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의 마리아>란 작품은 중세의 가을, 14~15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정확한 배경으로 잔 다르크가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한 후 아직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 도중이다. 당시 사회는 고전주의시대, 즉 가톨릭 종교가 매우 강한 통치력으로 유럽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런 시대에 이단이란 존재는 섬멸의 대상이다. 따라서 <순결의 마리아>는 주인공 마리아라는 마녀지만, 그 시대적 배경은 상당히 역사적인 고증을 담고 있다. 특히 전투장면이나, 의복, 건축양식, 문화적인 요소는 잘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생각난 점은 만약 사람이 아프면 이 뿌리를 드세요. 기도를 합시다. 수술 후 약을 복용하세요. 이 뿌리를 드세요.”라는 점이다. 고대 사회는 지금같이 신약 대신 약용식물로 복용하여 병을 치료했다. 하지만 고전주의시대는 신앙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여기고 기도했으나 그 결과 <순결의 마리아> 4화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4화의 주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마리아의 위험성이란 바로 기독교 문명과 자연적 조건의 대립이다. 여성 복식문화에서 다들 몸을 감추지만, 마리아의 의상은 노출이 강하고, 서큐버스로 통해 남성의 정기를 빼앗아 전쟁을 중지하려 한다. 그러나 고전주의시대에는 성행위를 대하여 교회나 국가적으로 매우 금지시켰다. 특히 여성에 대해 매우 악랄한 존재로 보거나 남성의 정신을 흔들리게 하는 존재로 보았다. 마리아의 존재에서 서큐버스를 다루는 점이나, 노출이 심한 옷은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에 큰 반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기도로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약을 통해 사람들은 구원하는 것은 신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심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중세의 가을이 도래한 유럽은 십자군 원정 이후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렀고, 그것은 민심에 대해 기존 봉건귀족에 대한 의구심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종교와 국가는 여전히 신의 가호 아래 전쟁을 벌였고, 농민보병군사들은 아무런 군사적 기술과 장비도 없이 희생되어야 했다.

 

<순결의 마리아>란 작품이 15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하나, 시대적 조건과 전쟁의 상황을 보면 매우 현실적이고 21세기에도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 전쟁에서 신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바로 그 시대 지배이념이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도덕이다. 그 도덕이란 이름이 결국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혹은 역으로 되는지 잘 나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역사적으로 그러했다. 마리아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 받지 못하나 윤리적으로 옳은 행위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에서 마리아는 마녀이고, 마녀로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존재인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어느 집단의 이익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받아 어느 소수나 다른 타자를 링 밖으로 내모는 일들은 어디서든 일어난다.

 

마녀사냥에 대한 부분에서 15세기 까지는 마녀의 존재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하지만 16세기부터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존재가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악마와 손을 잡고 있었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한다. <순결의 마리아>15세기의 일어난 배경에서 만든 작품이다. 마녀에 대한 고증에서 조금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그런 마녀로서 보는 당시 사회의 모순은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 점이 연속되는 것 역시 중요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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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日立春日 오늘은 봄이 오는 입추 날이나.

 

降雨 아침을 보니 겨울비가 내리구나

 

木蓮花望 나는 목련꽃을 바라고 있으나,

 

冬現連續 긴 겨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네.


적기는 2월 4일에 적었는데, 이제 여기 올림

그런데 우리집은 주택인데 아직 목련꽃이 피지 않음

오늘 날이 너무 추워 딱 맞는 시인듯

하지만 한자로 된 시는 처음 지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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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일상적인 소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은 장 자크 루소의 대표적인 서적인 <인간불평등기원론>에 가지고 온 내용이다.


