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 메릴랜드 숲에서 만난 열두 달 식물 이야기
신혜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물학도였었고 가장 재미있었던 과목이 식물학, 동물학이었고,
지금은 약간 초록손재질의 식집사이기도 해서
식물학에 관련된 책에 꽤 관심이 많다.
점묘로 몇 시간을 그리던 식물 그림들의 추억도 있고 식물 삽화는 언제나 즐기기도 하기에 표지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으로 고른 책이다.

미국 메릴랜드의 스미스소니언 환경연구센터의 연구원으로 지낸 기간 동안의 소회를 다룬 에세이.
챕터는 계절별로 구성되어 있고, 저자는 난을 연구하고 있는데.
모든 식물은 야생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는 부분이 많았다.
너무 당연한데, 실내에서 식물을 키우는 환경에 익숙해진 탓에 이런 자각이 생길 때마다 좀 웃기기도 하고...

그러나 책 전체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냐 묻는다면... 글쎄다. 싶은 정도의 감상이 남았다.

- 야생 난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발되는 품종과 사람들의 열렬한 난초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꽃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 45

- 목초지에 있던 커다란 말이 한순간 죽듯, 오랫동안 내게 기쁨을 선사하던 난초가 사슴에게 먹혀버리듯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은 갑자기 발생한다. 하는 게 아니라 일어나버리는 것. 행복하다가도 갑자기 슬픈 일이 일어나는 것. 슬프다가도 갑자기 기쁜 일이 일어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예측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자연의 순리이고 이미 정해진 일이었던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흐름 속을 열심히 헤엄치는 듯하지만 사실 함께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167

2025. apr.

#식물학자의숲속일기 #신혜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득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한 동경과 불안을 자주 하고 있는 나를 돌아본다.
지나간 일의 후회나 미련이 아닌 전혀 상관없는 세계에 존재했을지 모를 나를 생각하는 일. 아니 그러나 딱히 동경이랄 수는 없는 건 그 삶이 딱히 좋아 보이는 것도 아니라는 점..?
단 한 번 주어진 삶에 좀 맥이 빠져 있는 요즘이라서인지 에세이를 읽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상념에 빠지게 된다.

신간을 꼭 읽는 작가라 오랜만의 산문이 반가웠다. 

- 소설이나 게임이 제공하는 매력적인 대안적 삶들에도 불구하고 진짜 인생이 일회용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문득문득 엄습하는 불쾌는, 외면하며 살아온 타세 더 지독하고, 부당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 10

- 내가 좋아하는 언어는 문학의 언어였다. 그 언어는 모호하다. 이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저것을 말하고, 저것을 말하면서 이것을 말한다. 때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언어이며, 사람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된다. 회계가 그랬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다. 그런데 문학은 그래도 된다. 그래서 좋았다. - 48

-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중

2025.

#단한번의삶 #김영하 #에세이 #복복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등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2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울한 전망뿐인 미래의 어느 시절.
파괴된 환경 때문에 새로운 세대들의 면역이 무너지고, 오히려 노년의 세대들이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설정.

할아버지와 증손자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상황인데,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희망은 놓치고 있지 않아 우울감이 지배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기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
그리고 일단 이 디스토피아의 진짜 비극은 방사능 오염, 인간 생체시계의 혼돈이 전면에 있지만,
사실 정부의 민영화, 정보의 폐쇄성에서 두드러진다.
믿을 수 있는 정보의 부재로 지역사회의 관계 속에서 눈치껏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이 미래의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만든다.
연령대의 역할이 반전되면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무너지고 나니, 애잔한 어린 세대들은 오히려 철이 들게 되는 걸까.
그들의 죽음이 대수롭지 않게 된 비극의 세상이지만 그다지 살풍경하게 그려지지 않는 것은 작가의 긍정이 반영된 것일지 모르겠다.

가치가 역전된 오키나와. 이야기 밖 현실의 오키나와는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가진 지역인데,
디스토피아가 된 세상에서는 선망하는 지역이 된 것이 흥미롭기도 하다.
<빨리 달려 끝없이>의 언어유희는, 일본어 사용자가 아니므로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점이 있어 흥미가 떨어지지만,
<피안>에 등장하는 극우 정치인의 묘사는 남의 얘기가 아니구나 싶은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 요시로는 무메이의 장래에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발밑에 있는 현재라는 시간이 무너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 36, 헌등사

