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평점 :
어쩜.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들만 빼곡하게 모아놓았는지!.
좋아하는 작가 중에서도 느낌이 사월의 호수 같은 작가들만 모아 놓았다.
(어쩌면 12월 초의 호수 같기도 하다.)
한강, 김애란, 권여선, 손보미, 조해진, 황정은...
다른 작가의 작품들도 물론 좋았지만..:)
동료의 죽음, 이모의 죽음, 아이의 죽음, 고모의 죽음, 연인의 죽음, 실패한 죽음의 시도.
으로 요약하자면 할수도 있을 죽음의 이야기.
아무래도 작가들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가 이런 소재에 천착하게 한것이 아닐지.
언제나 좋은 작가들:)
그때 선배님이 접시를 사주셨어요.
화제를 돌리려고 나는 밝게 말했다.
축의금 대신에요. 인사동 통인가게 거였는데, 두 개 한 벌짜리 분청사기 접시였어요.
내가 그랬나?
미소를 지어야 할지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되물었다.
하나는 이사 다니면서 깨졌는데, 나머지 하나는 그대로 있어요.
나는 접시가 있는 부엌 쪽을 가리켰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가리킨 쪽의 어둠을 향해 그가 얼굴을 돌렸다.
결혼식에서 축의금을 내는 게 늘 싫긴 했어. 너무 편리한 방법이잖아.
그가 또박또박 발음하며 다시 집게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어올리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죽은 뒤에도 그리 변하진 않는 거로구나, 나는 생각했다. - 한강,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중 p. 12
이렇게 오래 살아가는 것들 아래 있으면 더 그런 생각이 들어. 우리가 해치지만 않으면, 어쩌다 불이 나거나 벼락만 맞지 않으면 수 백 년도 살 수 있는 것들 아래에서, 이렇게 짧게 꼬물꼬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다음 달, 다음 해, 아니, 오 분 뒤 일조차 우린 알지 못하잖아. 그렇게 시간에 갇혀서 서로 찌르고 찔리면서 꿈틀거리잖아.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 어딘가 있다 해도, 그가 우릴 사랑할 것 같지 않아. 우리가 상처 난 벌레를 보듯 혐오하지 않을까? 무관심하지 않을까? 기껏해야 동정하지 않을까? - 한강,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중 p. 39
...... 내가 기억하기로 k씨는 언제나 평화스러운 사람이었는데.
나는 되물었다.
제가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람이었어.
나는 반박하고 싶었다.
그땐 제가 지금보다 말이 없었으니까, 단지 조용하니까 그렇게 보였던 것 아닐까요?
그런가. 하지만 지금도 k씨는 평화로워 보여.
아니요, 불가능해요. 이 세상에서 평화로워진다는 건.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 죽고.
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뒤척이고 악몽을 꾸고.
내가 입을 다물었는데 누가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이를 악물고 억울하다고, 억울하다고 말하고.
간절하다고, 간절하다고 말하고.
누군가가 어두운 도로에 던져져 피흘리고.
누군가가 넋이 되어서 소리 없이 문을 밀고 들어오고.
누군가의 몸이 무너지고. 말이 으스러지고. 비탄의 얼굴이 뭉개어지고. - 한강,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중 p. 46
어머니는 밥을 먹고 있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밥이 가득한 입속으로 어머니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이 복잡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 정소현, 어제의 일들 중 p.356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이해한다는 말은 복잡한 맥락을 무시한 채 편리하고도 단순하게 그것을, 혹은 너를 바라보고 있다는 무신경한 자백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나 역시 남들처럼 습관적으로 아니면 다른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그 말을 할 때가 있었고 그러고 나면 낭패해 고개를 숙이곤 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는 나중에 좋지 않은 심보로 그 말을 되새겼다. 그러던 그 밤에 그가 내 등을 두드리며 너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놀랐고 그 말에 고리를 걸듯 매달렸다. 이 사람이 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저 날의 나를 내가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할 수 있으려면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 내가 이제 무엇이 되는 게 좋을까.
단순해지자.
가급적 단순한 것이 되자고 나는 생각했다. - 황정은, 웃는 남자 중 p. 387
2016. J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