조잡하고 치켜세우는 데 넘어가기 잘 하는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서는이런 연설과 비슷한 것조차 필요치 않을 정도였다특히 그들은 서로 해결 지을 사건이 너무 많아 중계자 없이는 안 되었고또 강한 욕망과 야심이 지나치게 많아 오랫동안 주인 없이는 안 되었던 것이다누구나 자기의 자유를 확보할 작정으로 자기를 얽어맬 쇠사슬을 향해 달려갔다왜냐하면 그들은 정치제도의 이익을 느낄만한 이성은 가지고 있었지만그 위험을 내다볼 만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그 폐해를 가장 잘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를 이용하려고 했던 자들이었다그리고 현명한 자들까지마치 부상자가 신체의 나머지 부분을 구하기 위해 팔을 잘라 버리는 것처럼 자기네들의 자유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을 보존하기 위해 희생할 것을 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런 것이었다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이 사회와 법률이 약한 자에게 새로운 멍에를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주어 자연의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 버렸다또 사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원히 고정시키고교묘한 찬탈로써 취소할 수 없는 권리를 만들어 일부 야심가의 이익을 위해 이후 전 인류를 노동과 예술과 빈곤에 굴복시킨 것이다그리고 단 하나의 사회에 대한 성립이 어떻게 모든 사회의 성립을 필수적인 것으로 했는가또 단결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스스로도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는 쉽게 수긍할 수 있다사회는 급속히 증가하고 넓어져마침내는 지구의 전 표면을 덮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부동산 투자에 대해 잘 모르고, 알아도 하고 싶지 않다. 개인적 이익,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익, 생각하면 간단하다. 내가 어느 집을 샀는데, 거기가 언젠가 교통이 좋아지거나 혹은 주변에 상업시설이 도래하여 땅값이 크게 오른다. 그래서 미리 구매하여 다른 곳은 산다. 또 새로이 구매한 곳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변물가는 오르고, 살기는 어려워지며, 세금도 부담스럽다.


이런 과정은 보통 일반인들이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현명한 것처럼 땅이나 부동산으로 통한 이익을 자랑스레 생각한다. 물론 자신보다 자본력이 우월한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것은 알고 있지만, 당장의 이익만 바라보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선택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과 특히 아이라는 미래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다른 생물인 동물과 달리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강한 이유는 인간이 죽음을 예상할 수 있는 시간적 인지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시간은 본능에 의한 것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당장 자신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본능적인 행동이다. 이성적인 영역으로 시간적 판단력이란 없다. 시간의 인지능력으로 우리는 결국 자본에 대한 투자도 가능하다. 아무 것도 없는 땅에 마치 거대한 단지와 빌딩이 자리잡는다는 판단은 우리의 시간과 더불어 공간적 이미지로서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이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집 값이 오르면 주변 상점은 물가가 오른다. 상점의 부동산적인 요소와 가구 및 인테리어 소품들은 기본적으로 불변자본, 한 번 구매하면 반영구적으로 이용한다. 물론 건물이나 가구 등에 대한 보수유지가 필요하나, 특이한 일이 없다면 자신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용된다. 문제는 음식재료와 같은 소모성 유동적인 요소는 모르나, 기본적으로 가변자본 즉 인건비에 의한 요소 역시 물가에 비례한다.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왜 물가가 비싼지를 생각하면 불변자본에 의한 상품구매비가 올라가고, 그 이유는 부동산의 증가다. 게다가 물가가 오르면 인건비도 올라가게 된다. 자신들이 이용하는 상점가게를 운영하는 점장 및 관리자, 밑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그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그들의 월급이 어느 정도 충분하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수단을 유지하지 못하므로 상점의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집에 물가가 비싼 이유는 국가 내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그 계기를 만든 것은 각자의 개별적인 사사로운 이익추구, 즉 장 자크 루소가 말하는 <전체의지>로부터다. 게다가 사람들은 교육을 생각하여 학교나 학원을 골라 생각하는데, 학교가 생길려면 먼저 부지를 구매한다. 최근에 도시개발사업에선 기부채납으로 단지조성 시 학교부지를 지방자치단체에 기증한다고 하나, 그 비용의 전제가 사업자에겐 하나의 자본지출이다. 따라서 그 학교부지 내지 공공부지 역시 자신들의 수지계산에 집어 넣는다.


