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문학작가 뷔히너가 저술한 <당통의 죽음>은 연극대본으로 제작되어 독일 및 프랑스 등과 같은 유럽에서 연극으로 펼치다 최근 한국에서 연극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단지 그 기사를 제작한 신문사와 <당통의 죽음>이 가진 의미적인 가치를 생각하면 너무 판이한 점을 생각하면 답답하나, <당통의 죽음>이 연극으로 나온 점은 매우 의미가 깊다고 볼 수 있다. <당통의 죽음>에서 잘 판단하는 부분은 세계 3대 혁명 최근에 일어난 것이 바로 러시아혁명이다. 그런데 이 러시아혁명의 원초적인 정신이 프랑스 대혁명이란 사실이다.

 

아서 쾨스틀러의 소설인 <한낮의 어둠>은 러시아혁명을 이룬 주인공이 스탈린의 공포정치 아래 숙청되는 것을 아주 디스토피아하게 그린 작품으로 작중에서는 포템킨함정에서 혁명을 일으킨 수병도 같이 처형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것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을 내쫓고 농장을 독재로 차지한 나폴레옹이 한 대사 중에서 "이제 혁명은 끝이다!"라는 것과 같다. 혁명의 배신적인 요소를 지켜본다면 트로츠키나 로베스피에르 내지 당통은 그 혁명에서 선구자이기도 하나 최고의 배신의 쓴 맛을 본 자이다.

 

영화 <당통>은 연극 <당통의 죽음>을 가지고 만든 작품으로 영화와 연극을 2가지를 보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영화는 당통을 객관적으로 보는 요소가 강하고, 연극의 대본은 주관적인 요소 즉 당통의 심리적인 요소를 많이 부각한다. 요절한 천재인 전혜린 교수의 저작들을 읽다보면 전혜린 교수가 독일에 유학하던 시절, 뭔휀에서 머무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독일에서 본 <당통의 죽음>이란 연극에서 당통의 죽음으로서 허무주의한 니힐리즘에 대한 요소와 더불어 실존적인 담론을 제기한다. 죽음으로서 살아있는 육체는 멈출지언정, 프랑스대혁명을 일구고 지킨 영원한 혁명가로서 당통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인간이다.

 

당통의 죽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가? 로베스피에르가 선도하여 실행한 공포정치에서 그의 무서운 무기는 국민공회로 대변되는 재판이다. 그 재판에서 판사가 망치를 두드리는 순간 목이 하나 떨어진다.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단두대 아래 이슬로 사라진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그렇게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회의적인 요소가 나온다. 프랑스 여성문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롤랑 부인이 단두대 아래 죽을 때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라고 외쳤다. 롤랑 부인의 죽음에서 보이는 프랑스대혁명은 역사적으로 큰 진보와 더불어 퇴보를 일으켰다.

 

헌법의 기본 중에 기본에서 민주자유공화국에서는 입법, 행정, 사법이란 3개 그룹으로 나누는데, 그것이 몽테스키외라는 계몽주의 사상가의 <법의 정신>에서 시작된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전 시킨 이들이 디드로, 볼테르,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인 장 자크 루소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인권선언문을 읽다보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제장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직접 나오지 않는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찾아보면 그런 내용이 그대로 따라하듯이 보여준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국가라고 하는데, 그 원류는 미국독립혁명 내지 프랑스대혁명으로부터이다. 헌법을 고수하는 것은 보수주의적이나, 헌법의 정신은 진보주의적이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서 나는 일상생활에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바로 저런 프랑스대혁명과 더불어 헌법의 기초와 계몽주의철학에서 비롯된 자유주의 사상을 제대로 담론 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 <당통>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런 호칭을 붙인다. OO 시민이라고 말이다. citizen이란 것과 동시에 people에서 이들은 기본적으로 mass라는 대중과 다른 의미로 부여된다. 존 롤즈의 <만민법> 내지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자유주의 철학대서를 읽게 되면 시민이란 것은 서울시나 부산시에 사는 시민보단 정치적 참여에서 하나의 발언권과 동시에 의무와 권리를 내포한 자들이다. 즉 시민이라고 불리 자격이 있는 부류는 그 자체 하나하나가 정치인이 되어서 정치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지식과 인품이 갖추어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프랑스대혁명에서 파리 시민들은 시민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 무지한 농민이고, 글을 읽을 줄 몰랐으며,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혁명의 원초적 에너지가 될 수 있어도 혁명의 원동력이 되지 못하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바꿀 수 있으나, 현재를 보고 미래를 움직일 판단력은 없었다. 그런 군중적인 요소는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다. 토크빌의 <앙시애 레짐과 프랑스혁명>을 읽으면, 프랑스혁명은 계몽주의사상가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도한 게 아니라 프랑스 하층민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궁핍과 국가제정의 위기였다.

 

특히나 미국독립전쟁에서 영국의 견제를 맡은 프랑스로서는 제정적 위기가 닥친 것이다. 러시아혁명사의 원인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선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1905년 피의 일요일처럼 러일전쟁 이후 물가상승, 자원부족, 식량위기로 인한 생활의 경제적 문제였다. <당통>이란 영화 역시 그런 생계라는 부분에서 당통이 생각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게 된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여자와 한 번 잠도 자지 않았다."라고 말이다.

 

미학도서를 읽게 되면 유럽의 중세를 보자면 어린 아이들은 우리와 같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 작은 어른이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 부모와 같은 방에서 큰 침대에서 같이 잔다. 문제는 농업기반이 주요 산업이던 시절에는 침대에서 많은 식솔을 거느릴 경우 어떤 광경이 보일까? 부모는 어린 자식이 옆에서 자고 있거나 혹은 깨어날지도 모르나 그 침대에서 계속 Sex를 하고 있던 것이다. 나이가 10대가 되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 Sex를 하고 아이를 만들어 결혼하는 것이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의 생활이었다.

 

물론 로베스피에르는 대표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으로 법조인이었다. 그는 분명 아내와 살고, 아내는 어린 남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으나, 충분히 부부관계를 통해 Sex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하지 않았고, 모두 평등하게 굶는 것만 추구했지, 그 이상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은 선천적과 후천적으로 나누는데, 선천적은 성별, 나이, 인종 등과 같은 생물학적 요소이고, 후천적은 경제, 지위, 문화, 정치적인 요소 등과 같은 후천적 요소다.

 

결국 후천적 요소의 배제에서 인간이 가진 욕망에 대해 철저하게 금욕주의적 요소를 추구한 것이 로베스피에르였다. 그의 이상적인 정치성향은 혁명중심이던 1794년 전까지는 좋았을 것이나 당통 사망 직후 그도 역시 테르미도르반동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에서 우리는 프랑스대혁명을 시작과 동시에 종점을 찍는 비극을 볼 수 있다. 추후에 1799년 브뤼메를 18일에 나폴레옹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프랑스의 공화정은 종극을 내리고 다시 왕정 이후 혁명과 보나파르트와 부패한 왕족과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에 의해 민주공화정의 위기를 맞이한다.

 

세상에는 이런 명언이 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자란다.” 오늘날 프랑스를 비롯하여 영국, 독일 등과 같은 북유럽 내지 서유럽 국가들이 그만한 민주주의 제도와 정치적인 여력이 세계적인 국가로 부상한 것은 그에 대한 대가와 고난이 있었다. 심지어 자유민주주의국가인 미국조차도 영국과의 독립전쟁, 흑백 인종차별로 계속 이어지고, 흑백 인종을 넘어 자유민주주의국가인 미국도 인종차별로 21세기까지 고통을 수반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체계는 완벽한 이데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의 과정이란 점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제기한 공산주의 역시 완벽한 공산주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그것에 대하여 가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하나, 러시아혁명에서 레닌 사후 스탈린에 의해 소비에트연방국가의 스노비즘이 결국 관료주의 독재국가로 전략해버렸다. 혁명의 시작과 위기에서 왜 이런 비극을 맞이하는가? <당통>이란 영화는 바로 이런 문제를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귀족과 왕족, 성직자, 악덕상인의 목은 광장 위에 세워진 단두대 아래 사라져 가는데, 계속 살림이 나아지지 않는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을 재산과 계급 그리고 인간의 덧없는 욕망이 있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주장하고, 그것에 대해 루소는 인간은 인간성 회복을 위해 자연의 미를 따르라고 한다. 그의 저서 중에 <식물사랑>은 식물은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식물 그 자체를 관찰하고 자연의 존재성을 인정하는 자연주의적인 관점이기에 인간이 자연에 회귀하는 것이 인간으로 살 수 있다고 봤다. 오늘날 환경오염과 자연파괴에 위기에 놓인 문명사회에서 루소의 외침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누군가 가진 만큼 누군가는 가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한계점과 용인할 수 있는 영역이 지켜질 경우 문제가 없겠지만, 하루에 빵 1개를 구하기 위해 싸움을 하는 남자와 몸을 팔아야 하는 여자들이 늘어가기 때문이다.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살았던 사드 후작의 서적인 <소돔의 120일>을 읽게 되면 사드가 가진 성적인 도벽과 사디즘에 대해 볼 수 있다. 당시 사드의 상상력으로 만든 소설에서 어느 정도 현실에 대한 기반과 사례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실제 역사 사료를 읽게 되면 여자가 몸을 파는 것은 스스로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은 팔려간 여자였다. 집안에 부모에 의해 혹은 납치에 의해서였다.

 

프랑스혁명 아래 이런 여자들이 사라지고 평범한 일상으로 가야 하나,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을 보거나 영화 당통을 감상해도 창녀의 등장은 나온다. 혁명이란 단지 정치적 헤게모니를 뒤집는 것이지 사회구조적인 뿌리를 흔들지 못했다. 혁명이 결국 식량을 증식시키거나 혹은 보급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 이전과 후나 모두 비참하고, 분노의 칼날은 언제나 그들이 살던 시절의 사람에게 향하고, 그 사람은 희생자 내지 혹은 추후에 영웅이 되어야 했다. 프랑스대혁명의 루소에 대해 생각해보자. 루소는 조국인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고, 만약 그가 돌아올 경우 영원히 체포하여 법적 대응할 수 있는 공소시효 만료가 없는 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런데 루소의 본가가 아닌 루소의 할아버지 집에 지금 제네바시민 장 자크 루소의 기념물이 있다.

