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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비가 추적추적 종일에 걸쳐 내리고, 늦지도 않은 시간 8시.
날씨 탓, 기분 탓, 약간 취한 듯 어질어질한 기분에 새 책을 고르다 고른 것이 이 책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다.
뭔가 전형적이면서도 탁월한 선택인것 같은 기분에 책 표지를 기분 좋게 쓸어보며 시작한다.
앞 부분의 <봄밤> <삼인행> <이모>는 이미 다른 지면에서 읽은 단편이지만 찬찬히 읽게 된다.
봄밤과 이모는 특히 좋다. 아... 여러번 읽어도 좋아.
문득 간단한 안주거리와 맥주 한잔이 고파져서, 군만두 5개를 앞뒤로 노릇노릇 잘 구워서 접시에 잘 펼쳐놓고 캔맥주 하나를 까 마시고야 말았다.
다 이 책의 제목 때문이다. 안녕 주정뱅이라니...
하나같이 착오와 실수 사이에 갈피를 못잡는, 스리슬쩍 다가온 불행을 그저 받아들이는 일 외엔 할 수 있는게 없는 불운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헛헛해져가는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역시 알콜 뿐.
<봄밤>은 읽을 때 마다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핍으로 완성되는 두 사람의 사랑이, 생뚱맞게 다가오는 봄날의 밤 처럼 고요하게 느껴져서....
그리고 그런 기분에 대해 완벽한 묘사를 해주는 신형철의 해설도 무척 좋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몹시 쇠약해져 한번에 몇마디씩밖에 하지 못했다. 그때 그녀가 한 말들은 또 이전에 한 말들과도 조금 달랐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그녀는 내게 입술에 물을 축여달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거즈에 보리차를 묻혀 그녀의 입에 대주었다.
˝여긴, 책도 없는데, 목이 마르구나.˝
그녀는 어린 강아지처럼 눈을 감은 채 물을 빨았다.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 106, 이모 중
날씨와 풍경, 꿈이나 사물 등에 오래 압도당하고 난 뒤면 그녀는 잠깐 동안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다. 되돌아오는 게 두려운지 되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 - 142, 역광 중
그 만남이 행인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 176, 실내화 한켤레 중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어야 한다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번 책에서 권여선의 소설은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다. 요즘의 나에게 문학과 관련해서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해설 중, 신형철.
2016. J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