학원과 같은 경우 여기 역시 건물에 임대해야 하는데, 집값이 비싼 곳은 임대료가 비싸다. 그런 만큼 학원수강료가 올라간다. 그러면 일반 주민들은 아이들 학원비가 비싸서 고민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어디서부터 틀어졌을까? 물론 자신이 아닌 타인들의 이기심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정작 자신도 그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땅값에 의한 차익을 노리지 않는 것을 아쉬워 하고,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안타까워 보겠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면 누가 더 안타까워 해야할지 모를 일이다. 


지금의 자신에 의한 차익을 보겠으나 먼 미래 자신의 후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이가 1명이 아닌 2명 이상이라면 모두 커버할 수 있을까? 자신의 자식들은 잘 사는 집에 보낸다고 하는 계획도 좋지만, 그 상대방이 마음에 드는지 혹은 그 상대방의 가족들이 마음에 들지 생각해 볼 일이다. 개인적 이익이 합계인 전체의지가 만연한 사회에서 결국 당장은 손해보지 않는다는 착각에서 먼 미래는 더한 손해들이 닥쳐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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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대한민국을 보면 붕괴한던 이스터섬 같아요.부족장은 더 높은 석상을 세우며 끊임없이 자신의 위신을 높이려 하고, 부족민들은 굶주리다 서로 잡아먹는 카니발리즘까지 이르죠. 여기 저기서 벌어지는 사고도 그렇고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사건도 많아지는게 이스터 섬이 떠오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2-04 23:31   좋아요 0 | URL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에서 이스타섬의 멸망은 나무를 베어 결국 숲생태계가 없어져 맑은 물과 원목을 엎을 수 없고, 단백질 공급처인 동물들조차 숲이 없어 멸종하니 그야말로 최후의 카니발리즘, 식인축제죠.
우리는 먹는 것도 풍부한데, 사람들은 먹는 것보다 자본에 대해 카니발리즘을 하죠. 자본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차지 않으니 말이죠. 패배자들은 계속 분노사회로 이어지고, 폭력이 일어나고, <에밀>처럼 목을 매달 사람은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드는 자인데, 오히려 그런 자들이 큰 소리를 뻥뻥치니...코미디입니다
 

(다산초당 앞 민박집)

 

최근 들어 루소의 서적들을 계속 읽다가 루소가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탄생했고, 그의 저서 중에 <사회계약론>이 1762년에 저술된 것을 알았다.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적이다. 왜냐하면 로베스피에르나 당통과 같은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의 시대정신이 되어준 도서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정신으로서 루소가 저술한 <사회계약론>이 나올 쯤에 한국에서도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탄생한다.

 

 

(다산초당 앞 다신계 찻집 주치장)

 

그분의 이름은 정약용, 본래 그의 호가 다산(茶山)이라고 하나, 사실 사암(俟菴)으로 사용되었다. 어릴 적에 부르던 이름은 귀농(歸農)이라고 했고, 미용(美庸)이라 했다. 귀농이 된 이유는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란 선비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채 배고픔과 갈증으로 죽은 사건으로 인해 시골로 귀향했으며, 이때 정약용 선생이 탄생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배경은 영조시대로 서인들 중에서 특히 노론(老論)이란 벽파가 득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 역시 노론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서다.

