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시인선 397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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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서평 선량하지 않으나 서정적인 시라는 말이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일까.

이전에 읽은 슬픔없는 십오 초 역시 서정성이 가득했지만, 왠지 무력한 채 울분을 토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분노와 무력감이 선량하지 않음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다는 동의를 하게 된다.

시를 열심히? 읽은 지 이제 몇년 안되지만

좋아하는 시인으로 주저없이 꼽을 시인.

2015. Nov.

시여, 너는 내게 단 한 번 물었는데
나는 네게 영원히 답하고 있구나 - 시인의 말 중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 인중을 긁적거리며 중

나의 오랜 벗들이여,
하지만 나는 오늘 밤 지상에서 가장 과묵한 단어.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들에게서 잠시 멀어지고 싶구나. - 나의 친애하는 단어들에게 중

수수께끼로 남은 과거가 필요하다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모든 것이 이해되는
단 한 순간이 필요하다
그 한 순간 드넓은 허무와 접한
생각의 기나긴 연안이 필요하다 - 필요한 것들 중

그는 내게 말하는 듯했다.
시인이여, 노래해달라.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나의 머지않은 죽음이 아니라
누구도 모르는 나의 일생에 대해.
나의 슬픈 사랑과 아픈 좌절에 대해.
그러나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에 대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생존하여 바로 오늘
쪽동백나무 아래에서 당신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음에 대해.
나는 너무 많은 기억들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선율도 흐르지 않는가.
창가에 서 있는 시인이여,
나에 대해 노래해달라. 나의 지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강점을 지녔노라고 제발 노래해달라. - 사랑은 나의 약점 중

우리는 아주 커다란 행성의 아주 작은 노예들
실패할 수 없는 것들을 실패하고
반복될 수 없는 것들을 반복한다 - 시초 중

오늘 그곳에 아무것도 없음이 우리를 경악하게 하네
......
하지만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있기만 하지는 않겠네
우리는 그 위에 일어서서 말하겠네
이제 인간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하나 불붙은 망루가 되었다
생존의 가파른 꼭대기에 매달려
쓰레기와 잿더미 사이에 흔들리며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단 말이다!
절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고
-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 2011년 1월 20일 용산 참사 2주기에 부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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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11-09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지어 잘생긴 훈남이십니다 ^^
 
나의 사적인 도시 - 뉴욕 걸어본다 3
박상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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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부터 2010년 까지의 뉴욕에서의 이야기들.

묘한 감정이 드는 에세이.

2005년 부터 2010년 까지는 개인적으로 그야말로 미술에 푹 빠져 살던 시기여서,

그 기간의 작가의 이야기가 조금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

그 시절은 온갖 미술서와 전시와 작업에 내 모든 생활을 투자하고

앞으로 계속 이 일들을 해나간다는데 한치의 의심도 없던 그런 때였다.

그러나 본디 삶이란 언제나 예측불가하고 의외의 사건과 사고가 빈번하며

의도치 않은 방향전환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나.

대중서와 전문 서적은 물론 논문집까지 출간되는 모든 미술서는 가슴 설레는 기분으로 사들이던 때가

나에게 있었던가 싶게 요즘은 미술관련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독서의 행위 조차 이미 돌아나와 버린 곳에 대한 미련같이 보여서 그랬던걸까.

어쨌거나 매우 환기가 되었다.

그 환기라는 것이 심란함을 동반한 것은 아주 작은 고충에 불과하다 여길만큼.


2015. Nov.

뭘 확인한다고 액자 뒷면을 보다가 그만 잘못하여 캐비닛 위에 놓여 있던 꽃병과 촛대를 깨뜨렸다. 디재스터였다. 내 잘못이었는데도 작가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꼬, 나는 현기증이 났다. 작가가 서둘러 떠났다. 사기 꽃병과 촛대가 완창 깨진 모습이 거의 충격적이었따. 무너가 아깝다는 생각에 사진기를 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진을 찍고 나니 평정심이 되찾아졌다. 재앙과 나 사이에 사진기라는 제3의 눈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리라. -p. 27

물리학 논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시 여기면서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왜 인정하기가 어려울까? -p. 41

스스로 뭔가 다른 것으로 진화할 수 있는 동력을 품는 내적인 복잡성complexity이 필요하다. -p. 134

아트리뷰에서 발견한 프란시스 알리스의 글이다.
태도에 관하여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떤 특정한 작품이나 사람이 내 작업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일은 없는 것 같다. 만약 있다면 그건 많은 사람들과 많은 작품들을 접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태도들`이 있다. 즉,
말하기, 쉬기, 걷기, 요리하기, 놀기, 책 읽기, 실수하기, 신뢰하기, 듣기, 두려워하기, 교환하기, 잃어버리기, 믿기, 실패하기, 기다리기, 노력하기, 번역하기, 거리두기, 변형시키기 그리고, 잠 안 자기, 용납하지 않기, 이해하지 않기, 닫지 않기, 계획하지 않기, 기억하지 않기, 알지 않기not knowing. -p. 140

사람들에게 난 곧잘 "센트럴파크 다녀오셨어요?" 라고 포괄적으로 질문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답은 좀더 구체적인 것이다. 100만 평이 넘는 이 공원에 발만 살짝 들여놓고는 시큰둥하게 "물론 다녀왔죠"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초록으로 펼쳐진 십 메도 잔디 위로 겹쳐지는 스카이라인을 감상하며 피크닉을 했다든가, 회전목마 위에서 어느 오후를 즐겼다든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에서 조깅을 했다든가 정도면 구체적이라 할 만하다. 여행은 눈도장만 찍고 가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환경에서 잠깐, 그러나 강렬하게 살아보는 것이다. -p.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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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5-11-09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란시스 알리스의 글이 여기 나오는 거였군요. 오래 찾았는데 ^^ 책 읽어봐야겠어요.

hellas 2015-11-09 13:11   좋아요 0 | URL
:)
 
폐허를 인양하다 창비시선 391
백무산 지음 / 창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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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기회주의자로 만들고 싶지 않은 시인의 시는 어찌나 직선인지.

