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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무빙 - 소설가 김중혁의 몸 에세이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몸을 이야기하는 에세이.
기대한 만큼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미루었던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어야 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된다.
독서가 꼭 뭘 남겨야만 한다는 강박은 몇 년전 쯤 버리긴 한것 같은데,
어느 틈엔가 슬금슬금 다시 제자리를 잡고 있어 흠칫 놀라기도 한다.
오늘이 그런 흠칫이 있던 날.
두권 연속 흠.. 기대에 못미치네 하고 살짝 실망을 하고,
헉. 난 아직도 독서라는 순전히 내 만족을 위한 행위에서 기브앤테이크 - 돈을 지불하였으니 나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라 이것들아 - 를 원하고 있구나 하고 놀라고,
그러지는 말아야지 하면서 다음 읽을 책을 슬쩍 소개받았다는데 위안을 삼고.
플래그를 붙여놓은 페이지를 다시 읽다보니 꽤 괜찮았던것 같기도 하고.
비가 와서 그런가 혈압도 떨어지고 있고. 그래서 변덕을 부리는가 싶다.
지금까지 <길버트 그레이프>를 여러 번 보았다. 보니가 경찰서에 가서 `내 아들을 내놓으라`고 소리지르는 장면, 길버트가 집을 태우는 장면은, 볼 때마다 눈물이 고인다. 집안에서 불타고 있을 보니 그레이프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보니는 처음부터 그렇게 뚱뚱하진 않았다.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다. 놀림감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은 없다. 어느 날 남편이 죽었고, 남겨졌고, 막막했을 것이고,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마음속에 생겼을 것이다. 보니는 커다란 구멍을 채우기 위해 계속 먹었을 것이다. 나는 보니의 7년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보니의 7년은 내 상상과 다를 것이다. 보니에게는 내가 모르는 다른 일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상하지 않는 것보다는 상상해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게 내 입장이다. 아마 그래서 내가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는 거겠지.
나는 상실에 대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상실을 상상하게 하는 이야기가 더 좋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보다 이미 많은 걸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에 매혹된다.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주는 이야기보다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 이야기 속에 커다란 구멍이 들어 있는 게 좋다. 매력적인 이야기들에는 대체로 커다란 구멍이 들어있다. - 40
상대방의 재능을 부러워하면서 결핍을 눈여겨보지 않을 때 불필요한 질투가 생겨나고, 결핍을 비난하면서 재능을 애써 무시하려 할 때 무시무시한 편견이 시작된다. 누군가를 천재라고 부르는 순간, 그의 결핍이 뒤로 가려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를 솔직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 우리의 무언가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특별한 이름을 호명하는 것은 아닐까. 천재, 바보, 사이코, 등신, 장애인, 그런 이름들로 뭔가를 슬쩍 가리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말해서`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솔직하지 않은 말만 하는 것은 아닐까. - 140
PCT 방명록에 남긴 셰릴 스트레이드의 글 중에서 에밀리 디킨슨의 인용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몸을 초월할 수 있을까. - 234
어떻게 하면 시간 앞에서 담대해질 수 있을까. 주눅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까. 가까이 보고 멀리 보면서 여전히 방법을 찾는 중이다. - 에필로그 중
2016. J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