 

(다산초당 앞 민박집)

 

어린 시절 영조 아래서 자라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슴깊이 원한을 감추고, 언제나 자신의 암살하려는 자의 위협때문에 새벽닭이 울면 잠이 들었다고 한다. 영조 역시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에 대한 후회로 살아왔으며, 그 자신도 후궁의 자식이란 당시 사대부사회에 대해 환멸과 동시에 권위를 찾으려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벌하려고 할 때 조선 3대 명정승인 채제공 선생이 영조의 옷자락을 붙잡고 사도세자의 구명을 간절히 바랬으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며 머리를 숙인 채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다산초당 주인 윤단의 후손이 운영하는 다신계 찻집)

 

물론 사도세자는 그렇게 죽었으나 채제공은 정조의 신임을 받고 정약용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으며, 정약용의 탁월한 후원자였다. 정약용은 정치적은 남인(南人)이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시파였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시대 철학자이며 사상가이면서도 실학자인 성호학파의 후예였다. 정약용 선생은 성호선생을 평생 존경했으며, 성호라는 호수 위에 다산학이란 큰 학문을 펼쳤다. 한국의 철학사상에서 모든 것은 다산 정약용에 의해 모아진다고 했으니 그 얼마나 큰 영향을 준 인물인가?

 

(다산초당 앞 민박집,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 다산의 자가 귀농인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가? 또한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절에 천연두가 만발했기에 정약용 선생 역시 천연두를 앓았고, 그 후유증으로 이마에 점이 생겨 미용이란 이름이 생겼다. 정약용의 그런 험난한 조선시대 후기에서 정조는 조선군주의 최후의 명군이었다. 학문과 무예를 중시하고, 권력의 암흑에서 백성들의 도탄으로부터 지켜내려 했다. 나는 아직도 이계심 사건을 잊을 수 없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친구 윤서유의 집 안내표지판)

 

정약용 선생이 어느 시골고을의 판관이 되어 부임하는 길에 정약용 앞에 어느 사내가 길을 막았다. 그는 이계심이란 사람으로 정약용 선생이 오기 전에 판관에게 항의를 하던 주동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으로 보면 반국가적 인물이었으며, 운이 좋지 않으면 참수형에 효시까지 당할 수 있었다. 그가 목숨걸고 정약용 선생 앞에 나와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조목 10가지를 보여주며, 울분을 토했다. 정약용 선생은 이계심에게 오라를 하지 말라 지시하며 그를 옆에 걷게 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문제점을 다 해결해주었고,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며 만세 불렀다고 한다.

 

(명발당, 밝음이 시작하는 장소)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일화나 이야기를 듣거나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짠한 느낌이 든다. 물론 이계심이 아니더라도 그가 하려던 정치의 근본, 즉 백성이란 점 백성이 있기에 국가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시기와 질투 그리고 파괴의 조짐이 왔다. 정약용 선생은 기본적으로 성호학파였고, 그 중에서 급진적인 편이었다. 만천 이승훈, 광암 이벽, 선암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성인으로 모실 정도로 큰 업적을 가졌다.

 

(명발당)

 

문제의 시초는 1791년 정약용의 이종사촌인 윤지충과 그의 사촌이 윤지충의 모친상에서 신주를 불사르는 죄로 참수가 되는 일이 생겼다. 당시 윤지충의 가계에서 조선 중기 문신인 고산 윤선도가 있었다. 노론세력에서 고산 윤선도는 최강의 적이었다. 예송논쟁에서 노론 거두 우암 송시열과 말다툼하여 귀양살이를 밥먹듯이 한 윤선도의 후예는 노론 입장에서 반드시 칠 적이었다. 그날의 사건으로 한국천주교회사의 한국의 천주교성인 목록은 생성되었으나, 당시 그 집안은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명발당)

 

그 윤지충의 목이 잘린 곳에 현재 전주 정동성당이 위치해있다. 웃긴 점은 그의 친계의 조상인 고산 윤선도가 태어난 곳은 서울 명례방으로 현재 명동성당이 위치해있다. 그의 후손들은 해남 연동리 비파숲 아래 녹우당이란 가채로 이어져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천주교박해는 신해사옥과 더불어 1800년 정조의 승하, 1801년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로 이어진다. 정약용은 신해사옥 이후 천주교에 대해 마음을 버렸으나, 그것이 평생 자신의 꼬리를 붙잡아 따라 다녔다.