 

루소가 바랑 부인을 만나던 1728년을 기념하여 1928년 200주년 기념물이 생길 정도다. 루소가 파리 시민에게 놀림을 받고, 심지어 루이16세에게 루소의 소식이 하나의 가십거리로 들어갈 무렵, 루소가 자주 산책하던 호수가 루소의 호수로 되었다. 당통은 프랑스대혁명의 영웅이었으나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에 의해 사기꾼들과 같이 엮여 재판을 받고 단두대 아래 사려졌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의 전제군주라는 호칭을 받으면서 사라졌다. 역사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절친한 동지와 라이벌이었고, 그리고 위대한 혁명가로 매기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에서 이 둘은 그렇게 원만한 관계를 이룰 수 없었다. 당통은 1794년 자유주의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로서 국민공회의 정치가 전제주의적 요소와 지나친 폭력적인 점은 지적했고, 국민공회는 그것을 막기 위해 데물랭의 신문사를 폐간시키고, 데믈랑과 당통을 죽음으로 내몬다. 당통은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죽음으로서 공화국의 종말을 예언했다. 국민공회의 권력자들은 당통을 죽여 승리를 맺었으나, 결국 진정한 패자는 국민공회가 되어야 했다.

 

영화 <당통>에서 프랑스인권선언문 제4조인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한 모든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각자의 자연권 행사는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할 경우 말고는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이러한 제약은 오로지 법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가 아주 인상적인데, 그것은 당통이 죽고 나서 로베스피에르는 집에서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잠을 자다가 당통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이때 로베스피에르의 아내가 방에 들어오고, 아내의 어린 남동생이 프랑스인권선언문을 외워 읽기 시작한다. 제4조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자기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진정한 패자로 되었음을 인지한다.

 

생각해보면 21세기 대부분 국가는 자유민주주의국가 체계라고 하나, 실제로 이루어지는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헌법의 정신은 자신의 권리와 더불어 타인의 인권을 존중해야할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국기가 파란색, 흰색, 적색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것이 있다. 붉은 색의 색이 제일 강렬한 것은 바로 박애정신이 자유민주주의적 정신을 가진 시민의식이란 점이다. 당통에서 보면 주요인물은 국민공회와 그들의 라이벌이나, 대중사회를 보면 프랑스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은 무지했다는 점이다.

 

계몽주의적인 요소가 지금도 21세기 한국과 미국, 유럽 등과 같은 많은 국가에서 적용된다.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 정치제가 바로 18세기에서 다 만들어진 정치적 체계이다. 프랑스혁명과 미국독립혁명에서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초점이다. 그러나 막상 장 자크 루소가 누군지 혹은 그의 서적을 읽어본 자는 얼마 없다. 당시 시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이자, 근대 민주주의 아버지, 심지어 마르크스와 같은 혁명가의 아버지 역시 루소다. 괴테는 손에는 셰익스피어지만, 머리에는 장 자크 루소였고, 루소를 알려면 칸트를 지나가야 한다고 했다.

 

계몽주의사상에서 계몽주의 철학가이자 계몽주의를 비판한 루소에 대해 본다면 칸트의 말처럼 계몽은 누군가 깨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깨어 나오는 것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을 지지한 파리 시민들은 후에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에서 가장 훌륭한 병사가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21세기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넘치던 로코코와 같은 탐미주의 내지 낭만주의가 지나간 시절이나, 아직도 계몽주의 사상가에 의해 빚을 지고 산다. 그런 21세기와 당통이 죽던 18세기는 220년이란 차이가 있다.

 

그러나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의 유명한 문구 중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좋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루소는 현대에서 좌파와 우파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사상가이면서 열렬한 비판이 되는 사람이다. 중간이란 기착지점이 없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민주적 자유주의 내지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성에 의해가 아니라 이성의 너머에 있는 인간의 본질에 의해 지배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국민 각각의 권리를 무시할 수 있는 권리 역시 이 또한 없다. 그래서 민주정이란 이름은 모순의 굴레를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정치체제다.

 

<당통>에서 왕정정치가 사라져도 국가는 존치되고, 타국의 위협이 있기에 국가적 체계는 필요하다. 이때 민주정이란 이름은 민중을 하나의 역사적 주체로 등장시켰으나, 주체의 등장은 표면이지 심연의 세계까지 따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여전히 인간의 피를 마시고 살아가고 있다. 피라는 것은 반드시 단두대 아래에서 목이 잘려나가는 것만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체계의 근원이 되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그 자체에 도달하기 과정에 너무 많은 사회적 모순과 인습을 청산되는 그날까지라는 것이다.

 

당통의 죽음은 바로 그런 프랑스인권선언문에서 주장한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신의 죽음으로서 인간의 삶을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통의 죽음을 진정으로 아파했던 이는 당통을 보낸 로베스피에르였다. 그만이 진정 혁명의 끝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당통>은 매우 사실주의적인 영화다. 왜냐하면 실제 있었던 인물과 배경 그리고 사건을 토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심리적 요소나 실제 했던 행동에는 다소 차이가 있을망정 그들이 진짜 프랑스대혁명을 이룩하면서 사라져간 존재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영화는 그런 비극적인 운명을 노래하는지 처음 당통이 파리의 성문으로 들어올 때 광장에 놓인 단두대가 보인다. 저 단두대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이 잘려나갔는가? 다시 단두대는 영화 중간쯤에 보인다. 당통의 운명이 저기에 달린 것처럼 말이다. 당통이 단두대 앞에 나갈 때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이상한 소음과 군중의 아우성이 들린다. 그의 죽음은 왠지 모르게 싱겁게 끝난다. 처형자에게 “나의 목을 자르면 군중에게 보여죠. 나는 그럴 자격이 있어.” 라고 말하는 그의 대사는 왠지 아픔이 느껴졌다. 모든 것을 안고 홀로 죽음을 임하는 그의 죽음은 비극적 미학의 완성이었다.

 

그가 단두대의 널빤지에 일자로 눕힌 순간 단두대의 칼날은 무거운 소리를 내고, 당통의 목이 잘리자 피가 뿜어 나오며 아래 짚단에 피가 쓰며들기 시작한다.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위대한 혁명가의 피를 마시며 성장하는 것이다. 피를 마신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당장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 피와 더불어 또 다른 피를 함양하면서 큰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지금 그 모습을 만들기 위해 단두대는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국민공회가 주관한 혁명재판에서 자기가 만든 혁명재판소에 의해 죽임을 당한 당통으로서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것은 알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당통은 본래 부유한 법조인으로 부르주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로베스피에르의 경우 삼부회에서 부르주아 대표인물로 나가고, 프랑스 왕정의 제정상황을 비판하며 입헌할 것을 주장하고 그것이 되도록 선언한 테니스코트선언이 유명하다. 이후 프랑스 왕정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고, 루이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와네트는 1799년 도주혐의 및 반란협의로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들은 장 자크 루소가 살던 시절에 그를 비웃었지만, 루이16세가 죽을 때 “내가 죽는 이유는 루소와 볼테르 때문이다.”라고 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국민은 자신의 국가를 배신하지 않아야 하는데, 루이는 그것을 배신하여 프랑스공화국의 국민이 아니므로 죽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정식적인 재판보단 형식적인 재판을 거치고, 당시 루이16세를 죽이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으나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 루이16세는 죽고 만다. 사실 루이16세는 포악하지 않았고 오히려 심약했으며, 국민들의 생활을 걱정했다. 하지만 개인의 영향과 더불어 사회구조적인 흐름과 더불어 주변 정치적 영향에 의해 죽은 것이다. 그러나 왕비와 귀족들의 사치와 부정축재를 억눌리지 못한 그의 실정에서 죽음의 회피란 어렵다.

 

영화 <당통>은 당통의 죽음만 아니라 프랑스대혁명에서 거치는 한 과정을 그리는 영화다. 상징적인 요소 즉 왕권을 올리기 위해 성직자들이 신이 왕에게 권력을 준 왕권신수설이란 이데올로기 해체에서 다른 이데올로기로 대체되는 지점이 나온다. 로베스피에르가 화실에 가서 옷을 입고 손에 올리브 잎이나 혹은 지팡이를 들며 상징적 요소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나 혹은 구체제나 상징은 필요하다. 상징을 상징하기 위해 만드는 상징적 요소나 혹은 상징적 요소를 해체하기 위해 필요한 상징이 필요하다.

