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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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하게 뜨거운 여름을 지나는 와중에 무자비하게 뜨거운 여름을 열병처럼 치뤄내는 에이미와 이저벨의 이야기를 읽다.

데뷔작이라니..... :0

에이미는 자신이 엄마와 검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선은 고작 연필로 그은 정도의 굵기였지만 늘 거기 존재했다. - 16

그녀와 엄마는 바보 같은 자신들의 삶이 고단하고 구역질났지만 서로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 313

전 생애를 단지 엄마라는 존재와 부대껴온 고립된 자아가 어떻게 성장? 하는지를 참으로 집요하게 관찰한 기분이다.

알고 읽은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서 드러나는 여성들의 연대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에이미와 이저벨은 서로를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결국 연민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족이기에 의지하게 된다면, 에이미와 스테이시는 십대 후반다운 적당한 어리석음과 적당한 무구함이 버무려진 우정을 구축하고, 이저벨은 스스로의 결벽을 벗어던지고 동료인 베브와 도티와 삶의 한 조각을 공유한다.

그들이 뭔가 대단한 것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서로의 마음 한 조각을 들여다봐주고 가만가만 울어준다는 것 만으로...

어느 새 점점 속도가 붙어 책을 놓을 수가 없게 되고, 희미했던 캐릭터들도 생생한 살과 피를 지닌 인물로 선명해진다.
익숙한 세계이면서, 또 생경하기도 한 세계가 설득력있게 다가와서 오히려 당황스러운 기분도 든다.

오랫만에 으악! 하게 만드는 엄청나게 좋은 소설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른 소설들도 어서 번역되기를 몸달아하며 기달릴것 같다. :):):)


에이미는 데비 돈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친척이나 뭐 그런, 확인해볼 사람들이 있잖아. 그 사람들까지 다 조사했는데 가출이 아닌 게 확실하대. 경찰이 분명히 밝혔어. 살해당하지 않았을까 의심한대. 유괴됐으니까. 그애는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고 행복한 아이였대.˝ ˝지랄.˝ 스테이시는 한 손으로 크래커를 먹으면서 다른 손으로 해군복 스타일의 감청색 코트 칼라를 단단히 감아쥐어 목을 감쌌다. ˝열두 살은 행복하지 않아.˝ - 97

이저벨은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그 일이 얼마나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을지 그녀는 알았다. 하지만 그 구절, ˝나약함이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 이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어머니에게 한 말이었다. 맙소사.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사랑하는 남자를 잃는 것에 대해 햄릿이 뭘 안다고? 이저벨은 얼굴을 찡그리고 엄지손톱을 물었다. 솔직히 햄릿은 여기서 매우 공격적이었다. 보스턴 법정 건물 앞 계단에서 속옷을 불태웠다는 그 여자들도(뉴스에서 들었다) 그 부분은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약함이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 이저벨은 실내복을 더 단단히 여몄다. 솔직히 슬슬 짜증이 났다. 남자들은 깨우쳐야 할 것이 많았다. 여자들은 전혀 나약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먼 옛날부터 세상을 흘러가게 한 것은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만 해도 전혀 나약하지 않았다. 지붕은 새고 차에는 윤활유가 필요한 뉴잉글랜드의 을씨년스러운 겨울 날씨에 혼자 딸을 키우는 여자에게 나약하다니, 가당치 않았다. - 163

뚱뚱이 베브가 라이프세이버스를 통째로 에이미에게 내밀었다. ˝잘 들어.˝ 그녀는 나긋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표정으로 눈썹을 치키며 한숨을 쉬었다. ˝이따금 난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아니면 미친 것과 끔찍이 비슷하거나.˝ ˝별로 미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에이미가 말했다. ˝더없이 정상으로 보여요.˝ 뚱뚱이 베브는 미소를 지었지만 어딘지 슬퍼 보였다. ˝착하기도 해라.˝ 그리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미쳤을 거야.˝ - 276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계속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 수천 년 동안 그래왔다. 누군가 친절을 보이면 그것을 받아들여 최대한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고 나아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언젠가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안다. 도티, 베브, 이저벨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것을 알고 있었다. - 508

2016.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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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8-22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라스님이 책 읽고난 후에 별 다섯 개 주시는 거 정말 드문 거 아닌가요!!!