 

 (시조, 매조도)

 

그의 주변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신유사옥과 황사역백서로 주변 친구와 친척들은 사문난적으로 되어 목이 잘리거나 귀양가거나 영영 볼 수 없는 운명의 길에서 사라졌다. 그의 귀양은 18년, 경북 장기현으로 하여 강진으로 올때까지 외로움과 괴로움의 나날이었다. 다산초당은 귀양살이 후에 한참 뒤에 올라간 곳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윤서유 역시 신유사옥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 그렇지만 시간은 서로간의 마음을 녹이고, 정약용이 아무런 해가 없음은 강진 마을주민들이 알게된다.

 

 이때 정약용의 외갓집의 일가가 다산초당으로 모신다. 그리고 귀향살이에서 한국의 문학, 사상, 철학, 의학, 경제학, 법학 등 모든 다산학의 시작이 이제 빛을 본 것이다. 유배지에서 그가 한 업적은 동양 한문학권에서 대단한 발전을 미쳤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귀양살이는 풀어날 기미도 없으며, 그런 와중에 자신의 막내아이가 죽는 변도 당한다. 귀향 후에도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자들도 여전했으며, 그를 예전에 아주 괴롭히던 자가 이제는 마치 안부를 물어 잘 지내냐고 묻는다.

 

조선의 천주교의 도래에서 메시아주의로 인한 피의 분출에서 정약용은 평생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형인 정약종은 신유사옥에 죽어도, 그의 후손 역시 정약종에 따라 죽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한국의 메카시즘이란 공포 역시 다른 형태로 핍박하는 형태를 볼 수 있다. 정약용의 일대에서 유배지의 모습은 인상깊다. 애절양이란 시를 보면서 당시의 농민이나 혹은 남근을 스스로 베지 않아도 의미가 없는 현대사회의 청년들의 모습이 서로 겹쳐 보인다. 

 

예전에 내가 대학을 다닐 적에 천주교재단의 소속이었는데, 그곳에서 다도동아리 회장 활동을 했다. 학교 뒤에 수녀원엔 다도를 하신 수녀님도 계셨다. 그런다고 내가 천주교를 믿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전통사상인 무속신화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래서 신화학에 대한 도서를 읽어보면서 신화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이래저래 보고 있는 것이다. 차문화에 대한 인물로서 조선시대 정약용,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딱히 차를 발전보단 차로서 어떻게 인물들이 서로 문화를 교류했는가이다. 아직도 백련사와 다산초당은 귤동마을에 위치해있다. 귤동마을은 당시 귤이 어느곳에서 안나오고 제주에서 나오나, 강진 귤동마을에서 나오고, 그 귤동마을에 야생차가 많이 서식하여 다산이라 불렀다. 자연의 정취를 좋아하는 정약용 선생이 그래서 다산이란 호를 사용했다. 

 

예전에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절 초당은 초갓집이었다. 60년 전만 해도 그랬는데, 보수와 화재의 문제로 기왓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초당은 아직도 귤동마을의 선비인 윤단이란 사람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 그의 후손은 정약용 선생이 좋아한 다산의 야생차를 달아 만드는 일을 하고 찻집 다신계를 운영중이다. 예전에 맛본 적이 있는데 참 맛있었다. 은은한 녹차의 향이 울려퍼지는 정약용 선생의 마음이 우리 사회에 들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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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스펙타클러도 스펙타클을 선택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솔짓히 대놓고 말하자면, TV에서 방영되는 저 많고 많은 영상들, 거기서 우리 일상과 연결되는 것도 혹은 아닌 것들도 많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하고 직접적인 것들에 대해 너무 쉽게 잊히고,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것들만이 열광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매개되어 된 사회다. 이미지란 것은 결국 3차원적인 물리적 공간보단 오히려 영상으로 이루어진 미디어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이다. 그런다고 물리적 공간조차 스펙타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사상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사상이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 단지 자신의 주머니 속의 자본이랄까?