- 물론 아픔을 느끼지만 요시로가 아는, "왜 나만 이리 괴로워야 하지."같은 우는소리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고통이었다. 그것이 무메이 세대가 부여받은 보물일지도 몰랐다. 무메이는 스스로 불쌍하다고 여기는 기분을 모른다. - 41, 헌등사

- "왜 증조할아버지는 마시지 않아요?" 하고 무메이가 물어서 "한 개밖에 사지 못했다. 어린이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하니 뭐든지 어린이 우선 아니겠느냐."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어른은 어린이가 죽어도 살 수 있는데, 어른이 죽으면 아이는 못 살아요." 하고 노래하듯이 무메이가 말하자 요시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이 죽은 뒤에 무메이가 살아갈 시간을 상상하면 늘 벽에 부딪친다. 자기가 죽은 뒤의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을 수 없는 몸을 부여받은 우리 노인들은 증손자를 앞세워야 하는 무서운 운명을 짊어졌다.
어쩌면 무메이 같은 이들이 새 문명을 지어서 후세에 남겨줄지도 모른다. 무메이는 태어날 때부터 기묘한 지혜를 가진 듯 보였다. 지금까지 보아 온 어린이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지혜다. - 44, 헌등사

- 호모 사피엔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은 편이 낫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 확실히 인간은 지구에게 암세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라. 그래도 인간이 그립다.
두 발의 독재가 끝나서 모두 숨을 돌렸는데. 과거를 미화할 작정이야? 동물 윤리는 어디로 갔어?
윤리도 인간, 즉 독재자가 생각해 낸 거야. 포유류의 감정은 윤리로 관리할 수 없어. - 209, 동물들의 바벨

2025. mar.

#다와다요코 #헌등사
#민음사세계문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 여름, 완주 듣는 소설 1
김금희 지음 / 무제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시의 냉혹함에 심신이 지친 주인공 손열매.
이런저런 사연으로 찾아간 완주에서 힐링한다...는 좀 뻔한 스토리랄 수도 있지만, 그 안에 속 시끄러운 사연들의 이야기가 있다.

완주의 주민들이 겪는 사건들은 그다지 유쾌할 것 없는 종류의 것이고, 닳고 닳은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삶이, 일상이 치러지는 과정은 '시간이 흐른다'라는 말을 그대로 그려내는 듯.

수미를 찾아 도달한 완주에서 그 목적을 잊은 채 한 계절을 완주하는 열매의 이야기는,
죽음과 생의 교차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 세상의 이야기다.
해피, 새드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엔딩'이라는 사실.
그 모든 이야기 속에 작가의 다정함이 그득해서 읽는 내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김금희 작가, 거부할 수없이 좋은 작가. 이런 편애의 기분을 또 한 번 느낀다.

출판사 무제의 Rec. 시리즈는 앞으로도 무척 기대가 된다.
오디오 북도 들어보고 싶은데 윌라?인지 사용을 안 하니.. 조금 귀찮네. 큐알코드라도 링크했으면 좋았겠다.
여러 배우들의 참여가 궁금하다.

- 그런데 이상하지. 서울로 오고 나서는 여름이랑 비를 기다린다. 비가 처마에서 떨어질 때, 우드드 우드드 우산을 뜯듯이 빗방울이 쏟아질 때, 그럴 때 나는 겨우 숨을 쉬어. 여기도 별다른 곳이 아니구나, 여기도 비 오는 곳이구나, 여기도 별 수 없구나 생각하는 거지.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안도감인지 다른 사람들은 알까? - 29

- 그 말을 들은 손열매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열매도 태풍으로 집 벽이 날아가 버린 동화 속 돼지 삼 형제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한동안 요양 병원에서 지내느라 자주 만날 수 없었는데도 '어딘가에' 할아버지가 있는 것과 '어디를 가도' 없는 것은 너무 달랐다. 항상 허전했다. - 57

- 진실은 누가 판단 내리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역시 흑담즙 철학자답네. 그럼요?
그냥 그 순간 경험하는 거지. - 151

- 이런 말 무력하게 느껴져서 그렇지만 힘내시기 바라겠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몫을 또 완주해야 하니까요. - 169

- 거짓 없는 사실, 완전한 올바름, 그것은 때로 삶을 수렴하기에 너무 옹색하다. 그보다는 더 수용적이고 오래고 성긴 것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우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서로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 여름의 방문 같은 것. - 작가의 말 중

2025. may.