 

기술과 문명의 진보와 달리 인간의 이성과 윤리적 요소는 진보하지 않음에서 이런 역사적 굴레는 피할 수 없는 업이다. 영화 <당통>은 그런 역사적 비극을 하나의 희극적 요소를 부여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18일>에서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희극(소극)으로”라는 말이 나온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비극적으로 루이16세는 불운한 왕으로 비극적으로 죽고, 당통도 루이16세처럼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비극적으로 죽는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비극이어야 하지만, 하나의 소극으로 되어버린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만들어버린 선택에 자기발목을 잡고, 자신의 목을 자르는 결과가 된다. 강성적이나 그래도 청렴한 로베스피에르의 이상적인 민주주의는 하나의 파시즘에 이르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소극에서 다시 비극과 같이 끝나는 것은 그도 자신에 죽음에 대해 당통처럼 무력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브뤼메르18일까지 자코뱅당이 선택한 정치란 부정부패의 연속이었다. 지롱드파와 같이 무능한 왕정을 지지한 세력과 다름없는 바가 된 것이다. 영화 <당통>은 당통의 죽음은 죽음조차 뛰어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느낄 수 있다. 당통은 그렇게 죽었지만, 당통과 같은 죽음은 반복 되서는 안 될 것이다. 생각하면 우리나라 역시 당통과 같은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코미디 쇼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당통에서 가장 갈등이 되는 것은 당통과 데물랭이 운영하던 신문사에 대한 폐간과 억압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국민공회의 전제주의 정치를 비판하는 것을 감추는 것에서 혁명은 끝이 나고 있었다. 공화국의 기초에서 우리도 이런 모습이 그 당시의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어디선가 역사는 계속 되풀이 되고 오늘도 내일도 계속 반복된다. 그럴 때마다 <당통의 죽음>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에 회사에서 휴가를 얻어 1박 2일로 서울 및 경기도 일원에 머물고 이제 집에 내려왔습니다. 휴가를 내어 서울로 간 이유는 2014년 SICAF 서울 국제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개회식은 화요일 22일에 개최되었으나, 사무실 업무 및 지방에 사는 이유로 23일 학술세미나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당일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이번 주제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미래였습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미래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기존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 국내 상황은 그저 아이들을 위한 오락이나 또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그런 취미생활과 여가생활에서 만화,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터넷에서 게재되는 웹툰, 문학적 요소와 만화적 요소를 합친 라이트노벨, 그리고 게임 등이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의 시대가 다가옴에 따라 수시로 웹툰을 즐길 수 있으며, 각종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하여 스마트폰으로 게임도 즐깁니다. 카카오톡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는 기능에서 더 확장하여 카카오에서 게임을 실행하므로 우리 일상생활에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 및 웹툰은 깊숙하게 침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임영상은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영상이므로 아무래도 21세기 만화 애니메이션의 영역은 커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시장형성과 소비자 및 대중의 인식, 그리고 정부의 법적 행정적인 규제가 총괄적인 문제가 있어서 개선이 더욱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조금 의미 있던 분야가 많았습니다. 애니메이션 부분에서는 앞으로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소비자의 실시간적인 교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발제자의 발표에서 제가 판단하기에는 발터 벤야민이 제기한 파사주적(술집, 아틀리에, 상점, 유흥가들 섞인 지붕이 연속적으로 연결된 건축물)인 파리의 거리를 말하며, 산보자란 유유히 거리를 돌면 그 거리의 즐거움을 즐긴 사람들이 앞으로 인터넷과 극장을 통해 유유히 삶의 유희를 즐긴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애니메이션이란 것이 단순히 만드는 사람만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겠죠.

 

미디어라는 매체에서 애니메이션은 이미 영상과 소리를 동시에 내포하므로 이 멀티미디어적인 요소가 대중사회에 큰 역할을 하고, 실사영상과 애니메이션영상의 구분이 해체되면서 영화 자체가 애니메이션처럼 되는 사례가 허다하죠. 하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면 미디어라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이 반영되기에 하나의 프로파간다라는 선전행위로 이용될 수 있죠. 특히 애니메이션의 경우 과거 만화영화로 만들어질 때 <똘이 장군> 같은 매카시즘을 어린이에게 강제로 전달하는 방법이 있었기에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만큼 효과적인 매체는 없을 것이란 봅니다.

 


이런 점에서 폴란드 예술애니메이션 감독인 마리우스 빌친스키의 강의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솔직히 그분의 작품을 보며 너무 난해하고 어렵다고 느꼈지만, 기본적으로 느낀 것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자식이 부모의 이기심에 의해 희생되고, 그런 모습을 영화를 보고 나오는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영화로도 보면서도 각인하지 못하고 하나의 쇼로 여기는 스펙타클의 사회가 존재했습니다. 이미지가 매개가 되는 스펙타클의 의미처럼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역시 이미지로서 매개하니 그것이 대중사회에 큰 지배력은 주는 것 자체가 스펙타클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 만큼 실험적인 예술애니메이션은 기존 관성적 인식을 가진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새로운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마리우스 빌친스키 감독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추천하신 작품 중에 마르쟌 사트라피의 <페르세 폴리스>와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이더군요. 저는 전자의 작품은 만화책으로 보고, 후자는 애니메이션으로 보았습니다. <페르세 폴리스>는 이란 여성인 마르쟌 사트라피가 겪은 일을 보여주는데, 이란이란 국가가 자유와 평등을 위해 노력했으나 중동전쟁과 구시대적인 이슬람문화로 인해 평화가 무참히 부서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바시르와 왈츠를>는 1982년 이슬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마리우스 빌친스키의 앞으로 애니메이션의 미래는 바로 대중적 재미와 오락만이 아니라 위와 같은 우리가 생각해야할 점, 앞으로 세상의 문제점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술에서 만화는 제9의 예술이라는 것이고, 애니메이션은 영화와 같이 제7의 예술이어야 하겠지요. 그런 점에서 SICAF 행사 이외에도 24일 오전에 방문한 단원미술관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추모특별기획전이 진정 예술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부산․경남지역만화작가 및 웹툰작가분들이 이번에 기획전에 투고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안산은 처음이고, 안산에서 집에 오는 시간 역시 길었지만, 그 시간과 고생은 찾아간 보람을 생각한다면 매우 의미 있게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전시회 가면서 눈에 띈 것은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추모그림이기도 했으나, 박재동 화백과 조관제 화백의 작품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로 작가분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주셨고, 특히 박재동 화백께서는 세월호 희생자 학생의 얼굴을 그려주고, 그 옆에는 부모형제분들이 직접 편지로 적은 글이 새겨져 있더군요.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참 답답했습니다.


 

 


저는 아직 세월호 추모와 관련하여 추모하는 공간에 가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현실의 모습과 단원미술관 하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면서 과연 이 문제가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전시한 그림 중에 인상 남는 것이 518의 비극을 차용한 그림이었습니다. 몽둥이로 어느 청년의 머리를 때리려는 군인, 이미 34년이 지났으나 그때의 악몽이 지금도 나타난다는 저 유령과 같은 모습에 소름이 끼치더군요.

 

올해 4월 저도 처음 광주 망월동에 가서 그 희생자들의 흑백사진을 보았습니다. 아직 초등학교조차 가지도 못한 어린 아이의 흑백영정이 있었습니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도 있었습니다. 2011년에 돌아가신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남영동>이란 수기를 읽어보면서 그때 광주의 비극을 보면서 무서웠습니다. 그런 기억이 그림 1장으로 인해 다시 살아난 듯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몇몇 방문자분들도 있었습니다. 옆에 계신 어느 여성분은 손수건을 눈물을 훔치며 보고 있었으며, 어떤 소녀는 그림과 그림 사이의 하얀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서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아마 이번 희생자의 가까운 사람이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나 봅니다. 마리우스 빌친스키의 감독 말이 생각난 이유가 바로 애니메이션도 그렇지만 만화 역시 이런 사회적 문제를 다룬 것으로 만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장르가 하나의 예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었지요. 벽에 걸린 그림을 보러 가는가? 아니면 그림이 걸린 벽을 보러 가는가?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후자가 강하겠죠?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마치 어린아이들 취급하거나 또는 시간 때우기 식으로 여기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술이란 것은 삶을 빛이 굴절되는 것처럼 보기에, 현실의 비극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은 점에서 만화예술은 바로 우리 사회의 단면들을 강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만든다고 여깁니다.

 

웹툰과 관련하여 최근에 생각나던 작품은 박운음 작가의 <노공이산>이었습니다(그 분이 디자인한 4주기 노란티를 입고 봉하마을에서 몇 번 일했죠).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그분의 말씀처럼 자신은 우공이산을 노공이산처럼 칭한 것처럼 상당히 기억 남는 웹툰이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원진 레이온 사건을 잊을 수 없더군요. 신경이 마비되어 온 몸이 마비되어 가는 노동자 앞에서 무력한 그 분과, 그 분을 바라보는 노동자의 어린 딸, 웹툰이란 것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생각지도 못했지요. 5월의 아픔도 가시기 전에 4월의 비극은 너무나 충격적이더군요.

 

 



만화와 웹툰이 사실 단순히 재미를 넘어 그 표현적인 방법이 아주 탁월한 메시지를 주니 한편으로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런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라보며 참 답답하더군요. 어째든 세월호 추모 특별기획전 준비하신 분들 수고했고, 저번 부산만화연대 모임에 가서 만화가가 아니라서 적응하기 힘들었으나, 전시작품 중에서 제가 아는 분과 그 날 알게 된 분들의 작품을 보면서 많이 반가웠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곰곰생각하는발 2014-07-25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에서 서울 올라오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정말 만화 사랑은 만애비 님을 따를 자 없을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5 08:19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SICAF 교수님 중에 시계, 반지, 목걸이, 핸드폰 바탕화면과 엑세사리까지 디즈니이신 분도 있습니다. 연세가 60대인데 눈빛은 20대 청춘입니다!! 멋집니다!!
 

<꽃이 피는 첫 걸음>이란 작품은 본래 TVA로 나온 애니메이션으로 이번에 감상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꽃이 피는 첫 걸음>은 아직 킷스이소 여관이 폐관 이전에 일어난 일을 구성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주인공 오하나의 외삼촌인 시지마 에니시가 카와자리 타카코와 결혼 후에 일일 것이다. 시기적으로 킷스이쇼 여관이 폐관 이전에 일어난 일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그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 두사람의 결혼과 더불어 TVA에서는 어느 이벤트가 발생한다. 그것은 예전에 오하나의 외할머니집에서 나온 어머니 사츠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킷스이쇼의 일을 도와주던 때다.

 

TVA 마지막화를 보면 어머니와 할머니는 서로 마음속으로 깊은 응어리를 맺고 있으나, 그 나름대로 서로를 이해해주는 모녀로서 등장한다. <꽃이 피는 첫 걸음>을 처음부터 보면 알겠으나, 오하나의 어머니인 사츠키는 집안일에 영 서툴며, 일이 바쁜 관계로 오하나를 혼자 내버려둔 채 계속 밖의 일에 몰두한다. 게다가 첫 화부터 사츠키의 애인이 빚으로 인해 오하나를 더 이상 맡을 수 없어서 시골에 있는 킷스이쇼에 보낸다. 하지만 문제는 킷스이쇼에 있는 가족들은 오랫동안 서로 교류가 없었다는 점과 거기에 보내진 오하나는 여관주인의 귀한 외손녀가 아니라 그저 말썽만 일으킨 딸이 낳은 아이에 불과했다.

