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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나는 잔혹한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고, 그것들이 보여주는 피의 환타지를 즐기는 편이다.
그런 만큼 잔혹한 이야기에 대한 기준도 높다.
그래서 였는지 개봉 전 부터 <곡성>이 엄청나게 기다려졌다.
왠만하면 개봉하는 날, 그 날 보러가야지. 되도록이면 늦은 심야 시간에 집에 올수 있게 그렇게 혼자 봐야지.하고 생각했다.
과연 개봉 당일 저녁 아홉시 사십분 회차를 예매하고 집근처의 상영관으로 향할 무렵, 날씨도 어쩜 을씨년 스럽게 차가운 바람이 후웅후웅 불어주었다. 모든 물리적 조건은 완벽했다.
아. 너무 무서워서 집에도 못오는거 아닐까하는 말도 안되는 기대를 하면서...
그렇게 봤는데.
지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한건 아니고, 두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인데 한시간 오십분쯤 본듯한 지루함. 중간중간 뭣들하는건가...하는 그런 지루함.
피를 뒤집어 쓰고 잔혹하게 난도질 당했지만,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엄마야...하는게 아니라, 저것은 무엇인고...하며 몸을 앞으로 당기며 뚫어지게 쳐다보게 되는 그런거...
정유정의 전작 중 <7년의 밤>은 정말 손에 꼽을만한 스릴이 있었다.
3년만의 신작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지만, 정유정 작가를 믿고 골라들었다.
초반부부터 너무 좋다.
아직 왜인지, 어떻게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저질러져 버린 사건이 너무 스릴있는 것이다.
아.. 좋을 것 같다. 끝까지 좋을것 같아..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그러다 수욜일이 된지 얼마 안된 시간에 어떤 사건 기사를 하나 보게 된다.
강남역 화장실에서 묻지마 살인이 벌어졌다고.
나는 평소 여성혐오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산다.
내가 여성이기에, 살면서 부딪쳐온 수많은 불합리와 불평등 때문에 어쩔수 없이 체득되어온 촉수 랄까.
여지없이 이 사건에서도 여러가지 문제들이 파생되어 나왔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어째서 자신과 다른 성별을 지녔다는 이유로, 그 다른 성별의 완력이 자신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죽임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하는 문제와
그 사건에 대해 의식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언론들이 어째서 무책임하고 편견을 조장하는 논조의 기사들을 쏟아내는가 하는 문제와 : ( 묻지마 살인이라니... 범인은 충분히 계획하여 흉기를 준비하고 한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대상을 물색한 후 제압하기 쉬운 여성을 상대로 벌인 범죈데... 어째서 묻지마.인가? )
:( 사건 직후의 기사들을 보면 강남 번화가를 유흥가로 네이밍함으로써 사건 장소를 조신한 여성의 일상과 거리를 두는 용어를 사용했고, 범인의 동기가 여성이 무시해서라고 범인의 목소리를 가감없이 전달하며 이 범죄의 책임소재를 어쩐일인지 여성에게 두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으며, 범인은 목사를 꿈꾸던 청년이었음을 강조하며 피의자에게 심각하게 감정이입한 타이틀을 너도나도 뽑아냈다.)
이 흉악한 범죄에 어쩔수 없는 자신의 불쾌한 경험담이 소환되는 여성들의 불안심리를 싸잡아 `나는 범죄자가 아닌데 왜 일반화를 하며 남성을 적으로 보는가`라고 투정부리는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 제로에 수렴하는 소신?발언에 대한 문제까지.
틈날 때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트위터 타임라인을 읽는 나의 행동은
그 결과가 분노와 체념과 절망, 우울감 만이 남을 것이 분명한 자해에 가까운 행동인데.
여기에서 눈을 돌려 다른 즐겁고 행복한 일들에 몰두할수 있음에도
이 강남역여성혐오살인사건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이 사건의 전개과정이랄까....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는지
그런 것들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할 것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우울의 사이사이 책을 천천히 읽어나가면서.
아.... 내가 왜 이 책을 지금 이 시점에 읽고 있나....하는 한숨이 절로 쉬어진다.
23살의 누구에게도 무해했던 희생자의 모습이 자꾸 생각나며,
이 전에 정유정 작가에게 던지던 그 열광을 이번에는 왠지 던지기가 껄끄러워졌다고 느꼈다.
나는 이번 사건에 희생된 피해자에게 다수의 여성을 투영할수 밖에 없게 되면서
이 이야기의 화자인 유진의 독백을 차분하게 들어 줄 이유를 잃었기 때문이다.
악을 그 극한까지 몰며 작품을 써내려간 작가를 생각하면 단지 내가 이 책을 읽는 타이밍이 안좋았다고 해야겠다.
기분도 개떡같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도 뒤섞여서.
이건 뭐 리뷰라고 하기도 뭐하고.
영화감상평이었다가, 책 리뷰였다가, 어느날 뒤통수를 치듯 일어난 어떤 범죄사건에 대한 개인적 고민이었다가.....
아... 기분이 정말 별로다.
그래서 결론...
이제까지 살아남은 `나`라는 여성에게 뭔가 셀프 위로라도 하고 싶은 아침을 맞이했다는 것........
어머니는 내가 깨어나는 즉시 이모에게 끌고 간다. 내 주치의이자 저명한 정신의학자이며 미래아동청소년병원 원장님인 이모는 나와 눈을 맞추고, 상냥한 어조로 말이 되는 말을 들을 때까지 조곤조곤 묻는다. 약을 왜 끊었니? 솔직하게 말해야 내가 도울 수 있지. 솔직히 말해 `솔직`은 나의 장점이 아니다. 추구하는 가치도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실용성이며, 당연히 그에 입각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17
˝찜찜하다.˝
어머니는 차에 도착해 시동을 건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게 실화라는 게 무섭고, 산다는 게 슬프기도 하고......˝
비로소, 어머니가 영화관 안에서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 이유가 이해됐다. 내겐 신나고 짜릿했던 영화가 사실은 찜찜하고 무섭고 슬픈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어느 지점에서 무서워하고 슬퍼해야 했는지는 여전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해진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해진을 봤다.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해진은 나와 시선을 맞대왔다. 그렇지?라고 묻는 눈이었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뭔 얘기를 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 66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산다. 각자의 삶에서 제각각 별짓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들 중 누군가는 살인자가 될 것이다. 우발적으로, 분노로, 혹은 재미로. 그게 인생이고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 83
2016. M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