#첫여름완주 #김금희 #듣는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반까지만 해도 정돈되지 않은 일기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여러 시점의 여러 인물들의 삶의 편린들이 무척 흥미롭다.
루시아 벌린의 단편을 읽으면서 자꾸 떠오르는 작가가 레이먼드 카버였다는 건... 나만 느낀 지점은 아닌 게 역자 후기에도 등장한다.
아무래도 뉴트럴 한 건조한 느낌의 묘사와 술과 관련된 것. 그런 지점에서 유사점이 느껴졌던 것 같고.
루시아 벌린이라는 사람을 여러 캐릭터로 분열시켜 인생을 묘사한다고 느꼈다.

경제적인 정상 범주에서 가까스로 벗어나지 않은 이들, 약물이나 알코올에 무심하게 노출되어 있는 이들의 언제 무너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삶들이 조금은 아득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중독의 문제에 심각하게 절여져 있다는 점이 이 엄청난 분량의 단편들을 읽는데 피로감을 준다.

그럼에도 따스하고 찬란한 순간들이 존재하고, 세상의 뜻대로 휩쓸리지 않겠다는 의지도 느껴지고... 뭐 그랬다.

가난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되는 게 보편이 된 것이 불과 반세기 전쯤 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생활환경에 심각하게 두려운 감정이 생겨난 것, 아무래도 그게 현대 시민의 모든 고민의 시작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인상적이던 단편은 <애도>였는데,
유족과 죽은 이의 공간에서 살림을 정리하고 고인을 유추해 보고, 추억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따지고 보면,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유품들 속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 때문에 더 감정적으로 와닿았던 것 같고.
묘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 잠깐, 내가 해명할게요......
나는 평생 이런 말을 하는 상황에 처했다. - 별과 성인, 32

- 언덕 정상에 오른 나는 휠체어에 브레이크를 걸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불쾌한 웃음이었다.
"사는 게 끔찍하죠, 아버지?"
"암, 그렇다마다."
아버지가 브레이크를 풀었다. 휠체어가 벽돌 길을 따라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그냥 바라보며 주저했다. 그러나 곧 담배를 던져버리고 본격적으로 굴러내려가려던 휠체어를 얼른 붙잡았다. - 환상 통증, 109

- 두려움과 가난, 알코올중독, 외로움은 모두 불치병이다. 사실 위급한 상황들이다. - 응급실 비망록, 146

- 그녀는 혁명을 하고 모든 걸 공유할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야 한다고 했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여기에 살고 있다는 걸 바깥세상의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어. 우리는 저들에게 세상이 곧 바뀔 거라고 말해주지. 희망. 그건 희망의 문제야." - 선과 악, 198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죽음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죽음은 치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죽음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외롭게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 애도, 363

- 별이 빛나는 밤, 흰 눈이 매우 환했는데. 집에 오면 아빠는 엄마가 잠들 때까지 책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지. 정말 좋은 이야기일 때는 엄마가 울 때도 있었어. 슬퍼서가 아니라 이야기는 너무 아름다운데, 그 외의 세상 모든 것이 저속해서ㅓ 그랬던 거지. - 돌로레스 공동묘지, 372

- 누군가 죽으면 시간이 멈춘다. 물론 죽은 자에게는 그렇다, 어쩌면. 하지만 애도하는 자에게는 시간이 행패를 부린다. 죽음은 너무 빨리 찾아온다. 계절을 잊고, 해가 길어지고 짧아지는 것을 잊고, 달을 잊는다. 죽음은 달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거나 전철을 타고 있거나 자식들에게 저녁상을 차려주고 있지 않고 수술 대기실에서 <피플>을 읽고 있다. 아니면 밤새도록 발코니에 나가 담배를 피우며 몸을 떤다. 책상 위에 지구본이 있는 어린 시절의 침실에 앉아 허공을 응시한다. 페르시아, 벨기에령 콩고. 죽음을 겪고 난 뒤의 안 좋은 점은 우리가 일상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 그 모든 일과와 그날 그날의 특색이 무의미한 거짓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우리를 진정시키고 달래서, 평온하고 무정한 시간 속으로 우리를 다시 들이는 속임수인 것이다. - 잠깐만, 574

- 까다로운 소재를 다루는 문제에 관해서 벌린은 이렇게 말한다. "어쩌다 보면 현실을 극히 미세하게 변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변환이지 진실의 왜곡이 아니다. 이야기 자체는 작가는 물론 독자에게도 진실이 된다. 어떤 훌륭한 글에서든 감동의 원천은 어떤 상황을 식별하는 데 있지 않고 진실을 알아보는 데 있다."
진실의 왜곡이 아닌 변환.

2025. may.

#루시아벌린 #청소부매뉴얼 #단편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