 

여관에 도착하자말자 오하나는 여관집의 손녀가 아닌 여관집의 종업원이 되어야 했고, 그 속에서 학교친구들과 같이 일하면서 근로소녀로서 살아간다. 작은 공간이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느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일상 속에 충분히 있을 법한 사람이다. 드라마적인 요소 즉 Drama라는 비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과 같이 오하나의 인생은 그저 평범한 편모집안의 여고생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이야기다. 물론 자신만이 아니라 최고의 요리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민코, 가정 일을 도우면서 여관일을 하는 나코 같이 다들 일을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킷스이쇼(하지만 애니메이션 작화에서는 모두 미소녀지만)이다.

이 전통일본식 여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주인공 오하나라는 존재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의미를 보여준다. 물론 킷스이쇼 여관이 과거의 산물이나, 그 과거 산물인 전통이란 이름을 지키기 위해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세상에 따라 같이 동조하며, 지킬 가치는 가지고, 받아들여야 할 가치는 받아들인 것으로서 전통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전통이란 가치에서 우리 역사적인 현실에서 우리는 조선이란 국가가 최후의 왕조국가이고, 전통문화이다. 하지만 조선 이전의 고려나 발해, 삼국시대나 고조선의 문화적인 유산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한국의 제사문화를 비롯하여 묘소를 산으로 이장하는 것, 어업을 하는 어부가 용신굿을 하는 것은 한국의 전통문화가 계속 이어져 온 것이다. 이들 문화가 조선시대부터 있었을까? 조선시대는 유교문화이고, 특히 공자의 유학보다는 주자학이라고 불리는 성리학에 의해 진행된 유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문화가 아직도 향교문화라는 것으로 전해지고, 제사문화 내지 전통문화가 조선시대 유교문화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런다고 해도 그 유교문화가 그대로 이어진다고 하면 21세기 민주주의국가사회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통문화는 그 자리에 고인 썩은 물처럼 남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물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물을 내보내야 한다. 즉 물 그 자체는 흘러도 물을 담는 그릇인 매체는 그대로 존재하는 법처럼 말이다. 아니라면 좀 더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방법도 있다. 그런 과정이 바로 <꽃이 피는 첫 걸음>에서 보인다. 주인공이 오하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나, 막상 킷스이쇼라는 공간과 그 공간을 만든 오하나의 외할머니 스이의 모습에서 킷스이쇼는 단순히 스이의 집착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모두의 꿈이 있는 곳으로 승화해버린다.

 

그러나 꿈이 있기에 그 가치가 있기에 마지막화에 킷스이쇼는 폐관하게 이른다. 스이라는 늙은 안주인의 꿈은 자신을 사랑해주던 그녀의 남편, 아니 오하나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깃든 곳이다. 스이의 남편은 자신이 사랑하던 아내 스이를 위해 킷스이쇼를 열었으나, 병으로 인해 죽고 만다. 남은 것은 스이와 여관 종업원들, 그 공간에서 사츠키와 에니시는 마음의 궁핍을 느낀다. 오하나의 어머니 사츠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소녀였고, 에니시는 누나 사츠키의 그늘에 가려진 마음이 여린 소년이었다. 어머니가 남매보다는 여관에 치중하자, 에니시를 돌보는 것은 사츠키가 되어야 했지만 오히려 에니시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사츠키가 가진 마음속 빈공간에 새로운 바람이 들어온다. 그것이 바로 <꽃이 피는 첫 걸음> 극장판의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TVA에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나온다. 그 사람은 바로 오하나의 아버지 마츠마에 아야토다. 그는 전문적인 사진작가로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킷스이쇼여관에 머물며, 주변의 경치를 한 폭의 사진으로 담는다. 거기서부터 사츠키의 운명은 변하고, 오하나의 탄생이 시작했다. 오하나가 일어로 보면 꽃님이겠지만, 이탈리어로 가족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가족의 탄생에서 꽃과 같은 오하나의 탄생에는 사츠키의 꿈과 눈물이 있던 것이다.

 

작품 초반에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츠키는 어머니 스이와 갈등을 빚고 있다. 언제나 여관 일만 치중하고, 사츠키 남매에게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어머니, 사츠키는 언제나 어머니에 대해 불만이었다. 공부한다고 하고선 시내에 가서 예쁜 속옷 세트를 사온 사츠키를 냉대하게 대하는 스이에게 사츠키는 자신은 이런 공간에서 그냥 묻히기는 싫고, 자신은 자신의 길을 찾아 빛나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망령을 쫓아가는 것이 어머니라는 말과 함께 사츠키는 여고생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 공간에서 아야토의 만남은 사츠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게 되었다.

 

사츠키는 이제 18세 소녀, 아직까지 그녀는 퍼스트 키스는 둘째치더라도 첫사랑조차 없었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아야토였고, 아야토가 떠나기 전날 기습 키스를 날린다. 그리고 자신은 사진작가인 아야토 옆에 당당히 서기 위해 편집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 행복은 잠시, 아야토는 오하나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게 된다. 여기서부터 사츠키는 자신의 길이 어머니 스이와 겹치는 것을 알게 된다. 결코 질 수 없다는 심정을 말이다. 질 수 없는 그 무엇인가는 자신의 주변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스이는 남편이 죽은 뒤, 여관을 혼자 이끌어왔다는 것을 사츠키는 알고 있었다.

 

남편을 잃은 사츠키가 오하나를 친정에 맡길 때 바로 어머니 스이가 힘들어도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은 모습을 본 것이다. 덕분에 사츠키는 자기 자신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오하나를 여자 혼자서 키우기로 한다. 남편 없는 여자가 혼자서 돈 벌고 아이 키우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물론 남자 혼자서는 더욱 힘들지만 말이다. 그런 어려운 여건에서 사츠키는 그 빛나고 싶은 것을 찾았고, 또 찾아가려고 했다. 사츠키가 빛나는 모습은 스스로 볼 수 없었듯이 그 빛나는 모습을 유일하게 발견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아야토였다. 그런 사츠키가 아야토가 죽어도 그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다는 것은 아야토의 가족으로부터 아야토의 사진을 발견한 것에 대해 전화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아야토의 예전 사진을 찾아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사츠키, 겉으로 보면 어머니로서 낙제점을 받았으나, 사츠키라는 사람으로서는 백점인 인생을 살고 있었다. 자신의 빛을 찾게 해준 아야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오하나를 얻었고, 편집자가 된 여자 사츠키였다. 그래서 사츠키는 자신의 어머니 스이가 여관운영에 만사를 기울이는 이유가 바로 사츠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그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있을 장소와 삶의 이유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그 정체성을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나 감정과 무의식에 의한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 감정보다도 무의식적인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정립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이성적으로 애를 혼자서 키우기도 어려운 사츠키나 남편 없이 킷스이쇼를 운영하는 스이나 두 모녀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같은 얼굴을 하기에 서로를 이해하지만 같은 공간에서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같은 얼굴이기에 서로를 보면 자기 자신의 맨 모습을 다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하나가 과거의 어머니가 아버지와 있었던 일을 알고, 외할머니가 만든 여관을 보면서 자신이 그 공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에 분하게 여겼다.

 

자신이 스스로 가야할 길을 가지 않고, 오히려 그 길을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쭉 같이 지낸 남자친구인 코이치가 자신에게 고백했을 때, 오하나는 그 대답에 대해 성실하게 답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 사츠키와 할머니 스이는 자신이 오히려 그 길을 찾아간 것이다. <꽃이 피는 첫 걸음> 극장판 <홈 스위트 홈>은 인간 오하나로 통해 보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물론 여정은 오하나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하나의 회상으로 어머니 사츠키가 구성된다. 소녀인 사츠키는 자신의 어머니인 스이와 매우 닮아있다. 이와 다르게 오하나는 머리색은 어머니나 느낌은 왠지 아버지와 닮아 보인다.

 

어떻게 보자면 어미니 사츠키와 할머니 스이의 대립성 즉 변증법적인 요소로서 오하나로 인물이 탄생한 게 아닌가 싶다. 오하나는 딱딱한 할머니와 공격적인 어머니보다는 밝고 다정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바쁜 이유로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으나, 사실 사츠키 역시 오하나를 사랑하나, 자신의 무책임한 일상으로서 오하나와의 일상을 지키려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하나는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이해하면서 어른이란 공간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꽃이 피는 첫 걸음>에서 오하나만 아니라 오하나의 친구인 민치로도 알 수 있다.

 

민치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만 만들지만, 정작 어린 손님이나 노인 손님이 오면 그들의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만들었다. 음식으로서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 요리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코는 계속 부모님을 돕기 위해 집안일을 챙기고(가계부를 나코가 작성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생들을 돌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부담에 힘겨워한다. 그래서 평소에는 착한 딸이지만, 나코의 여동생 마나가 집에서 가출할 때, 나코는 어머니에게 전화하여 마나의 소풍에 제발 따라가 달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타인의 입장만 보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힘든 부분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어른의 일이기도 하다. 그런다고 인간은 그렇게 <꽃이 피는 첫 걸음>에서 보여준 것처럼 쉽게 어른이 되어가지 않는다(물론 작품 내 주인공은 힘들겠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에겐 어렵지 않다). 단지 보여줌으로서 일상 속에 머무는 우리에게 빛나는 순간이 있고, 어느새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힘들다는 점이고, 그 과정을 넘어도 여전히 힘든 일은 다가온다. 어른이 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단지 어른이 되어가고 어른이 되는 것은 자기 인생의 길을 찾았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고, 그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걸어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번 3분기 애니메이션 중에 <아키메가 벤다>가 주목받고 있다. 그 작품을 처음 1화만 봤을 때 쳅터편 제목이 "어둠을 베다"이다. 2화와 3화는 각각 "권력을 베다"와 "응어리를 베다"로 나온다. 작품을 전반적으로 보자면 칼로서 베다라는 것으로 통해 무엇을 어떻게 베고 싶은가라는 목적의식이 드러난다. 그것은 1화부터 등장한 타츠미의 수도에 오면서이다. 수도라는 곳은 황제가 사는 곳으로 거대한 도시이며, 많은 사람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다. 그곳에는 왕족부터 시작하여 귀족들이 살고 있으며, 거리에는 하층민들이 주로 돌아다닌다.

