적인 요소는 토르가 지구로 와서 지구인들과 같이 활동할 때가 영화 같다고 볼 수 있다.




원작부터 만화(漫畵)라고 들었으니 실사영상보다는 애니메이션 영상이 더욱 효과가 좋지 아니한가? 게다가 이 북유럽신화를 모티브로 했었던 만큼 이 천둥의 신 토르에서는 그런 신화적인 요소를 조금 현대적으로 살렸어도 원래가 신화인 만큼 애니메이션이 어울린다.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은 Animation이란 알파벳 철자로 사용하고 여기서 Anime는 라틴어로 영혼이라는 의미를 가졌고, 정신분석학 용어로는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다.




그리고 영혼은 우리 인간 눈으로 볼 수 없는 비(非)물리적인 존재이므로 이런 존재를 믿고 신앙하는 종교를 애니미즘(Animism)이라고 불린다. 가령 세계 고대민족들의 이야기나 문화를 찾아가면 이런 신화(神話)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접한 자연은 그저 위대한 신이요 정령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과거 인류들이 지닌 가치관, 인식,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들어가서 나타난 것이 바로 신화이다. 그런 신화에서 켈트족인 북유럽신화는 백인들의 과거 정신을 보이고, 과거의 신화를 오늘날의 영화로 들어냄으로 다시 신화를 현대(現代)적인 감각으로 살려낸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敍事哲學)”에서 나와 있듯이 모든 서사에서 기본 중의 기본은 바로 신화다.




신화는 그 민족과 나라의 공통된 무의식적인 관념이고, 그 관념은 끊임없이 오늘날까지 살아간다. 그런데 보통 신화를 연구하고 그 신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을 보면 인간의 본연적인 문제나 혹은 인생관이 보인다. 단지 이번에 내가 본 천둥의 신 토르에서 조금 의아하게 여긴 것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의 차이다.




기본적으로 신화는 나라마다 다르나 조금씩 비슷한 부분이 많다. 가령 우리나라 신화 중에서는 “콩쥐와 팥쥐”라는 신화가 있는데, 이것은 유럽의 신데렐라 신화와 비슷하며, 신화 속에서 남편으로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성의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신화가 다시 현재로 넘어와 이른바 신데렐라 콤플렉스,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캔디”로 통해 이른바 “캔디이데올로기”까지 나온 것이다.




물론 이런 세계적으로 구술 내지 기술되어 전승되는 신화는 조금씩 살펴보면 약간 비슷한 내용이 발견된다. 그 부분은 바로 부자(父子)간의 갈등관계이다. 이 천둥의 신 토르에서도 작품 초반에 갈등으로 등장한 것이 로키가 사는 차가운 얼음나라도 되겠으나, 정작 이 작품에서 가장 토르가 중시한 문제는 아버지와의 감정이었다.




우리나라 신화와 비교하여 한국 신화에서 등장하는 남자영웅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없거나 혹은 모르거나 또는 죽은 상태로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건국신화(建國神話)의 영웅들을 고찰해 보면 대부분 아버지가 없다. 이른바 한국 신화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은 이른바 “후레자식”이라는 아비 없이 자란 건방진 녀석이란 뜻이다. 고구려의 주몽신화부터 신라, 가야국의 건국동기가 그러하다. 건국신화가 아닌 무속신화(巫俗神話)에서도 이런 면이 등장한다.




제주도의 수호신 신화로 “궤네깃또”라는 무속신화가 있다. “궤네깃또”가 부모에 의해 밖으로 내쫓긴 후에 공을 세우고 나서 제주도에 들어오려는 그 순간 “궤네깃또”의 부모들은 아들의 귀환소식을 듣고 모두 도망치다 사고로 죽는다. 그리고 “궤네깃또”는 제주도에 돌아와서 마을의 권위 있는 자로 활동하고, 죽은 뒤에 마을신으로 추모(追慕)된다.




이런 부자간의 갈등은 그리스신화인 “오이디푸스왕”처럼 아버지인 라이오스왕을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처럼 단순히 근친상간(近親相姦)적인 요소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가져가고 싶은 권력이라는 하나의 상징을 원한 것이다. 그러나 권위(權威)를 가진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아들은 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오직 아버지가 자신의 권위를 물려줄 경우만 한해서다.




이런 모습은 작품 초반에 확실히 보인다. 토르의 아버지인 오딘은 매우 용감한 용사였으나 한편으로 매우 신중하고 현명한 왕이었다. 로키제국을 응징 후에 거기서 로키왕국의 왕자를 거두어 자신의 2번째 왕자로 삼아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 그가 2번째 왕자로 되어 살아오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를 주워온 사실을 알았고, 적국의 왕자를 키워준 점에서 의아하게 여겼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보살펴준 부모님의 사랑을 잊지 않았다.




단지 그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초반에 토르가 왕위 계승의식에서 동생은 자기 형만 인정받는 것이 싫어 로키의 병사를 몰래 유입시켜 그 행사를 망쳤다. 그는 형을 사랑했지만 한편으로 형을 질투했던 것이다. 자신이 왕이 되고 싶은 이유는 자기가 오딘의 친자가 아닌 양자라는 열등의식(劣等意識)이었다.




