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용은 될 수 있다고 말은 하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천년의 기다림에 대해서 말하진 않지.
어린 아이들은 용을 꿈꾸며 자라왔다.

 

 

 

 

작은 물 졸졸 흐르는 강물에서도
콸콸 흐르는 폭포속에서도
혹은 저 큰 바다에서도.

용은 언제나 나타나 우리에게 비를 뿌려주리라.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 하나하나가 스스로를 용의 아이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천년의 세월 동안
다들 잊어버리고 말았지.
그리고 깨달았다네
어느 누구도 용이 쉽게 되지 않는다는걸.

 

 

 

 

그 천년의 시간 동안 용의 알은 갈라져서 깨어지고, 먹히고, 불타올랐다네.
천년의 시간이, 천년의 시간이 용에게는 필요했네.
그래서 아이들은 꿈을 버렸다.
대신 용을 꿈꾸었다. 비를 뿌려줄 용을 꿈꾸었다.

그 언젠가 용이 다시 나타나면
우리에게 비를 뿌려주겠지.
좀 더 많은 용을 키울 시간을 주겠지.
언젠가 용은 우리에게 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용은 하지만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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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진중우는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물론 보디가드들이 역시나 그를 뒤쫓아오고 있었고, 모르는 것은 그 하나 뿐이었다. 형은 그가 몰래 빠져나갈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망가도 막지마.]

 

진진우가 보디가드들에게 이른 말이 있었다.

 

[어차피 가도 윤승아라는 아이돌 가수 대기실에 있을 거다. 대기실 문 앞에서 기다리기만 해도 되니까.]

 

무대는 절찬이었다. 윤승아와 길원택의 멋진 사랑 이야기가 부풀려진 것도 있었지만 아이돌답지 않게 뮤지컬 무대를 잘 소화해낸 탓도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뮤지컬 배우가 되려면 엄청난 전달력을 가져야 하는데 아이돌 배우로서는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철저한 길원택의 지도탓에 윤승아는 가수로서도 굉장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오늘도 성공이야. 대단해. 승아씨."

 

길원택의 칭찬에도 승아는 어설프게 웃을 뿐이었다. 뭔가 진심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위화감을 느낀 길원택은 앞을 바라보았다. 대기실 앞에 중우가 서 있었던 것이었다.

 

"아, 열광적인 후원자님이 오셨군."

 

최대한 말을 비꼬듯이 하면서 길원택은 자리를 피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방해꾼은 물러가죠."

 

"저...기."

 

승아의 말에 길원택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됐어."

 

"대성공이야. 승아야. 근데 우리 간만에 만났는데 이야기 좀 하자."

 

중우의 반가운 얼굴에도 불구하고 승아는 초조해했다.

 

"자, 대기실에 들어가던지, 아니면 우리 밖에..."

 

"아니, 분장 지워야 하니까 우리, 대기실에 들어가요."

 

단독 대기실에는 꽃들이 잔뜩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길원택과 연관된 사람들이 보낸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승아는 떨리는 손으로 분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얼마만이야. 저번 무대 이후로 우리..."

 

"...안 만났으면 좋았을걸."

 

승아의 말에 중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잘못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도대체 그 기사는 무슨 말이야?"

 

"응?"

 

사태파악을 미처 못한 중우에게 꽃다발이 던져졌다. 승아가 울면서 꽃다발로 중우를 내리친 것이었다. 그건 중우가 들고온 빨간 장미다발이었다. 꽃잎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난 이미 약혼했어! 이제 와서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 날 보고 어쩌라고!"

 

"......"

 

이번에는 응? 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중우는 그제서야 사태를 깨달았다. 바로 그 기사!

 

"거짓말이지? 그 남자하고?"

 

"......"

 

"말도 안돼! 널 좋아하는 건 나야. 저 남잔..."

 

"그분은 날 너무 사랑하셔."

 

"거짓말! 넌 그 사람 안 좋아하잖아."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겠어. 널 구해준 사람인걸.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날 지금의 위치로 올려준 분이란 말이야."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돌아가신 선생님 무덤에 가서 잠깐 서 있기만 해도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당장 알 수 있을 거야. 좋아한다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그 손하고 겁에 질린 얼굴은 대체 뭐야?"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중우씨는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거짓말 하지마. 네가 거짓말 하는 거 당장 증명해줄 수 있어. 분장 다 지웠지? 우리 나가자."

 

차분함을 가장한 채 윤승아는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데도 가지 않아. 조금 있으면 또 레슨 있어."

 

"나가는 거야. 넌 오랜 친구로서의 내 말도 무시하는 거야? 제발!"

 

승아가 듣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말했지만 중우는 그녀의 팔을 잡고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나가기 시작했다. 여자 말을 안 듣고 우악스럽게 나오기는 길원택이나 진중우나 마찬가지긴 했다.

 

"'어디로 가."

 

"네 부모님 무덤에! 거기 가면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넌 지금 길대표한테 귀도 먹고 눈도 멀었어."