 

타츠미는 처음 도성에 와서 나이트레이드 멤버인 레오네에게 돈을 털린 후 길거리에서 노숙하던 중 귀족아가씨의 도움으로 신세를 지게 된다. 문제는 그 귀족의 집에 가면서부터다. 귀족의 집안은 화목하고, 친절한 분위기로 타츠미는 안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타츠미가 머물던 다음날 밤, 나이트레이드가 침범하여 맨 처음으로 그 집안의 안주인을 칼로 베고, 다음으로 파수병과 귀족남자를 베어버린다. 그 뒤로 귀족의 딸을 베려고 할 때 타츠미는 그녀에게 죄가 없다며 말리지만, 알고보니 그 집안 전체가 시골에서 올라온 나그네들을 집으로 유인하여 약 탄 음식을 먹인 후 잔인한 고문을 한 것이었다.

 

작품에서 보이는 광기는 사드 후작의 <소돔의 120일> 3편과 4편에 나올 정도로 잔인했다. 그 가족들은 타인에게 고문과 생체실험으로 쾌락을 가진 것이다. 이런 일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라는 의문에 인류는 그동안 이런 잔혹한 일들을 계속 했었다. 20세기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731부대 마루타 실험이나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광기는 인간이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라고 회의감을 가질 정도다. 물론 <소돔의 120일>에도 그런 잔인한 살인마도 있었다.

 

부패한 정권과 각료 그리고 거기에 동화되어버린 국민들, 프랑스혁명 이전의 프랑스에서는 국민들은 귀족과 성직자의 과중한 세금과 향략에 시달렸으며, 그 분노가 촉발되어 바스티유감옥이 함락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이트레이드란 존재는 폭력과 불관용이라는 이름이 하나의 정의와 도덕이 된 사회다. 정의와 도덕에서 도덕은 윤리와 다르다. 윤리는 상대방의 입장과 조건 그리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사유가 필요하나, 이와 다르게 도덕이란 하나의 법과 제도적인 요건이다.

 

법과 제도는 권력층에 의해 조직되며, 법과 제도가 과연 하층민이나 대다수 국민에게 효율적으로 다가오는지 아니라면 역으로 고통과 분노를 전달한다면 그 사회의 도덕과 정의는 타락한 것이다. 타락한 윤리가 하나의 정의와 도덕이 되었기에 타츠미는 사디즘에 빠진 소녀의 파수병에게 도성의 현실을 듣는다. 어린 왕은 무력하고, 주변의 신하들이 권력을 조작하는데, 요괴보다 더 요괴같은 존재들이 그들이며, 만약 이런 애기가 밖으로 새게 될 경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해결될 수 없기에 그 어떤 협의나 토론으로 그 사회는 구제를 받을 수 없다. 오히려 그대로 썩어들어가 결국은 내부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이 정치적인 상황이다. 그런 어두운 권력이 만든 정의를 다시 정화시키려면 방법은 그 사회 자체를 붕괴해야 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것은 바로 그렇게 피지배계급이 자신을 지배하는 계급을 전복하여 사회구조를 변모시키는 행위다. 문제는 혁명이란 것은 기존의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세력이기에 기존의 지배계급에겐 강력한 공권력 내지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사람들이며, 무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 역시 그렇다. 무력을 소유한 곳은 대부분 국가권력기관과 왕족, 귀족들이다. 그렇다면 일반 국민들은 그들에 대해 대항할 능력이나 조건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면 혁명이란 어떻게 해야하는가? <아카메가 벤다>는 바로 그런 혁명을 다수의 국민이 아니라 소수의 반영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반영웅이라 칭한 것은 국가에 대해 하나의 정치적인 행위로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히 테러로서 혁명적 행위를 하기에 칭한 것이다.

 

영웅과 반영웅은 같은 존재이나 시점과 세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타츠미가 사는 국가에서 나이트레이드는 국가반역자고, 작품 내의 시점에서 정의를 가진 처형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 대해 정치적인 단체가 아니라 일종의 테러리즘으로 대항하므로, <아카메가 벤다>라는 작품은 아나키스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아나키스트 중에서 단재 신채호와 이회영 선생이 유명한데, 그들의 방법은 소수의 아나키스트들이 목표대상에게 몰래 접근하여 암살을 기도한다는 사실이다. 1920~30년대 독립운동사에서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그렇게 테러리즘에 의해 입각한 것이다.

 

<아카메가 벤다>는 바로 반국가적 테러행위로 어두운 권력과 부패를 베려고 하는 것이다. 작품이 만들어진 계기는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조금 의아하나 제작사는 <슈타인즈 게이트>와 <슈퍼 소나코>를 제작한 업체로, <슈타인즈 게이트>에 일본이 한국을 강제통치한 것에 대하여 2CH에서 거기에 대한 조롱하는 내용을 작품 내에 그렸으며, <슈퍼 소나코>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자고 하는 것을 그리기도 했다. 이런 작품을 만든 제작사인데, <아카메가 벤다>는 위 2작품과 다른 관점으로 제작되었기에 조금 의아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본에서 아나키스트로 고토쿠 슈스이가 있으며, 그의 저서인 <장광설>은 단재 신채호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는 1911년 천황 암살기도로 처형을 당한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안중근 의사를 칭송했다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나 1930년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모임에서 각 국가별 대표가 나올 때 일본인도 있었다.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아키메가 벤다>는 작가 스스로가 아나키스트는 아니겠지만, 작품 그 자체적으로 아나키스트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가 작품으로 통해 일본이란 현실을 보는 것은 부조리와 부패로 가득한 것이고, 그런 문제점을 일반인들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약한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사회인만큼 <아카메가 벤다>처럼 누군가 그런 현실을 바꾸어주었으면 하는 욕망이 담겨있다. <아카메가 벤다>에서 나이트레이드는 국가라는 조직은 철저히 부정하며, 그 국가조직의 권력인 귀족들에 대해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다. 그래도 일본에 대해 국화와 칼이라고 말할 만큼 <아카메가 벤다>는 칼에 대한 일본인의 집착을 볼 수 있다.

 

작품을 보면 사지가 절단되고 피가 유혈되는 하드 고어한 설정 속에서 칼로서 적을 베어 어두운 현실을 타파한다는 설정은 칼(도쿠가와 이후 메이지시대~현재)로 만든 일본이 이제는 칼로서 다시 베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심리가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후로 조선에 대한 강제통치시절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주요인사의 후예들이 여전히 일본정치계의 거물로 등장하고 있다. 일본 총리 아베의 경우 역시 그런 점범들의 후예들이고, 전범들의 후예들은 과거의 죄를 뉘우치기보단 오히려 영광의 역사로 알고 있다.

 

그들은 일본 정계에 진출하면서 각종 경제인사들과 유착하고, 거기에는 야쿠자 조직도 관여하고 있다. 과거 칼로서 지배하고 칼로서 침략하던 이들이 몰락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칼(일본 자위대 군사조직화)을 세우는 현실에서 일본 역시 우리나라처럼 사회적인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그런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세계에 사는 만큼 <아카메가 벤다>는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 <아카메를 벤다>에서 아카메가 속한 나이트레이드는 무장테러를 감행하는 혁명조직이다.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처럼 일본이 점령당한 것도 아니고, 기존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개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주인공이 속한 국가를 부정하는 작품은 드물기 때문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micah 2014-07-18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니메이션 쪽은 완전히, 100% 문외한입니다. 당시 누구나 읽던 <슬램덩크>가 가장 기억에 남는 만화입니다. 그건 애니는 아니죠?^^ 애니와 만화조차 구분 못하는^^;;
페이퍼의 수준이 대단하세요. 애니메이션에서 사회정치 구조적인 전반에 흐르는 문제제기 까지. 잡지에 실린 칼럼 읽는 것 같아요. 곰곰발님 서재 방문해서도 깜짝 놀랐었는데, 만애비님도 만만치 않으시군요. 진심으로 후덜덜입니다.
종종 들러 배워갈게요.

만화애니비평 2014-07-18 20:57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제가 곰곰발님이 인정한다는 그 오덕입니다. 오덕을 위해 이 한몸 불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열심히 잉여적으로 글을 적고 있습니다.
슬램덩크 기억나는군여. 소년챔프 매화마다 본 기억이...형집에 애장본이 있어서 가끔 형집(멀리있지만)에 가면 오덕력을 보강하지요.
애니메이션으로 하나의 언어로서 글을 적고 있습니다. Imicah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당~!

2014-07-20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1 08:35   좋아요 0 | URL
오오 기사도 쓰시다니 대단한 분이 오셨군요! 반가워요!
저는 오덕이라고 자부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오덕을 즐기기 위해 오덕으로 살아가는 오덕입니다. 모든 오덕의 권리는 오덕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할까요~
서재활동은 저도 이제 2년차입니다. 하다보니 쏠쏠한 재미도 보고 있죠. 곰발님이 네이버블로그를 떠나 알라딘에 정착하면서 어떻게 하다가 활동중인데,
아이디가 만애비처럼 네이버 역시 만애비입니다. 애니메이션 리뷰하는 것이 취미다보니 이렇게 바꾸었죠.

최근 애니메이션을 주로 TV로 많이 봅니다. 애니플러스와 같은 정액제 사이트에서 실시간 동영상을 즐기는 편이죠. 물론 최근 빨간머리 앤과 같은 극장판도 보았죠.

참고로 제게 제시한 쓰르라미 울적에는 거의 다 보았습니다. 인간의 심리묘사(특히 성우의 연기력이 압권!)가 탁월한 작품이죠. 괭이갈매기 울적에라고 용기사07의 작품 역시 애니메이션으로 보았죠.....

