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1
정희진 엮음, 정희진.권김현영.루인 외 지음 / 교양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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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날개부터 각인하고 넘어가야 할 문구들이 넘쳐난다.

좋은 기획이다. 다만 읽다보면 불쑥 불쑥 화가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애초에 양성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평등의 기준이 남성일 때 여성에게 ‘양성평등‘은 평등이 아니라 이중 노동이 되는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
양성평등은 일종의 ‘지향‘인데 그것이 마치 ‘현실‘에서 이미 실현된 것처럼 남녀가 모든면에서 대등하기 때문에, ‘남성도 여성을 혐오하고, 여성도 남성을 혐오한다‘는 대칭적 논리로 오독되고 있다는 것.(p.7)

많은 남성들이 남성과 여성은 원래 친하게 지냈는데(=여성이 성차별을 참았는데), 갑자기 남녀가 불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반사회적 여성‘이 등장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미 여성 상위 시대인데, 여성이 저항하다니 역차별이다‘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성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 남성들에게 ‘양성평등‘은 의미 없는 말이다. 원래 평등했고, 최근에는 여성이 더 특권을 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들의 인식이다. (p.9)

그녀/그의 피부색이나 해어난 계급의 조건에 맞는 직업, 감정표현, 옷차림, 섹슈얼리티, 가사 노동 등 일생 전반에 걸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즉 ˝계급 역할(당신은 가난하므로 공부하면 안 된다)˝ 이나 ˝인종 역할(당신은 흑인이므로 실업자가 자연스럽다)˝ 같은 표현은 없다. 반면, 성 역할(여자는 애를 낳아야지)이란 단어의 존재는 성차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정치인지, 젠더가 얼마나 인식하기 어려운 사회적 구조인지, 얼마나 탈정치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p.24)

현재의 저출산 현상은 여성들의 자기 계발, 사회 진출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여성의 고등 교육화에 따른 여성 자신의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이다. 여성들은 저출산을 통해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다시 남성 중심의 인구학(부국강병의 전제는 인구가 많아야 한다)이라는 또 다른 정치와 충돌하고 있다. 이처럼 출산이야말로 대표적인 정치적 의제이다.(p. 28)

국가는 국가 경쟁력을 위해 여성을 임의적, 일시적으로 ‘사용하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여성 노동력 동원을 ˝일과 가정의 양립˝정책이라고 속이지 말고, 시민 사회와 여성 운동 세력은 여성의 과다한 노동 상황을 ˝여성의 지위 향상˝, ˝여성 운동의 발전˝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한다. (p. 53)

신학자 잭 로저스는 ˝남녀 평등을 반대하는 것과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 사이에는 강한 연결고리가 있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가부장제 가족 구조를 교회와 국가의 안정에 열쇠가 되는 것으로 본다. 이런 견해에서 가부장제와 애국심과 기독교는 하나의 깃발 아래 뭉치며, 그 깃발은 동성애에 대한 모든 논의 위에서 휘날린다. 동성애와 여성 평등은 둘 다 남성 우위의 모델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확대하면 교회와 국가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세상이 불평등하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평등하다. 창조주께서 그렇게 다 계산해서 만들어 놓으신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리하게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무리들은 기존 질서를 깨려는 반란자들이고 자신들은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는 위치가 된다. (p.184)

2017.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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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하학 존 치버 단편선집 4
존 치버 지음, 황보석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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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지 캐릭터들은 내가 좋아할 만한 구석이 정말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꼬여있거나 경직되었거나 차갑거나 분열적인데.

짧은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면 동화? 까지는 아니어도 매우 연민하게 된다.

어쨌거나 존 치버의 캐릭터를 집어던지는 방식의 전개는 매우 좋다.

다음에 그가 책상에서 일어나 내가 서 있는 곳으로 왔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걱정 마시오.˝ 피넘브러가 말했다. ˝쇠퇴는 우리 모두가 직면해야 하는 거니까. 나는 내 차례가 왔을 때 당신처럼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으면 좋겠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런 다음 나는 그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남자 화장실로 가 칸막이 한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울었다. 나는 피넘브러의 부정한 술책 때문에 울었고, 다이나플렉스의 운명 때문에 울었고, 내 비서 -여가 시간에 단편소설을 쓰는 총명한 노처녀-의 비운 때문에 울었다. 나 자신의 고지식함과 순진함이 한심해서 비통하게 울었고, 내가 삶의 명백한 사실들에 매몰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울었다. - 138, 대양 중.

