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는 서재의 작은 책상에 앉힌 후, 자신과 또 앞으로 내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을 소개했다.

"전 아까 전에 말씀드렸었고...음, 앞으로 왕자님과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을..."

그와 함께 누군가의 요란한 고함소리와 함께 두꺼운 서재 문에 쾅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이 누군가가 엿듣는다고 생각하고 문을 당겼다가 밀어버린 탓이었다.

"이게 무슨 짓..."

소리를 지르려는 상대방은 들어오다말고 내가 있는 걸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있어서 다문 게 아니라 다른 말을 하기 위해서 입을 다문 것 뿐이었다.

"저하! 앞으로 저하가 남기실 기록은 이 사관 우중간이 꼭 담아올리겠습니다!"

"엿듣는 것도 사관이 하는짓인가?"

"기록은 하늘이 내린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입니다! 특히나 어둠족이 끼인 일은요!!!!"

길창덕 신부는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이해하십시오. 저하. 저 사람이 본래 좀 흥분을 잘 합니다..."

"......"

"이 우중간이 꼭 천년이 넘는 기록을..."

"......"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졌다. 앞으로 이런 것들을 달고 유폐되어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사관."

"네! 저하!!!"

아드레날린이 얼마나 넘치는 지 대답하나하나가 고함지르는 것 같았다.

"혹시 그러면 내가 백작을 만났을 적의 기록이나 밤중에 어둠족의 딸을 만나러 간 것도 다 기록이 되어 있나?"

"물론입니다!!!"

"그건 스토킹이 아닌가?"

"역사앞에서는 스토킹 같은 건 없습니다! 하늘앞에 한점 부끄럼 없는 정정당당한 기록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알았어. 그럼 어머님께 이 모든 걸 고자질한 게 자네군."

"......"

"앞으로도 고자질할 테고 말이야?"

"...고...자...질이 아닙니다만..."

"......"

나는 그들을 쭉 둘러보았다. 앞으로 짧지 않을 유폐 생활동안 함께 있어야 할 사람들이며, 어둠족의 계약에 따라 내 영혼을 빼앗으려 하는 자들에게서 날 지키려는 자들이다.
그리고 거기에...

"저하."

열린 문 사이로 사뿐사뿐 그녀가 들어왔다.

"저도 저하와 함께 하게 해주세요..."

흑조, 그녀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좋아. 모두들 좋소...이 어리석은 자의 최후를 함께 해줘서 고맙소..."

나는 가까이 다가온 흑조의 뺨에 입을 맞추고 다시 모두를 둘러보았다.

"나도, 왕실전범에 맞추어 그들에게 대항하겠소. 어리석은 아무개에 불과하지만,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겠지...."

이것이  내가 듣고 기록한 왕자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앞으로 사관으로서 나의 의무는 왕자님이 영혼을 빼앗기시는 그 순간까지 어둠족들의 음모를 만천하에 알리고, 왕실의 안정을 위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 며칠을 계속 서재로 가서 먹은 것도 없이 왕실전범의 두툼한 쪽들을 넘겼다. 배고파서 위장이 다 뒤집어지는 느낌이었지만...원인을 알기 전에는 쓰러질 수도 없었고, 죽을 수도 없었다.
왕실전범의 그 페이지를 찾았을 때 나는 차라리 환호하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래되다 못해 바스락거리는 그 페이지에는...

"저하."

페이지를 읽으려는 순간, 서재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전기마저 끊어진 통에 어두운 그 방에서 순간적으로 쏟아진 빛때문에 나는 눈이 멀 정도로 아픔을 느꼈다.

"...누구, 누구냐."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싸쥐었지만 이내 문이 반쯤 닫겼고, 그래서 약간 부연 빛이 부드럽게 내 눈을 둘렀다.

"저하. 접니다..."

나의 젖동생, 나의 친구, 나의 아우...시종이 옆에 누군가를 데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넌 어머니와 가지 않았느냐?"

"...전 저하를 지켜야 하는 시종입니다. 어딜 가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 저하 곁에 있을 겁니다."

거짓말...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해도 좋다.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

그러자 그의 뒤에 있는 사람이 조용히 대답했다.

"저하...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 동네에 사는 신부, 길창덕이라고 합니다...왕실 전범에 따라 어둠족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저하께 배정되었습니다..."