이런 동생의 질투로 계승식은 엉망이 되었고, 토르는 그 복수심에 로키에 찾아가서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차후 위기에 몰리자 아버지 오딘에 의해 구출된다. 그 상황에서 오딘은 아들이 너무 성급한 점과 아들의 오류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빠진다며 그를 책망하여 멀리 지구로 보낸다. 지구로 온 토르를 처음 내가 본 순간 그가 이 지구의 새로운 영웅으로 될 사람인가 하고 의문을 품었다.




왜냐하면 토르가 살던 왕국에는 아버지라는 절대적인 신이 있었으나, 지구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영웅이 없었기 때문이다. 토르와 토르의 해머가 지표면에 낙하할 때 모이던 정부관계자도 로키와 전혀 상관없는 그저 정부기관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닌 하나의 변방세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르가 있다는 이유는 토르의 동생에게 하나의 두려움이며 하나의 근심거리이었다.




그래서 동생은 형을 죽이기로 하였다. 이때까지 하더라도 토르는 자기위만과 과시욕으로 충만했다. 허나 아버지의 거짓죽음 소리를 들은 후와 그 죽음이 자기의 경솔함으로 이루어진 사실, 또한 로키와의 전쟁도 자기의 경솔함을 깨닫자 그는 작품 초반에 반항적인 영웅에서 순종적인 영웅으로 변했다. 그는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동생에게 죽음을 선택받기로 한다.




그런 결심을 한 후에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치며 토르의 해머가 갑자기 움직여서 토르의 손에 들어갔다. 토르가 처음 지구에 올 때 세상 그 어떤 누구도 그 해머를 들 수 없었다. 그런 점은 해머의 주인이었던 토르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아버지의 동의가 없으면 그는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던 용감한 남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고,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사람에게 고통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고,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는다. 작품 초반 추방 전에 보이던 그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식으로 가득했으나 이제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같이 안고 갈 수 있는 위대한 마음을 말이다. 아버지인 오딘은 자신의 후계자인 토르가 모든 것을 안고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점은 자신들의 적인 로키까지도 말이다. 아버지 오딘은 그런 포용심으로 토르의 동생을 이때까지 길렀고, 자신의 국가에 침입자가 들어와도 로키와의 분쟁을 피해가길 바란 것이다.




사실 아버지 오딘은 2째 아들이 배신한 사실도 알았고, 2째 아들과 대화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서 자신의 방에서 영원한 꿈을 꾸어도 사실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아도 가만히 누워 기다렸다. 단지 토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말이다. 마지막 순간 토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동생과의 결투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동생을 대했다.




하지만 동생은 과거에 경솔하고 망나니 같은 형이 어느 순간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자기를 대하자 더 이상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음에 자책하며 머나먼 우주 미로로 사라져 간다. 대신 이 결투로 인해 세계수인 위그드라실의 한쪽 부분을 잃어버린다. 그 나무의 줄기는 오딘의 제국에서 지구 인간계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였다. 그 곳에는 토르가 떨어져 토르를 위해준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곳이다.




토르는 그 세계로 가는 줄기를 파괴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왕국 그리고 아버지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대립하여 새로운 세계로 추방되어 해머를 손에 들고 영웅으로 될 수 있었으나 그것 역시 아버지의 권위로 좌절된다. 그런 좌절을 이겨 내고 다시 돌아오나 그것은 분명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오이디푸스 가부장체계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대신하고 싶은 욕망이 있으나 아들이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면 그것을 포기하게 된다. 또한 근친상간적인 요소에서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육체적 사랑을 욕망하나, 아버지라는 존재를 인식 후에 그 아버지까지 사랑하게 되면 어머니를 닮은 여자를 찾아 결혼한다고 한다. 그 여자는 바로 지구에 남겨진 토르의 연인이었다.




물론 마지막을 보면 다리가 끊겨 갈 수 없다고 하나 문지기 수호신은 희망이 있다면 언제가 찾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은 결말을 보이며 막을 내린다. 이 영화를 보니 한편의 전형적인 영웅을 보이기보다는 그 영웅이 그 기존 세계의 질서에 다시 들어갈 뿐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은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되어 질서를 만드나 여기서는 그저 멈추어 버린다.




마지막 결론을 보고 대부분 관객들은 조금 뭔가 충만한 느낌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는 과업을 시작하여 과업을 완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의 손 위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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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 On Earth
Warner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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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Rialto 2집은 기존의 1집 멤버 2명이 빠진 채로 4명으로 이루어져 앨범을 제작했다. 멤버가 2명이 나간 만큼 다소 음악의 박진감이나 비트감은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드러머 1명이 탈퇴헤서 그런 것이다. 그런 만큼 2집에서는 1집보다 음악적 분위기가 조금 더 감수적이면서 오감을 자극한다.

단순히 같은 반주인 반복되는 듯한 느낌이나 그 반주가 상당히 쓸쓸하고,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요소가 많이 반영되었다. 특히 Drive와 Night On Earth의 경우 연인과 같이 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우울한 심정으로 부른 노래로 다가온다.
그리고 Night On Earth, Anyone Out There?은 낯선 도시의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다소 우울하고 쓸쓸한 기분은 Russian Doll에서 단연히 돋보인다. 1집처럼 다소 박진감과 비트감은 없으나 음악적인 분위기는 더 몽환적이고 슬프고 아름다워 보인다.

국내 배우 이나영씨가 출현한 Catherine's Wheel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어느 남자가 자신의 여인에게 아주 서글픈 마음을 담아내기 한다. 그래서 Rialto 2집은 1집과 달리 영화적으로 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감성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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