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보다가 좋아하는 작가 몇몇의 작품이 읽고 싶어져서 꺼냄.
좀 단순한 스토리를 고를 것을.
많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스토리라 금방 읽어낼 수가 없었다.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테니. - 메리 올리버 <기러기> 중
절망을 이야기하고 그 와중에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누구하나 행복이라는 결말에 다다르지 못한 채, 그렇게 그저 살아 남는 이야기.
여기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나이기 때문일지도.
2017. Jan.

그 세상에는 정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는 것뿐이었다. 그 봄이 지나간 것처럼 여름도 지나가고 있었다. 병원에 있느라 땀 한 방울 흘릴 겨를도 없었는데, 벌써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민은 갑자기 노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또 얼마나 많은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지나갈 것인지 그녀로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리고 그 모든 계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겠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억하는 것, 그 모든 일들을, 그 지나가는 것들을 몸속에 담아두는 일뿐이라고 정민은 생각했다. - 72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다만 묻고 있을 뿐이야. 나만의 방식으로 모두에게 묻는 거야. 우리의 삶은 과연 다른 인류에게 기억될 만한 값어치가 있었는가......" "그게 그 얘기야. 살아남기 위해 늘어놓는 그 음악소리를 철학의 목소리인 양 말할 필요는 없어. 그냥 미친 짓이라고 말하면 되는 거야." - 262
"하루에 사십이해일천이백만경 번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내는 인간들로 가득찬 이 지구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이 180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인간만이 같은 종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만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180이라는 이 숫자는 이런 뜻이다. 앞으로 네게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터고, 그중에는 죽고싶을 만큼 힘든 일이 일어나기도 할 텐데. 그럼에도 너라는 종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할아버지가 말했어. "그러니 네가 유명한 작가가 된다면 우리 인간이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울수 있게 만들어진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써야만 하는 거야." - 279
광주항쟁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광주항쟁은 남한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우연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죽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미팅을 하고 섹스할 수 있었던 까닭은 지극히 단순했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342
사기꾼이자 협잡꾼, 광주의 랭보 이길용이자 안기부의 프락치 강시우였던 그 남자에 대해 이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지만, 어쩌면 그건 우리가 그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지 않는 한,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시시각각으로 열망할 테고, 그 열망이 다시 그를 치욕스럽되 패배하지 않는 인간으로 살아남게 할 테니까 말이다. 그가 살아남기를 열망했듯이 우리가 살았던 그 시절 역시 살아남기를 열망했다. 그 열망은 그의 것이기도 했고, 서서히 무너진 뒤에도 오랫돈안 잔영이 남아 있던 그 시절의 것이기도 했다. -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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