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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초반까지만 해도 정돈되지 않은 일기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여러 시점의 여러 인물들의 삶의 편린들이 무척 흥미롭다.
루시아 벌린의 단편을 읽으면서 자꾸 떠오르는 작가가 레이먼드 카버였다는 건... 나만 느낀 지점은 아닌 게 역자 후기에도 등장한다.
아무래도 뉴트럴 한 건조한 느낌의 묘사와 술과 관련된 것. 그런 지점에서 유사점이 느껴졌던 것 같고.
루시아 벌린이라는 사람을 여러 캐릭터로 분열시켜 인생을 묘사한다고 느꼈다.
경제적인 정상 범주에서 가까스로 벗어나지 않은 이들, 약물이나 알코올에 무심하게 노출되어 있는 이들의 언제 무너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삶들이 조금은 아득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중독의 문제에 심각하게 절여져 있다는 점이 이 엄청난 분량의 단편들을 읽는데 피로감을 준다.
그럼에도 따스하고 찬란한 순간들이 존재하고, 세상의 뜻대로 휩쓸리지 않겠다는 의지도 느껴지고... 뭐 그랬다.
가난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되는 게 보편이 된 것이 불과 반세기 전쯤 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생활환경에 심각하게 두려운 감정이 생겨난 것, 아무래도 그게 현대 시민의 모든 고민의 시작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인상적이던 단편은 <애도>였는데,
유족과 죽은 이의 공간에서 살림을 정리하고 고인을 유추해 보고, 추억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따지고 보면,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유품들 속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 때문에 더 감정적으로 와닿았던 것 같고.
묘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 잠깐, 내가 해명할게요......
나는 평생 이런 말을 하는 상황에 처했다. - 별과 성인, 32
- 언덕 정상에 오른 나는 휠체어에 브레이크를 걸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불쾌한 웃음이었다.
"사는 게 끔찍하죠, 아버지?"
"암, 그렇다마다."
아버지가 브레이크를 풀었다. 휠체어가 벽돌 길을 따라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그냥 바라보며 주저했다. 그러나 곧 담배를 던져버리고 본격적으로 굴러내려가려던 휠체어를 얼른 붙잡았다. - 환상 통증, 109
- 두려움과 가난, 알코올중독, 외로움은 모두 불치병이다. 사실 위급한 상황들이다. - 응급실 비망록, 146
- 그녀는 혁명을 하고 모든 걸 공유할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야 한다고 했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여기에 살고 있다는 걸 바깥세상의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어. 우리는 저들에게 세상이 곧 바뀔 거라고 말해주지. 희망. 그건 희망의 문제야." - 선과 악, 198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죽음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죽음은 치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죽음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외롭게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 애도, 363
- 별이 빛나는 밤, 흰 눈이 매우 환했는데. 집에 오면 아빠는 엄마가 잠들 때까지 책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지. 정말 좋은 이야기일 때는 엄마가 울 때도 있었어. 슬퍼서가 아니라 이야기는 너무 아름다운데, 그 외의 세상 모든 것이 저속해서ㅓ 그랬던 거지. - 돌로레스 공동묘지, 372
- 누군가 죽으면 시간이 멈춘다. 물론 죽은 자에게는 그렇다, 어쩌면. 하지만 애도하는 자에게는 시간이 행패를 부린다. 죽음은 너무 빨리 찾아온다. 계절을 잊고, 해가 길어지고 짧아지는 것을 잊고, 달을 잊는다. 죽음은 달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거나 전철을 타고 있거나 자식들에게 저녁상을 차려주고 있지 않고 수술 대기실에서 <피플>을 읽고 있다. 아니면 밤새도록 발코니에 나가 담배를 피우며 몸을 떤다. 책상 위에 지구본이 있는 어린 시절의 침실에 앉아 허공을 응시한다. 페르시아, 벨기에령 콩고. 죽음을 겪고 난 뒤의 안 좋은 점은 우리가 일상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 그 모든 일과와 그날 그날의 특색이 무의미한 거짓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우리를 진정시키고 달래서, 평온하고 무정한 시간 속으로 우리를 다시 들이는 속임수인 것이다. - 잠깐만, 574
- 까다로운 소재를 다루는 문제에 관해서 벌린은 이렇게 말한다. "어쩌다 보면 현실을 극히 미세하게 변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변환이지 진실의 왜곡이 아니다. 이야기 자체는 작가는 물론 독자에게도 진실이 된다. 어떤 훌륭한 글에서든 감동의 원천은 어떤 상황을 식별하는 데 있지 않고 진실을 알아보는 데 있다."
진실의 왜곡이 아닌 변환.
2025. 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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