 

그 둘은 황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가까운 소도시로 향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지켜보던 다른 두 사람도 자기가 탄 차로 윤승아와 진중우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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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승아의 공연이 있는 날, 중우는 어떻게든 가출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날렵한 보디가드들이 버티고 있어서 좀 힘들 것 같긴 했지만 어느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는데.

 

"적어도 여자친구를 사귀려면 톱스타를 사귀어야지.아이돌은 말구, 그래 뭐냐, 가녀리면서도 우수에 차 있으면서도 풍만한...그래, 이를테면 여배우같은..."

 

감을 잡은 형이 어느새 따라와서 현관문 앞에 서 있는 그의 등을 잡고 끌어냈다

 

"그래야 그쪽 여자들도 입을 다물고 얌전히 있는단 말이다. 하긴, 그 댓가로 얻어지는 선물이 커서 그렇지. 너도 그러니까 톱스타 하나 붙잡아서 데리고 놀라고. 진지하게 놀지 말고. 그때 그 사고도 엄밀히 말하면 그쪽 책임이잖아?"

"형! 하지만 기사에는..."

"우리 소속사 띄우려면 뭔 짓인들 못하냐."

"......"

"넌 한동안 집에 있어라.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아. 그 여자애랑 엮이는 일은 웬만하면 피하라고.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못 들었었냐? 근본은 안 바뀐다고...."

"그건 무슨 소리야..."

"우리 회사는 그냥 회사가 아냐. 필요하면 마피아로도 변신할 수 있어. 그게 회사고, 조직이지. 그것만 알아둬."

"개인정보를 수집했단 말이야? 그건 불법이야!"

"너를 위해서다."

"형!"

중우의 형 진진우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들려주면 안될 험악한 이야기였다.
순수하고 성실한 후계자가 될 중우에게 이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일이었다.
어떻게!
마약밀수상과 얽힌 여자애를 여자친구라고 데리고 다닐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건 그룹의 이미지상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일이었다.

 

쾅!

 

진진우는 문을 있는 힘껏 닫고는 동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 사업은 네가 하는 사랑 놀음하고는 전혀 별개야. 우리가 하는 건 전쟁이지. 연애가 아니거든. 정 못 견디겠으면 바지사장 시켜줄테니, 그냥 보고나 있던지. 그 길원택이란 놈 아주 질이 나쁜 놈이야. 뿌리를 뽑아버려야 해."

 

"...형?"

 

"이건 전쟁이다. 그것만 알아둬라."

 

 

23.

그와는 반대로 길원택은 장난감 반지를 손에 끼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파라치가 키스신을 찍었고, 잠깐 얼이 나가긴 했다. 하지만  그전에 남는 여유시간에 아이스크림 부록으로 나오는 장난감 반지를 꺼내서 끼워주기도 했다.

 

"원...택씨..."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면서 승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노릇이었다. 진짜 반지를 끼워줘도 곤란하겠지만 이런 싸구려 장난감을 끼고 무대에 올라갈 수도 없는 것이다.
여차하면 놀림거리가 될 테니까. 여자 아이돌에게 곤란한 것은 열애설이 불거지는 것과 촌스럽다는 딱지가 붙는 것이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왜? 싸구려라서 그러냐?"

 

원택이 빙긋 웃었다. 화단에서 남들 몰래 나와 있는 기분도 괜찮았다.
대부분의 경우는 몰래 몰래 데이트를 하지만, 어차피 그 사고 이후부터는 공인된 사이였으니까.

 

"지금은 일이 바빠서, 네 단독 공연때문에 너도 정신이 없으니까 반지 따로 하러 못 가지만, 여유 좀 나면 시내에 공방에 가서 아주 예쁜 걸로  맞추자. 비싼 것 좋아하면 그렇게 맞추고.."

 

"....대표님도.."

 

"어허, 대표 아니라니까, 길원택. 원택씨~ 이렇게 부를 수 없어?"

 

하지만 승아는 그렇게 부를 수 없었다. 승아에게 있어서 원택은 항상 그 위치에 있었다. 무대의 샹들리에 모양을 한 조명 장치에 그대로 얼굴과 손을 댄 바로 그 위치에.
그것은 끔찍한 악몽이었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천국이었다. 승아가 그토록 겁내던 가난에서 벗어났다. 아버지 두 사람은 그대로 세상을 떴지만 길원택이 지금은 옆에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엄하긴 했지만 그가 지도하는대로 걸어나가면 모든 게 다 성공이었다.
다소 유감이라면 이번 성공을 함께 기뻐해줄 동료나 선생님들이 사고나 지병으로 숨졌다는 거겠지만...

하지만 중우라면 기뻐해줄 것 같았다. 오랜 친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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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 다음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길그룹의 길원택 대표, 소속사  톱 아이돌 윤승아와 열애설]

 

[윤아기업 후계자 진중우, 엔터테인먼트 그룹 설립, 유수한 톱 배우, 가수들 영입 예정,
그 중 모 그룹 대표와 열애설이 있는 톱 아이돌 영입 예정. 삼각관계인가?]