하지만 그 자본 역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만들어준 조류를 타고 흘러갈 뿐이다. 어째든 이런 글을 쓴 동기는 토요일 독서모임을 할 때다. 1차로 책 이야기를 하고, 2차로 근처 통닭집에 가서 맥주, 소주를 주문하여 안주로 치킨과 감자튀김을 먹을 때다. 그런 시기에 가게 안에는 수많은 인파로 붐볐고, TV에선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 영상의 움직임과 소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환성이 큰 노이즈로 되었다.


한국과 호주의 축구시합, 운동을 좋아하고 특히 축구경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아마 좋은 구경거리일 것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란 곧 구경거리의 사회이니 말이다. 단지 그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축구경기의 대본 없는 파노라마한 액션에 환호성을 지른 후 TV에서 축구경기 후의 방송채널이 무엇이 나오는지 보았다. 그것은 부평어린이집 폭행사건이었다.


뉴스화면에서 어린 아이에게 뺨을 날리는 보육교사의 행동은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충격적인 모습을 보면서 가게 안을 볼 때 방금까지 축구경기를 하던 때와 다르게 조용했다. 아니 거의 보통 가게와 다른 없는 상황이었다. 축구경기에서 슛을 날리고 공을 드리블 하는 모습에선 열광하는 손님이 이제는 다른 모습인 것이다.


솔직히 축구시합에 한국이 이기면 좋기도 하겠지만, 딱히 좋거나 나쁜 게 아니다. 단지 운동시합에서 그 선수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충분히 내뿜을 수 있기에 그들의 노력과 성과를 볼 수 있음이 중요한 점이다. 실존적인 인간상으로 그것은 선수들의 보상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하고 뉴스에 침묵한다. 물론 안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더 겁나는 것은 어느 사람이 폭행사건 당사자가 아닌데, 이상하게 번호가 유출되어 곤혹을 치룬 점이다.


그 사람의 폰이 인터넷 웹사이트에 유머 내지 엽기 라는 주제로 올라가 있었는데 수백 건의 문자와 카톡, 전화들이 와서 그 당사자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당사자가 아닌데도 억지로 욕을 먹는 입장에서 그야말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자기 안으로 가는 공간이 아니라 스펙타클의 사회의 열렬한 추종자로서 움직인다.


단지 그 열광적인 자세가 어느 것에 매달려 있는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나도 열광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본 적이 있었다. 하다못해 지금 어느 것에 열광할지도 모른다. 단지 그것은 남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혹은 아닌가란 생각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어느 특정 아이콘에 목매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런 행위가 자신이 결국 정의 내지 좋은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우리 인간들은 평소 정의로운 삶을 살지 않는다. 만약 죄없이 욕먹었던 사람에게 전화, 문자, 카톡을 보낸 사람 중에 과연 몇 %가 어려운 이웃이나 사람들을 도울까? 거의 없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진짜 세상을 먼저 생각한 사람들은 저런 일이 있기 전부터 먼저 찾아가고, 진짜 그 보육교사의 악행을 처벌하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직접 가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기 실천적이지 못한 정의관, 혹은 그게 아니라면 정의도 아닌 정의를 두고 성난 군중떼처럼 몰리는 인간, 민주주의사회에서 시민들의 의식으로 통한 연대운동은 중요하나, 정작 그 연대정신에 일반의지가 결여된 것이라면 만들지 않은 것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운동조차 하나의 스펙타클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명제에 대한 안티테제, 그 안티테제에 대한 또 다른 안티테제가 이어지는 현상에서 우리의 스펙타클의 사회는 달려간다.


이런 사회에서 마치 자신은 아무 것도 원하지도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자칭 아나키스트들, 내가 볼 때 이들은 정말로 정신적인 자위를 도가 지나친 자다.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만이 속박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세상 그 자체를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나는 아무도 지지하지 않아 나쁜 놈이 아니네요. 나는 투표하지 않아 책임이 없다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려는 멍청한 지성, 만약 촘스키나 신채호의 책을 읽어본 자라면 인정하겠지만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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