게가 페인과 에르고 프록시 나중에 새겨야겠군요.
에우레카 세븐은 물론 보았지요. 프레이져 경의 황금가지가 그대로 써먹는 애니가 있다는 것을 보니 깜짝하고 놀랐습니다. 어째든 자주 들려주세용..우후후후

뷰리풀말미잘 2014-07-22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심으로 대동단결!! 즐찾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2 22:11   좋아요 0 | URL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아니라
스즈미야 하루히의 SOS단 선언!!!
 

1. 추억의 애니메이션 or 애니메이션의 고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처음 보던 것은 언제인가? 예전에 분명 본 기억은 있으나, 너무 어린 시절에 보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아이돌 가수 린 민메이라는 소녀다. 그리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애니메이션보다는 팩을 게임기에 꽂고 실행하던 시절, <마크로스>라는 게임이 있었다. 단 1기의 로봇으로 변신할 수 있는 전투기 1대가 나와 일직선으로 날아가면서 적들과 싸운다. 그 당시 들었던 노래제목은 몰랐으나 알고 보니 노래제목이 소백룡(小白龍)이었다. 작은 백룡을 의미하는 이 노래제목은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에서 린 민메이와 그녀의 사촌 오빠인 린 카이훈이 등장한 영화 OST이다. 게임에 몰두할 때 머리에 춘권 모양을 한 소녀가 나온 것은 기억이 난다.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는 추억의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추억의 게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전설적인 고전이기도 하다.

 

2. 오타쿠의 용어 탄생

오타쿠란 용어가 있다. 일본에서는 오타쿠라는 의미는 한자로 御宅로서 발음으로 보면 おたく(otaku)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이른바 오덕후로서 간단히 줄여 말하여 오덕 내지 덕후로서 불린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는 주인공 파일럿인 이치죠 히카루가 하야사 미사라는 상관에게 중위 내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보단 오타쿠라고 처음 말한다. 즉 상대방의 칭호를 부를 때 그 사람의 댁이라는 의미를 높이 부르는 오타쿠가 이제는 만화, 애니메이션, 코스튬 플레이, 밀리터리를 비롯한 수많은 하위문화에 집착하는 매니아들에게 적용되었다. 현재는오타쿠라고 하면 사회적으로 조금 맞지 않은 부류로 만화, 애니메이션, 코스튬플레이, 게임 등에 흥미가 많은 사람으로 이어졌다. 본래의 오타쿠는 소비만이 아니라 생산의 영역에 직접 뛰어든 사람들에게 적용된 말이었다. 그러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등장한 오타쿠란 말은 이제 한국에서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언어가 되어버렸다. 이런 단어를 파생하게 만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란 작품은 과연 어떤 작품인가?

 

3. 시대적 흐름과 탈(脫)자국주의적인 작품

<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가 나오던 시절은 1982년이다. 당시 세계는 미소 냉전시대였으며, 중공에는 모택동 사후 등소평이란 인물이 등장하여 개방화 정책을 펼치려던 시대다. 얼어붙은 냉전의 시기가 조금씩 풀리던 시절이다. 그런 점에서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는 시대적 흐름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이른바 자유주의 시장국가에서 적대시 여기던 공산국가와 무역과 교류가 일어나던 시기다. 먼저 히로인이면서 여자주인공인 린 민메이는 일본인으로 나오지만, 본래 자신의 집과 그녀가 일을 도와주던 삼촌댁 모두 중화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린 민메이는 차이나스타일의 의상을 입었으며, 가게 일을 돕고 있을 때는 차이나 스커트에 헤어스타일 역시 춘권으로 만들었다. 중국과 일본의 과거 태평양전쟁의 앙금은 남아있었지만, 서로간의 교류가 점점 활발해지고 있던 것이다.

 

또한 당시 1980년대 일본만화의 흐름을 보면 중국이 배경이 되거나 또는 중국무술이 상당히 차용된 시기가 있었다. 제일 유명한 작품으로 <란마 1/2>이 있으며, <쿵후 소년 친미> 등과 같은 작품을 보면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특히 <란마 1/2>에서 란마와 그의 아버지는 중국에 무술수행을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란마의 의상은 일본의상보다는 중국 무술인들이 입는 복장이었고, 란마의 집에 찾아오는 불청객들 대부분 중국인들이란 점이었다. 미국 일본문화 전문가인 수전 J. 네피어 교수의 <아니메, 인문학으로 읽는 저패니메이션>에서 <란마 1/2>에서 작품배경이나 소재가 중국이 많은 이유가 과거 일본이 중국에 저지른 만행(난징대학살, 731부대 마루타실험, 만주국 괴뢰정부 등등)에 대한 죄의식이 깔려 있다는 내용이 있다.

 

중공과의 관계에서 어떻게든 그 당시 일본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에서 중공은 적대적 관계보단 하나의 모티브 내지 설정이 되기도 했다. 중국무술의 경우 이소룡의 <용쟁호토>를 비롯하여 성룡의 <취권>이 흥행하면서 중국이란 국가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보이는 중국의 모습이란 린 민메이라는 아이돌가수가 도와주는 가게이고, 그녀가 중국식 의상을 입고 있는 점을 본다면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상당히 자국주의 요소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주인공인 린 민메이와 하야세 미사, 그리고 남자주인공인 이치죠 히카루는 일본인이지만, 주변의 주요인물들은 다양한 국가와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크로스 함장이 브루노 J. 글로벌이란 장군처럼 지구에서 떠나 우주공간에 머무는 마크로스함이지만, 그 함의 선장이 흑인이고, 히카루의 상관과 더불어 조종선배인 포커 역시 동양인이 아니란 점이다.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일본인 특유의 문화적 요소가 많이 배제된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사쿠라라는 이름은 많이 등장하는 법이다. 물론 등장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사쿠라라고 하는 벚꽃을 최대한 강조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마크로스함의 함장 이름이 처음부터 글로벌이고, 글로벌은 세계이다. 하지만 그 글로벌의 함장의 이름처럼 세계화라는 것은 지구 전부가 아니라 일부의 통합이란 점이 아쉬울 뿐이다.

 

4. 환영받지 못한 공동체 마크로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가장 처음 전투는 젠트라디인들이 지구 마크로스함을 공격하면서부터다. 젠트라디인들은 지구인들이 고대 프로토 컬처라는 문화를 가진 존재로 각인하고, 지구를 침범하지 않는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우주감시관의 배였던 마크로스였고, 그 마크로스를 파괴하기 위해 지구를 침공하고, 마크로스함은 우주로 향하여 워프하게 되고, 그 뒤에 젠트라디와 전투를 벌이게 된다. 전투를 벌이게 되면 전쟁영웅이 등장하고, 영웅의 활약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게 된다. 포커의 후배였던 이치죠 히카루는 전쟁에서 큰 전환점을 바꾸고, 젠트라디와 전투를 계속 유지하면서 지구에 다시 찾아오게 된다. 하지만 지구로 돌아온 마크로스함은 환영받지 못하게 된다. 마크로스함이 젠트라디의 목표물이고, 그들이 외부로 나가준다면 지구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으며, 젠트라디들은 프로토 컬처에 대한 공포로 지구를 함부로 침공하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지구에 오게 되면서 마크로스함에 붙어있던 거주민들은 모두 사망 내지 실종자로 처리되어야 했으며, 그들의 생존이 알려지면 지구연합조직의 주요 권력자들에게 좋은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조금 양보하여 같이 젠트라디와 동맹을 맺기보단 위험인자를 추방하거나 은폐함으로서 안위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지구로 침공한 젠트라디군에 의해 그 목표는 사라지고, 오히려 마크로스함과 젠트라디군의 전투로 인해 지구가 큰 타격을 받고 만다. 지구인인데도 지구에서 환영받지 못한 마크로스함, 그들은 환영받지 못한 공동체였던 것이다. 물론 지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함 불시착으로 대규모 전쟁 후 평화협정을 맺었다고 하나, 그 기나긴 전쟁의 구심점이던 마크로스함이 계속 머물 수 있는 것은 편하지 않은 일이었다.

 

전쟁의 원인이 마크로스함이었고, 그 전쟁의 종료 이후 마크로스 재건은 전쟁의 고통을 넘어 새롭게 시작하려 하던 상징이나, 젠트라디의 공격으로 무산된 것이다. 게다가 우주로 혼자 떠나버린 마크로스함은 지구방위사령부의 그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없었으며, 지구로부터 돌아온 연락은 혼자서 알아서 돌파하라는 것이다. 결국 지구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었다. 그들이 공동체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공동체로부터 외면 받은 점이고, 마크로스라는 공간은 지구가 아닌 또 다른 지구가 되어야 했다.

 

5. 화합의 공간 <마크로스>

마크로스는 처음에는 젠트라디와 전투를 위해 존재하던 우주선이었다. 그러나 지구로부터 버림을 받고 나서 젠트라디와 계속 교전을 하게 되면서 서로에 대한 정보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마크로스에 젠트라디 요원들이 침투하기도 하고, 그 이전에는 젠트라디에 의해 이치죠 히카루와 아야세 미사가 강제로 끌려오기도 하였다. 거대한 몸체를 가진 젠트라디는 우수한 전투력과 강한 육체를 가진 종족으로서 매우 호전적인 종족이었다. 젠트라디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투가 아니라 프로토 컬처라는 것이었다. 과거 아주 우수한 문화였으나, 그 문화로 인해 과거 인류가 망했다는 전설이 유래되어 모든 젠트라디들은 프로토 컬처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오직 몇몇 중요참모들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이 프로토 컬처라는 것을 알게 된 계기는 이치죠 히카루와 하야세 미사 일행이 엑세돌이 탑승한 전투함에 오게 되면서다. 포로로 잡힌 이치죠 일행들에 대해 심문하려던 젠트라디 참모들인 여자와 남자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으며, 게다가 프로토 컬처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란 점을 알게 된 이치죠와 아야세는 서로 내키지 않았으나 키스를 나눈다.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면서 젠트라디인들을 혼란에 빠지고, 프로토 문화라는 것은 남녀 간의 연애가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마크로스에 마이크론화하여 침투한 거인들은 처음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점점 마크로스 생활에 적응하게 되고, 특히 린 민메이의 노래에 빠지자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린 민메이의 노래에 의해 병사들은 마크로스에 투항하게 되고, 심지어 젠트라디 내에서 여자거인이 밀리아는 그녀가 이길 수 없는 발키리 조종사를 찾기 위해 침투할 정도였다. 발키리에 침투한 밀리아는 젠트라디 내에서 아주 우수한 전투요원으로 그 어떤 전투에서 패배한 적도 없을 정도로 용감무쌍한 전사였으나, 오직 맥시밀리언 지너스에게 이길 수 없었다. 맥시밀리언을 찾아 자신의 원수를 갚으려던 밀리아 이었으나, 맥시밀리언을 직접 만나 칼을 휘둘러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맥시밀리언에게 패배를 시인하고 전사다운 죽음을 원했지만, 맥시밀리언이 밀리아에게 보여준 행동은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품에 안고 키스를 나누게 된다.