백무산이라는 이름마저 너무나 시인답다.


2015. Nov.

그 풍경이 내게 스며들자
나는 드러난다
내가 폐허라는 사실이 - 패닉 중

시가 무모해지더라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의 요구에 현실이 선택되거나, 시의 행위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라면, 시가 오히려 삶을 소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를 기회주의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 시인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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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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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적으로 시작해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야기.

그럼에도 따뜻하고 아련한 이야기.

메타포가 뭔지도 모르던 청년 마리오가 시를 만나고, 사랑을 만나고, 자신의 시를 갖게 되는 성장기로만 끝났다면

이렇게 깊숙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찬란한 삶 속에서 어느날 갑자기 끌어내려지는 암울함이 주는 여운이 확실히 있다.

전에 파블로 네루다의 시들을 읽었을 때는, 음.. 좋은 시네.. 정도의 감상을 가졌다면

이 소설을 본 후 다시 시를 읽는다면 무척 친밀하고 조금 더 깊은 감성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몇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이야기.:)

2015. Nov.

어머니는 일어나서 가슴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단두대 칼날 모양을 만들었다.
"더 이상 말할 것 없어. 우리는 아주 위험한 상황과 맞닥뜨렸어. 처음에 말로 집적대는 남자들은 다들 나중에 손으로 한술 더 뜨는 법이야."
"몇 마디 말이 해로울 게 뭐예요!"
베아트리스가 베개를 얼싸안으며 말했다.
"번드르르한 말처럼 사악한 마약은 없어. 촌구석 술집년을 베네치아 공주처럼 느끼게 만들지. 그리고 나중에 진실의 순간이 오면, 즉 현실로 되돌아오면 말이란 부도수표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 네 미소가 나비보다 더 높이 난다는 말보다 술주정꾼이 주점에서 네 엉덩짝을 치근덕거리는게 천만번 낫지."
베아트리스가 펄쩍 뛰었다.
"나비처럼 `번진다`고 했어요."
"난다고 하든 번진다고 하든 그게 그거야. 왠지 알아? 말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야. 허공에서 사라지는 불꽃 놀이일 뿐이라고."
"마리오가 해준 말은 허공에서 사라지지 않았어요. 저는 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할 때도 그 생각을 할 거예요." -p.63

정확히 백 년 전, 가련하지만 찬란한 시인, 처절하게 절망하던 한 시인이 이런 예언을 썼습니다.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
저는 예지자 랭보의 이 예언을 믿습니다. 저는 지리적으로 철저히 격리된 나라의 알려지지 않은 한 지방 출신입니다. 가장 버림 받은 시인이었고, 저의 시는 지방적이고 고통스럽고 비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희망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도달했습니다. 시와 깃발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미래는 랭보의 말대로라는 것을 노동자, 시인, 그리고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불타는 인내를 지녀야만 빛과 정의와 존엄성이 충만한 찬란한 도시를 정복할 것입니다.
이처럼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p. 131

마리오는 쪽지를 몇 센티미터 앞에 고정시켰다. 마치 독서대 위에 쪽지를 놓은 듯했다. 그러고는 예의 한 자씩 읽는 방식으로 읽어갔다. "친-애-하-는 마-리-오, 마-침-표, 가-운-데 단-추-를 눌-러-봐-라"
과부가 하품하는 척하며 말했다.
"내가 편지 읽는 것보다 자네가 쪽지 읽는 게 더 오래 걸리는군."
"장모님은 글을 읽는 게 아니라 삼켜버리잖아요. 글이란 음미해야 하는 거예요. 입 안에서 스르르 녹게 해야죠." -p. 106

네루다가 마리오를 길 쪽으로 슬며시 떠밀었을 때, 마리오의 뽀송뽀송한 턱수염이 화석처럼 굳어졌다. 마리오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말했다.
"시인 동무, 당신이 저를 이 소동에 빠뜨렸으니 책임지고 저를 구해 주세요. 당신이 제게 시집을 선물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
"천만에! 시집 두어 권 선물했다고 내 시를 표절하라고 허락해 준 줄 알아. 게다가 자네는 내가 마틸데를 위해 쓴 시를 베아트리스에게 선사했어."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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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8-14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말이란 부도수표일 뿐에 확 꽂혔습니다. 이거 간만에 질러야겠는걸요.

hellas 2016-08-14 10:55   좋아요 1 | URL
되게 아름다운 이야기라서 뱃속이 몽그르르? 해집니다:)
 

이제 밤샘은 못하겠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리터럴리 몸이 아픔.

평소랑 비슷한 힐을 신고 다녔는데 막 관절이 쑤시고;ㅅ;

졸음 운전은 아니지만 영혼리스 운전.

주차장에서도 바로 못내리고 멍... 하다

찬 바람을 쐬려고 차문을 열었는데

열린 차 문에 까치가 날아와 앉음. ;;;;

아이컨택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손만 뻗으면 만질수 있는 거리...

그러나 영혼이 없던 나는 그냥 멀뚱멀뚱.

마침 손에 핸드폰도 들고 있어서 터치 두번이면 초초초초초초근접 까치(나이 미상, 특징 잘생김, 몸길이 약 28cm)촬영이 가능했는데......

아쉽다....

주문한 음반 배송은 언제오나

그냥 오프매장에서 한장 사올껄. 집용 차량용으로 나눠듣게....

어쨌든 바람이 많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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