hellas 2016-08-22 08:24   좋아요 0 | URL
작년즈음부터 제 별이 그리 인색해졌지요. 사실 이년전쯤만해도 후했는데... 어쨌든. 으아 좋아요 좋아>_<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2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이라고 소리칠 정도로 좋은 소설이라니..

hellas 2016-08-22 13:03   좋아요 0 | URL
네. 정말입니다:)

yamoo 2016-08-28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얼마나 괜춘길래....
아, 궁금하네요...저도 리스트에 추가하겠습니다! 모르는 작가인데,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ㅎ

hellas 2016-08-28 21:03   좋아요 0 | URL
뜨거운 여름이 점묘화그리듯 섬세한데 요즘 제가 이런 스타일에 꼿혔나봐요:) 이 작가의 단편집도 엄청 좋습니다!!
 

기대만큼 좋다. 읽으면서도 뭔가를 끄적이고 싶게 만들만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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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랫만에 오프라인 서점엘 들렀다가... 그만 또 책을 사고말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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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박연준 지음 / 북노마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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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언어는 어찌 이리 아름다운지.

되는대로 내뱉고 사는 것 같은 내 삶을 반성하게 하는 면이 있다.

어린 시절의 소소한 기억이 크게 없는 나는(강렬한 사건은 잘 기억나는데...) 시인의 어린시절을 읽으며 부러웠다.

그가 가진 작은 추억들과 작은 풍경들이...

애기똥풀은 피었다 지기를 반복했다. 일찍 피어난 꽃은 일찍 졌고, 늦게 피어난 꽃은 늦게 졌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오래 생각했다. - 16

장담하건대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불안했다. 실제로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불안하다. 도대체 뭐가 불안한가, 라고 묻는다면 할말이 없다. 나 자체가 `불안`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신이 왜 사랑인지 모르고, 가난은 자신이 왜 가난인지 모르듯이, 불안은 자신이 왜 불안인 줄 모른다. 다만 뿌리에서부터, 가느다란 떨림이 엉켜 있을 뿐이다. - 92

2016.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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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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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맞이한 생일날 거의 이백년의 타임워프를 한 주인공.

게다가 노예제가 서슬퍼런 시절의 남부 농장으로 내동댕이 쳐진 흑인 여성의 이야기.

온 몸에 새겨진 흉터와 끝내 잃어버린 왼팔같은건 어쩌면 아주 작은 상실.

시대라는 지층이 쌓이는 과정에서 인간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것들을 잃어버린다는 당연한 사실의 환기.

스타일이라면 스타일, 옥타비아 버틀러의 이야기는 작가의 정체성과 역사와 뗄수 없는 그 무엇인것 같다.

블러드 차일드도 읽어야 겠다는 자극이 됨.


케빈은 나를 흘긋 보았다. ˝당신이 어떤 기분인지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어. 나는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 말마따나, 당신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 이미 일어난 일이지. 우리는 역사 속에 있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역사가 아니야. 혹시 뭔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야 할지도 몰라.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어.˝
˝그럴지도.˝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아버릴 수 없어.˝
케빈은 생각에 잠겨 얼굴을 찌푸렸다. ˝볼 것이 이렇게 없다는 사실이 놀라워. 와일린은 노예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일은 척척 돌아가니 말이지.˝
˝와일린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구나. 아무도 채찍질을 지켜보라고 당신을 부르지는 않으니까 그렇겠지.˝
˝채찍질을 얼마나 많이 하지?˝
˝나는 한 번 봤어. 한 번만으로도 욕 나오게 많아!˝
˝그래, 한 번도 너무 많지. 하지만 내가 상상한 모습은 아니야. 감독관도 없고,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시키지도 않고......˝
나는 케빈의 말을 잘랐다. ˝제대로 된 숙소도 없고, 흙바닥에서 자야하고, 음식은 부족해서 쉴 시간에 텃밭을 가꾸고 세라가 눈감아줄 때 부엌채에서 뭐라도 훔치지 않으면 모조리 몸져누울 지경이지. 권리는 하나도 없고 언제든, 아무 이유도 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가족에게서 떨어져 팔려나갈 수 있어. 케빈, 사람들을 때려야만 잔인한 건 아니야.˝
˝잠깐만. 이곳엣 일어나는 잘못을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야. 난 그저......˝
˝아니, 그러고 있어. 그럴 의도는 없겠지만 그러고 있다고.˝ - 188

2016.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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