 

마이크론화 된 밀리아, 그리도 엘리트 파일럿 맥시밀리언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며, 최초로 인간과 젠트라디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기존의 지구에게서 추방당한 마크로스였으나, 새로운 상대방을 만나면 처음에 다투더라도 결국은 서로 화합의 길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크로스가 새로운 가치라고 본다면, 기존 지구방위사령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구시대적 발상이라 볼 수 있다. 그 구시대적 발상을 가진 지구방위사령부는 젠트라디에 의해 파괴되고, 새로운 가치를 내세운 마크로스는 단 1척의 우주선과 발키리 부대로 거대한 젠트라디를 맞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승리의 여신 린 민메이의 노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것은 이치죠 히카루의 활약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단순히 무력투쟁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가 존재하였다. 그것은 바로 린 민메이의 노래였다. 1982년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애니메이션 안의 히로인으로서 상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린 민메이라는 이름은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이어 <마크로스 7>과 <마크로스 프론티어>까지 세계관을 구축하게 된다. 모든 가수의 동경대상은 린 민메이라는 점이고, 마크로스 선단이 존재성은 린 민메이의 노래덕분이었다. 왜 노래라는 것은 그토록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것일까?

 

20세기에 들어와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투쟁의 역사였다. 20세기의 끔찍한 전쟁으로 1차 내지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란전쟁,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지금도 중국에서 일어나는 티베트 분쟁 등이다. 전쟁과 분쟁의 현장에서 인간은 서로 정의라는 이름 아래 상대방을 무차별 살해한다. 죽음의 폭력을 가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자신들의 정의 아래 실천하는 행동이고, 하나의 절대적 가치이인 반면, 그들의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자들은 고통과 증오의 씨앗이다. 서로 간의 적대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까?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보여준 린 민메이의 노래가 바로 그 순간에 등장한다고 해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인간과 인간이 가진 갈등과 마음의 벽에서 노래로서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에서 이른바 히피문화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카운터 컬처라는 반문화 역시 기존의 권위적인 문화에 대해 저항하게 된다. 가령 국가 내의 분쟁에서 아직까지 미국은 인종차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행위는 아주 끔찍하고 잔인했으며, 20세기 킹 목사와 말콤 엑스의 살해는 20세기 미국이 보여준 아주 폭력적인 사건이었다.

 

킹 목사나 말콤 엑스가 활동하던 20세기 경우 19세기 남북전쟁 이후로도 계속 인종차별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그런 시대에도 흑인과 백인 또는 많은 유색인종이 서로 화합하려고 했다. 그 중심에 바로 음악이 있었고, 특히 재즈음악이 있었다. 재즈음악은 본래 흑인들의 음악이며, 재즈는 스탠다드 재즈부터 시작하여 퓨전재즈 등, 다양한 장르로 나누어져 있으며, 음악스타일이 아주 격조 있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매우 자유롭다. 재즈음악이 연주되면 젊은 남녀들이 서로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아무 상관없이 같이 그 자리를 즐겼다. 미국의 유명한 우드스톡 락페스티벌은 베트남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 인종차별, 남녀차별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 거론될 때 젊은 사람들끼리 그 문제를 뛰어넘고자 만든 하나의 문화다.

 

카운터 컬처의 형태는 결국 기존 세대의 반항과 더불어 상대방과의 교감을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장이었다. 우리가 만약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하여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자막과 영상을 의존하여 감상하여도, 그 작품 속에 나오는 노래의 멜로디와 반주만큼은 쉽게 익히고 따라할 수 있다. 노래의 흥얼거림, 그리고 노래로서 전달되는 감정은 민족과 국가가 달라도 서로 공유하고 느낄 수 있던 것이다. 린 민메이의 노래는 바로 그런 인간이 가진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노래로 통한 화합을 이룩할 수 있던 것이다. 모두가 즐기는 자리를 마련하여 폭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서로 같이 연대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할 것이다.

 

그 결과가 젠트라디에 대한 전략을 단순히 폭력보다는 노래로서 서로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서로간의 친목은 서로 다툴 필요가 없기에 희생을 줄일 수 있으며, 희생을 줄이는 것으로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폭력적으로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인간 스스로 동물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연적 존재로서 자연 그 자체로 살아가는 동물이라면 그 자체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으나, 문명화된 사회에 감정이 메마르고, 삶의 목적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의 의지아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명령 내지 혹은 타의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인간 본연의 가치를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상황에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중심이 아니라 조직사회에 모든 것을 충성하게 되면 인간은 인간성을 가진 존재가 아닌 그저 부품에 불과한 소모품이 되고 만다. 특히 전쟁에서 인간의 개인성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가 얼마나 더 많이 적을 제거할 수 있는지가 평가될 뿐이다. 그래서 린 민메이의 노래는 전쟁에 참전하여 오로지 적을 더 죽일 수 있는 것만 생각하던 젠트라디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음악을 들으면 취미생활을 가질 수 있었으며, 맛있는 요리를 서로 나누어 먹게 되며, 더 나아가 타인과 교류하면서 우정과 사랑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미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서는 감수성을 가져야 하며,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노래라는 것이다. 인간은 눈으로 보는 시각적 매체보단 귀로 듣는 청각적 매체에 더 많은 감정을 느낀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노래를 귀로 들음으로서 인간의 감정을 활발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을 느껴야 즐거움도 알고 슬픔도 알고, 무엇이 자신에게 좋은지 혹은 싫은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면 인간은 인간이기보단 단지 유기물질로 구성된 살아있는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린 민메이는 바로 그런 기계 같은 삶을 살던 젠트라디에게 새로운 삶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7. 새로운 갈등을 보여주는 마크로스 남녀관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는 단순히 인류의 내부적 갈등, 인류와 젠트라디의 갈등을 거대한 서사 안에서 보여주고 있으나, 한편으로 개인과 개인적 사이에서도 보여준다. 이치죠 히카루가 가장 많이 오타쿠라고 부른 하야세 미사의 관계는 남녀관계가 기존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선 이치죠는 하야세를 처음 무선으로 통신할 때 아줌마라고 불렀으며, 하야세는 자신을 아줌마 취급하는 이치죠에게 상당히 불쾌감을 느낀다. 게다가 하야세와 그 주변 동료들은 이치죠를 단순히 에이스 파일럿보단 어린아이로 취급했다. 이치죠는 나이가 하야세보다 어리며, 계급조차 낮았다. 하야세는 사관학교 출신인 장교고, 이치죠는 민간비행조종사에서 전투기조종사로 넘어온 사람이었다.

 

하야세는 중위부터 시작할 때 이치죠는 하사부터 시작했다. 물론 이치죠는 계속 전투에서 활약을 했기 때문에 하사관직위에서 정식장교로 임명되고, 추후에는 비행편대를 이끄는 영관급 장교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이치죠가 진급하여도 여전히 하야세는 상관이었고, 마크로스가 최후의 젠트라디의 내전을 지구에서 마친 후, 글로벌 함장이 미래에도 외계인들이 지구에 침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민선단을 꾸릴 때 그 이민선단의 최고지휘관으로서 하야세로 지목한다. 결국 기존 사회적 지위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게 된다는 점이고, 특히 이치죠와 연인을 맺은 하야세의 경우 이치죠보다 나이나 계급이 높은 점에서 남녀의 성적인 영역이 생물학적으로 달라도,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별 차이점이 없는 것으로 드러낸다.

 

특히 발키리 조종사가 기존에 남성이었으나. 맥시밀리언과 결혼한 밀리아 역시 발키리 조종사로 출전하여 전투는 남자만의 세계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일본사회에서 본다면 기존에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영역을 남성이 주도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점차 그 자리에 여성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남성도 직급이나 상황에 따라 여성 아래 놓이게 되었다. 현재 21세기에서 본다면 여성CEO 내지 정치인 그리고 많은 사회 인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20세기에서는 지금보다 여의치 않았다. 점점 남성들의 세계가 여성들이 들어오면서 남성은 이치죠처럼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전장의 파일럿과 전투함의 작전장교라는 상하체계가 연상인 여자와 연하의 남자의 관계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우위에 있어도 그 여성은 그 남성에 대해 받아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도 생기게 되었다. 처음에 하야세는 이치죠에 대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문제 파일럿에 버릇 없는 아이로 취급했으나, 몇 번이나 자신을 구해주었으며, 마크로스가 위기에 처하면 가장 먼저 해결해 주었다. 아무리 직급이 낮고 어려도 이치죠가 보여준 활약은 상관으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치죠가 보여준 인간적인 모습은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8.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가와이이에 대한 미학

가와이이라는 단어는 일본어로 귀엽다는 말이다. 하지만 귀엽다는 말은 단순히 귀여운 대상을 보면서 우리가 귀엽다고 해주는 것과 다르다. 즉 가와이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말하자면 cute, pretty로 대체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가와이이는 귀여워도 왜 귀여운지를 생각해야 한다. 가와이이에 대한 미학에서 이치죠 히카루가 삼각관계에 놓인 린 민메이와 하야세 미사의 모습으로 생각해야 한다. 린 민메이는 아주 자유분방하고, 자신의 기분에 맞추어 행동하는 소녀다. 때에 따라서는 이치죠 히카루에게 매우 매력적인 여자아이로 보여주기도 하나, 때에 따라서는 이치죠 히카루가 잡히지 않는 존재와 같았다.