"......"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 이전에, 나는 왕실전범의 놓친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왕실 친족들에게 내 이르노니...
  과거 고대시절부터 왕비족이라 일컫는 자들은 어둠의 힘을 빌려...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였나니...
  그리하여 과거로부터 패망한 이 땅의 나라들은...
  왕비족의 반발로 부터 그리 된 바...
  지상의 괴이한 변동은 왕비족이던 그들의 암약으로 인한 것이었기에...
  앞으로 어둠족들과 혼인할지라도...
  혹여 그들에게 마음 주지 말고, 계약도 하지 말지어다.
  또한 어둠족들을 정실로 삼더라도 그들 사이에 자식을 생산하지 말지니...
  후에 나라가 패망하여 이 왕실의 역사가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과 결코 계약하지 말지어다....
  그들과 무슨 안약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왕실에서 끊어지고... 그의 영혼은 어둠족에게 남을 것이라...   

   대한제국의 피를 이은 나 의환왕 이지석이 쓰노라...-

툭...
나는 왕실전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별궁에도 그렇게 많은 고문도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물론 난 왕자이므로 고문도구를 쓰진 않았지만, 심문내내 분위기는 살벌했다. 내가 왕자가 아니라 서자였더라면 엄청난 고문이 가해졌을 것이라는 건 짐작이 충분한 일이었다.

"왕자님. 언제부터 암흑족과 그런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겁니까."

고문관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가득 했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해야 맞는 건가?"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만...대대로 왕족들에게 내려온 불문율입니다. 왕자님은 모르십니까?"

"아무도 내게 들려준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군요. 대답을 정히 못하신다면 유형이 결정될 겁니다."

"날 보고 어쩌란 말인가. 암흑족이 대대로 혼인 가문이지 않았나...더더군다나 이번에 약혼이 거의 확정되다시피한 고니양의 양부도 암흑족이 아닌가?"

"...백작은 별개입니다. 그리고 그 암흑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하."

"그럼 뭔가?"

"그들은 사악한 적들 입니다. 저하. 왜 이 별궁으로 옮기면서 호신부를 다시라고 했겠습니까..."

"사악하다니."

"악마입니다. 사특한 것들이고 궤계를 꾸미는  세상의 멸망을 부르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저하를 이용하려고 할것입니다.  저하가 만나신 고니는 진짜 암흑족, 어둠보다 더 어두운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진심이오. 그녀와 혼인할 것이오."

약혼이 결정되었다! 내게 이제 여자는 그녀 한명뿐인 것이다!

"네 맘대로는 안된다."

어느새 어머니가 차분하지만 화려한 양장을 하시고 시장들을 거느리고 오셨다. 새빨간 양모가 인상적인 옷이었다.

"이미 맹세를 해버렸다면 어쩔 수 없긴 하지만...별 수 없다. 널 별궁에 유폐시키고 후계자는 양자를 들이겠다. 멍청한 아들때문에 왕가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머니!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왕족에게는 권리보다는 의무가 더 중요하다."

어머니는 머리위로 쓴 모자에서 붉은 베일을 드리우셨다.

"그동안 왕실전범을 제대로 읽지 않았던 네 무심함을 원망하거라."

"어머니!"

"고문관, 이 아이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게. 그리고 모든 방의 창문을 닫고, 환기구만 열어둔채로 별궁을 폐쇄시켜...공식적으로 이제 왕자는 죽은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한테 있어서 스테이크는 잘 살던 시대의 잔재물같은 거다.
아버지가 낭비벽이 심하신 때 가끔 연말쯤에 파크 호텔같은 곳으로 데려가셔서 스테이크나 호텔 짜장면, 탕수육을 세주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정통 양식을 시켜주려다가, 가격에 놀란 어머니가 짤짤 흔드는 통에 한 급수 낮추곤 하긴 했지만...
근데 막상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는 아버지 앞에서 스테이크가 질겨서 못 먹겠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어린애가 뭘 알겠는가? 고기는 좋아하니까 먹긴 먹는데, 기존 먹는 거하고 뭐가 다른지는 전혀 모르겠고.
아빠는 흐뭇한 얼굴로 많이 먹어, 많이 먹어.를 연발하시니...

그러다가 아이엠에프 직격탄을 맞고, 몇번 의도치 않게 잘리기도 하면서...아버지가 독해졌다.
갈아야 될 것이 있어서 사러 가면 절약 정신이 없다고 외치시니...
하여간 옛 추억을 잊지 못한(커피, 피자, 스테이크, 햄버거)내가 가끔 시내의 스테이크 집을 원정갔다 오면...(물론 어릴 때 추억으로만 간 것이지...스테이크의 진정한 맛을 알고 간 건 아니다...)홱 돌아보시면서 돈이 썩었다!를 외치시므로 

이럴 때는 같이 가는 게 낫다고...스테이끼 썰러 같이 가시지 않겠어요? 하고 여쭤보면 답은 흥!이다.
그러던 아버지가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하는 스테이크를 보고 나도 한번 해봐야지! 라고 하시더니 지금
2달 째 아침에 종류별로 스테이크가 올라오고 있다.
물론 매일 먹는 건 아니지만...
돼지 후지 스테이크, 돼지 전지 스테이크, 돼지 안심 스테이크, 소 안심 스테이크...
양념은 집에서 한 머루 소주술을 붓고 버터를 둘러 촉촉하고 담백하고, 적당히 짭짤하다.
소믈리에로서도 능력 있으셔서 초정 탄산수를 가져다가 머루 액기스에 적당량 부어 탄산음료 만드는데도 심혈을 기울이신다.
   