 

길원택은 눈을 감고 서 있는 [유령]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번 한번만 더 도와줘야 될 것 같아."

 

"...제 얼굴은요."

 

"일부러 방조했다는 거 알고 있어. 우리 키스하는 거 몰래 보고, 찍고 도망친 파파라치놈도 그냥두고. 그 덕분에 그 조그만 도련님이 대형 사고를 치려고 하고 있어."

 

"절 보고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죽이기라도 해야 했다는 겁니까?"

 

"....."

 

잠시 낮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길원택이 입을 악 물고 웃었다.

 

"당연하다고 하면 자네도 상처받겠지. 하지만 말이야. 이건 다 업보라고. 단순한 기술자였던 자네 얼굴이 염산을 뒤집어 써서 그 모양이 된 것하고, 자네하고 내가 이렇게 엮인 것 하고 말이야. 자네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고, 자네는 또 내 덕분에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얼굴 가지고 징징거리지말고. 내가 하라는대로 해. 제발. 그러면 얼굴은  때되면 알아서 고쳐줄테니까. 젠장!"

 

조금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그 소녀를 거의 손에 넣은 것이었다. 의사시절부터 손에 그토록 넣고 싶었던 순수의 결정체. 자신을 이 길로 이끈 소녀.
이제 장난삼아 반지도 교환한 만큼 승아의 마음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 온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어린애의 장난에 놀아날 수는 없었다. 절대로!
무슨 술수를  쓰더라도, 아니 죽이기까지 하더라도 꼭 그 어린 놈하고는 떼어놓고 말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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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뮤지컬은 성대하게 끝났다. 세 사람의 죽음과 함께.
주연인 윤승아의 인기는 놀랄 정도로 치솟았고, 동시에 길원택과의 열애설도 더욱 불거졌다.
물론 사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승아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인것은 뮤지컬이 끝나면서 길원택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는데 있었다.

 

"승아씨."

 

승아야 에서 승아씨로 호칭이 우선 바뀌었고, 억지로 질질 끌고 나가지도 않았다. 뮤지컬 연습 당시 춤연습 시킨다고 강제로 손을 잡고 연습실을 질질 끌고 다녔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였다.

 

[손 잡아. 다리 질질 끌지 마. 자 여기서 음악 나간다. 손에 힘빼!]

 

길원택의 살짝 일그러진 얼굴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역시나 약간 데인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올리면,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유령]은 그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었다. 매직 미러로 보기도 했고, 탈의실에서 살짝 문을 열고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기도 했다. 가장 좋았던 것은 길원택의 취향에 맞춰서 수정된 의상을 입고 그녀가 춤을 추는것이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풀나풀 춤추는 18세 아이돌에게 그만 이 [유령]은 반해버리고 말았다.(그는 그 이전에는 아이돌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었다.)
그 뒤로 유령은 이 두 사람 사이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길원택도 모를 정도로.

 

"승아씨."

 

햇빛 좋은 날이었다. 두 사람은 길원택이 새로 짓기로 한 스튜디오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간만에 길원택의 신경이 풀어져 있었기 때문에 승아도 기분이 좋았다.

 

"네?"

 

"날씨도 좋은데 우리 뽀뽀나 할까?"

 

그건 농담이었다. 길원택이 자기랑 사귀면 이런 것도 알아야 된다면서 가르쳐준 농담.
우심뽀까.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대표님도 참..."

 

"그동안 내가 너무 심하게 했지? 연습량만 해도 지긋지긋했을거야. 그래 내가 미웠을 수도 있겠다. 정말 날 미워했지?"

 

"참...대표님도..."

 

"내가 왜 네 대표야?"

 

"그럼요?"

 

"내 이름 불러봐. 자, 원택씨~하고 불러봐."

 

"네?"

 

"우린 약혼한 사이야. 다른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자, 사귀고 있잖아. 연인 사이에 대표라고 부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원...택...씨..."

 

그 입에서는 원택의 이름이 아니라 중우의 이름이 나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승아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탓하면서-적어도 지금의 자리를 마련해 준것은 길대표였으니까. 연습생 시절도 거치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시켜 단독 아이돌로 세워줬으니.-억지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그렇게 싫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약간의 허영심도 있었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날 사랑하고 있어요. 우린 이대로 가면 완전히 성공할거에요. 그런 마음.

 

"아이고, 웃는 얼굴도 이쁘네, 그럼 기왕 말 나온 김에 반지도 하나 하자."

 

길원택의 진지한 반응에 승아는 다시 질겁하고 말았다.

 

"반지요?"

 

"왜 그렇게 놀라?"

 

[유령]은 숨을 죽였다. 알게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저 남자는 자신을 이용해서 얻을 걸 다 얻어낸 후, 그 다음에는 연인의 사랑까지 얻으려고 하고 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치받아올라왔다. 그런데 옆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령은 얼른 몸을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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