 

린 민메이는 평소 애교를 잘 보여주며, 이치죠 히카루가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고도 자신의 사촌인 린 카이훈과 사이좋게 지낸다.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노래하는 린 민메이는 화려한 아이돌가수다. 이에 반해 하야세 미사는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로 군인집안의 영애(아버지가 지구방위사령부의 고위참모)로서 항상 규칙과 약속을 중시하며, 평소 행동을 조심히 하는 어른스러운 여성이다. 그래서 하야세 미사는 린 민메이와 달리 남자에게 귀여워 보이지 않은 존재로 나온다. 즉 가와이이 하지 않다는 점이다. 가와이이에 대한 미학적 정의에서 린 민메이는 손에 잡히지 않지만 손에 넣고 싶은 존재라면, 하야세 미사는 역으로 잡히지 않고 싶은 존재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가와이이 미학은 여자가 남자에게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것보다 여자가 남자에게 애교 내지 변덕으로 보여준다. 처음 린 민메이가 히카루를 만날 때 2사람은 조난을 당한 상태이며, 린 민메이는 마크로스 낯선 방에 갇히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죽기 전에 결혼식을 올렸으면 좋겠다며, 이치죠에게 눈물을 보인다. 이때 이치죠의 마음에는 린 민메이에 대한 애정이 극에 달했으며, 언제나 이치죠는 린 민메이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난에서 구출되고, 미스 마크로스에 당선되며, 가수로서 활동할 때 린 민메이는 생명의 은인인 이치죠에 대해 성심껏 대하기보단 그저 친구로서 대한다.

 

출격하더라도 린 민메이를 생각하던 이치죠가 린 민메이의 미스 마크로스 콘테스트 우승은 다가갈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린 민메이에 대한 히카루의 미련은 쉽게 버릴 수가 없었으며, 린 민메이에 대해 미련을 남길수록 히카루만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가와이이에 대한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미학을 린 민메이에게 적용한다면 가와이이한 존재란 가질 수 없는 존재를 가지고 싶은 것이다. 현재의 가와이이에 대한 요소는 자신이 지켜주고 싶거나 혹은 뭔가 자신보다 능력이 상황이 낮은 대상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감정이다. 즉 내가 옆에서 지켜주고 싶어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카와이이 요소가 반영된 애니메이션과 린 민메이에 대한 요소가 다른 점은 린 민메이는 히카루와 친구라는 점이고, 지금 애니메이션에선 가와이이 대상이 되는 여성캐릭터가 대부분 어리거나 또는 정신적으로 덜 성숙한 존재인 점이다. 즉 동경하고 싶은 상대보단 동정하고 싶은 상대로 바뀌어버린 모에 요소라고 보면 된다. 린 민메이와 달리 하야세 미사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잘 생활할 수 있는 현대적 여성이며, 직장인 마크로스함대 내에서도 매우 우수한 작전장교다. 하아세 미사를 보면 확실히 히로인은 맞으나, 그녀에 대해 뭔가 소유하여 지켜주고 싶다는 감정보단 뭔가 같이 서로 의지하면 살아가고 싶다는 감정이 앞선다.

 

두 여자의 차이는 린 민메이는 기존 남성이 생각하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이라면 하야세 미사는 기존 남성이 원하지 않은 여성상인 셈이다. 그러나 히카루는 린 민메이 대신 하야세 미사와 같이 길을 걷기로 한다. 처음에 어리라고 놀림 받던 히카루가 성장하면서 한 사람의 몫을 수행하면서 남성에게 필요한 여성은 처음에는 귀엽고 애교가 넘치는 가와이이 속성을 가진 여성이었다면, 최후에 필요한 여성은 본인 자신에게 충실하고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인 점이다. 글로벌 장군이나 이치죠의 선택한 사람이 하야세 미사라는 점은 일본사회가 점차 여성에 대하여 그 여성이 가진 능력과 책임감으로 볼 수 있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가와이이 요소를 가진 린 민메이는 모두의 아이돌로서 팬에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녀의 변덕은 결국 남성에게 사랑받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사랑받는 여자는 가와이이 요소를 지닌 여자가 아니라 가와이이 요소가 부족해도 자신의 위치에서 충실한 여자인 셈이었다.

 

9. 엔딩 이후의 세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서사의 시작은 평화로운 세계에 어떤 외적인 문제가 발생하여 그 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원래로 복귀하는지 혹은 다른 방향으로 결말을 맞이한다. 그래서 서사의 시작은 서사의 종료로 이어지고, 그 종료는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가 보여준 서사적 특성은 바로 서사완료 후의 서사의 연결이다. 극장판인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라는 작품을 보면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TVA의 축소판이기도 하나 조금 다른 서사적 방향을 보여준다.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에서 이야기의 종료는 린 민메이가 프로토 컬처의 노래를 복원하여 그 노래를 우주로 보내 젠트라디와 멘트라디, 그리고 마크로스의 전쟁을 평화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런 서사적 패턴은 최근에 만든 TVA <마크로스 프론티어>에서 그대로 반영했다. 그러나 본래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는 인류가 젠트라디와 전쟁에서 승리하여 서로 동맹을 맺고 같이 공존하나, 젠트라디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 내전으로 계속 고민하는 모습이 나온다. 젠트라디인들이 마이크론화하지 못하면 많은 음식과 생활재료가 필요하고, 그것을 나누어줄 형편이 마땅하지 못했다. 전쟁 이후 지구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에 물자가 부족했으며, 인류가 젠트라디와 화합을 하려고 해도 모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덕분에 일부 젠트라디인 중에서 호전적인 자는 반란을 도모하고, 테러를 일으킨다.

 

그때는 안타깝게도 린 민메이의 노래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으며, 린 민메이 역시 자신의 노래에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어 방황한다. 린 카이훈이란 사람은 평화주의자라고 하나, 평화를 위해서 무조건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은 중요하나, 그 신념을 일방적으로 따르게 된다면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린 카이훈이 린 민메이를 이용하여 돈벌이에 고민하고, 린 민메이에 대해 심하게 간섭하고, 결국 2사람은 갈 길을 달리하게 된다. 린 민메이는 린 카이훈과 활동하면서 예전에 자신을 좋아해주던 이치죠를 생각하게 되고, 이치죠에게 찾아가나, 결국 이치죠는 하야세 미사와 같이 길을 걷는다.

 

어떻게 보자면 전쟁이 끝난 후의 마크로스와 지구의 모습은 보통 애니메이션에 보여주지 않은 에피소드다. 그저 절정의 위기상황을 넘게 되면 그것으로 결말이라는 해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와 젠트라디의 연합을 만든 것과 동시에 뒤에 일어나는 내전에서 평화는 쉽게 가지지 못했으며, 평화라는 관념조차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평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서로 공감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회가 구조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체계가 정비 되어야 하는 점도 알 수 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처음에 손에 들어오지 않게 되어 다른 것을 대체되어도 결국에는 다시 본래 원하는 바를 찾기 마련이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엑시돌 참모가 마크로스 내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중요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인류는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아니라면 인간은 평화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원하지 않은지 말이다. 답은 둘 다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었다. 본래 젠트라디인들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프로토 컬처 사람들이 서로 싸우기 위해 만들어낸 인조인간들이었다. 그리고 프로토 컬처 인류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다가 멸망했다. 그런 인류간의 전쟁과 투쟁은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마크로스함이 건재되기 전에 10년 동안 인류는 전쟁을 벌였고, 그 전쟁이 끝난 후에 젠트라디군과 전투를 했고, 그 후에는 인류와 연합하려는 젠트라디인이 연합을 반대하는 젠트라디인과 싸우게 되었다. 인간은 계속 전쟁과 투쟁에 의해 살아오던 존재이고, 그런 만큼 평화를 찾기를 바란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결국은 인간은 스스로에게 정의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이 필요한 점이다. 물론 그 소통과 공감은 단순히 인간의 이성만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서도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왜 글로벌 장군이 하야세 미사에게 우주이민선단을 만들어 지구를 떠나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결국 서로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사는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

 

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이 지구에 사는 존재인데도,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인류는 전쟁을 계속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계속하기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떠나는 것은 다르게 보면 평화를 위해서다. 인간이 결국 전쟁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평화를 위해 인간이 사는 곳을 포기한다는 점은 다르게 해석하자면 지구 현실에서는 평화를 가질 수 없다는 의미도 된다.

 

그렇다면 지구를 떠나지도 않고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참으로 난감한 문제다. 평화는 결국 나 혼자 혹은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하며, 그것은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며, 누구는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워 폭력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런 정의와 합리화가 정당한 세상이라면 마크로스함대는 계속 우주를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지구인류로부터 버림받으면서 말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7-17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17 15:54   좋아요 0 | URL
으아~! 곰발님이 이토록 밀다니...요새 일에 찌들려 책을 많이 읽지 못함이 부끄럽군요

Mephistopheles 2014-09-25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장판 마크로스 마지막 전투에서 발키라가 쏟아붓는 미사일을 슬로우모션로 보며 박장대소 했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9-26 08:30   좋아요 0 | URL
아니 전투를 보고 박장대소라니~!!!

Mephistopheles 2014-09-26 15:01   좋아요 0 | URL
그게 말이죠.....회심의 소나기 미사일을 퍼부을 때...슬로우 모션으로 보면..미사일이 아닌 오만가지 별 잡다한 물건들이 튀어나간답니다.(예를 들면 맥주캔이라던지..) 이타노 서커스로 검색해보시면 내용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