남자들이 요리하는 시대가 와서 그런가, 스테이크를 요리하게 되신 이유가 모 프로그램에서 스테이크 만드는 걸 보여줘서 그렇다나...
평소에 요리하는 실력이 나보다 나으셔서, 젊으실 적에 차라리 요리를 하시지 그러셨어요...했더니 하시는 말씀.

"남자가 어떻게 물에 손을 담그겠니..."

이것이 아버지가 사시던 시대와 요즘 남자들이 사는 시대가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하긴 요즘도 남성 요리교실에 신청하는 사람은 얼마 없긴 하더라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비프 스테이크 타령을 무라카미 라디오 하이요~로 보면서 생각난 이야기다...
하긴 나도 나중에 하루키같은 대작가가 되거나 그만한 나이가 되면 아버지의 포크 스테이크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내 기억에서 아버지의 스테이크는 추억이 되기에는 계속 현재형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검은새는 부드럽게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나는 오늘 새벽의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입술을 고니의 입술로 착각하고 말았다.

"백조...아직 시간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한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녀가 물러났다.   
 그제서야 나는 흑조가 그랬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저기..."

"절 그 애의 대용품으로 생각하시는건가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아니...그게 아니라..."

"당신은 얼마 전에 제게 그 애보다 절 더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죠."

"사실이오."

진실은 진심이다. 백조보다 먼저 사랑하게 된 것이 그녀이니까.

"프랑스 사람의 진실을 듣고 분노하신 것도 사실이었고..."

"물론이지."

거짓말이었지만.
우리 둘다.

"그런데 어째서 절 그 애로 착각하실만큼 그 애를 사랑하게되셨나요...전 그애를 질투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다만?"

"당신이 상처받으실까봐 걱정될 뿐이에요. 그리고 전 어차피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처음에는  그저 샤프론으로만 있으려고 했어요...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당신은 벗어나지 못하는 수렁에 빠지게 되시는 거죠...전 절대로 그건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요..."

그녀의 성격으로보면 그건 사실인 듯 싶었다.
아무리 친딸이라고는 하지만 화류계에 떠돌던 여성이 양녀로 들어온 품위있는 여성에게 싸늘한 어조로 질타까지 할 수 있을 정도라면...
내가 알기로 그녀는 절대로 빈말은 하지 못한다. 그것이 사랑일 경우에 한해서.....

"나는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함정에 빠지신 거에요."

누구라는 말은 생략되었다.

"그렇다면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녀의 말을 슬쩍 비틀어서 말했다.

"당신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말이군?"

"...당신의 심장에 대고 물어보세요."

그녀가 예전에 구 로마 가도에서 했던 말을 다시 말했다.

"절 향해서 뛰던 심장박동이 이제 제게 들리지 않아요."

"...누구의 음모인지 말하지 않는군요. 당신은 내게 함정이라고 말했는데..."

"...아직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오랫동안의 직감이 제게 말해요...이건 음모다. 당신을 해치기 위한 음모라고요."

"그만하시오!"

나는 햇빛속에서 뚜렷하게 윤곽을 드러낸 그녀의 아름다운 귓불을 바라보았다. 귓불끝에 마치 붓끝으로 찍어낸 것 같은 검은 점...
귀걸이 점이라고도 부르면서 나는 얼마나 수많은 입맞춤을 그 점에 보내었던가...
하지만 나는 오늘 새벽, 그 입맞춤을 신성한 약속의 입맞춤을 수 많은 백조들에게 둘러싸여 했다.
검은새에게 한 것이 육체의 입맞춤이라면 백조에게 한 입맞춤은 고대의 시대에 대한 내 경의의 표현이었다.

"뭐가 음모란 말이오. 난 왕이 될 남자.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이 날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법...그대의 말은 내게 맞지 않소. 도리에 맞지 않는단 말이오. 백작 영애!"


그제서야 그녀는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 했다. 흑자는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전하. 전 당신을 위해서.."

"......"

내가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문이 열리면서 시장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왕자님!"

"무슨 일들인...?아니?"

그.들은 내 양손을 꽁꽁 묶었다. 

"죄송합나다. 저하. 워낙 국법이 엄하여 여왕님이 어쩌실 수 없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