자동 응답기에도 그에게 걸려온 전화는 없었고 또 그에게 온 우편물도 없었다. 그는 외로웠다. 그리고 비참하다기보다는 어리둥절했다. 그것은 그가 현실 감각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본 현실이 타당성과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 210, 사랑의 기하학 중.

2017.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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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 2017년 제4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구효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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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몰려온 추위가 마음을 잔뜩 움츠러들게 했는지
괜한 울적함이 지배한다.

구효서작가의 풍경소리는 왠지 묘하다. 절에서 일어나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인데 그랬다.
여성 화자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나가서 좋았다.
자선작인 모란꽃이 좀 더 좋았지만.

소설가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 외 어떤 명분도 없다는 사실, 그 앞에서 절벽을 오르듯 한 줄 한 줄 적는다는 작가의 말이 안쓰럽기도 하다.

우수작 중 조해진의 눈 속의 사람이 어김없이 좋았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도 사이사이의 연결도 문장 하나하나도.

한지수의 코드번호 1021도 좋았다. 고문기술자의 회한이라는 것은 그다지 공감못하겠지만. 작품 중 어떤 문장에 마음을 주고 말았다.

소용없고 쓸데없는 것들의 무덤. 지금까지 살아오며 내뱉은 푸념과 허텅지거리, 시샘과 원망의 썩은 물웅덩이였다. 일없이 반복되고, 그러면서 그치지도 않고, 뭐 하나 분명치도 않은 느낌과 경험 들이, 까닭 없이 오가는 바람처럼 배회하다 중얼거리며 가라앉은 티끌과 먼지 들이었다. 사실도 진실도 진심도 아닌 글더미. 내 것도 아닌 것들. 소용없고 쓸모없는 짓의 무심한 반복을, 수십 년이나 지속해오다니. 무엇 때문일까. 허망......했다. - 111, 모란꽃, 구효서.

스탠드 조명 덕에 최길남 씨의 얼굴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그저 긴 통로 같았던 생애를 막 빠져나간 자의 무감한 얼굴이었다. 오랜 세월 가슴을 움켜잡으며 회한의 한숨을 참아야 했던 인내의 얼굴은 이미 풍화되어 그 무감함 속으로 스며든 것일까. 기묘하게도 영정 속 그 얼굴은 조금씩 나처럼 보였다. 미래의 내가 시간이 멈춘 고요한 사각형의 세계에 갇힌 것만 같았다. 뜻하지 않게도 나는, 외로웠다. - 298, 눈 속의 사람, 조해진.

아버지의 무혐의를 밝히고 정부로부터 1월이라도 받아내겠습니다. 가장 싸구려 보상이 돈입니다.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수 없으니까요...... - 312, 코드번호 1021, 한지수.

2017.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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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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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어느 수도원에서 만들었다는 맥주를 마셨다. 도수가 좀 된 것이었는지 기분좋은 뜨끈함이 온 몸에 훅 퍼졌다. 사실 수도원에서 만들었는지 어쨌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래도 기분은 그랬다.
왠지 편의시설이 보통 이하일 것만 같은 유럽의 어느 오래되고 낡은 수도원에서 만들어졌을 듯한 알콜이 내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고 그 기분에 취해서, 다시 읽는 황정은의 소설들이 더 날카롭게 다가온다는 기분.

이런 저런 문예지에 단편으로 따로 따로 실려 있는 글을 띠엄띠엄 읽은 것이 이 소설집의 처음이다. 묶여져 나왔다기에 다시 한번 좀 성글게 읽었다. 그리고 세번째(아마도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읽었다.

소설가는 문장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나라면 아무래도 그럴것 같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 허투루 쓰지 않은 문장은 조곤조곤 조용한데, 어째서 나를 이렇게 후벼파는가.
심상하게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그녀는 별다른 완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비정하고 차가운 거리로 내몰아 쓰러뜨린다.

아무도 아닌 이의 수치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도 무해하다 스스로 믿는 존재.
그럼에도 우리는 발을 담그지 아니하고, 한마디 보태지 아니하고, 한 발짝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지 않음으로써 그 모든 수치를 외면해 왔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다.
생각만 했지 그 다음은 모르겠다. 오늘 생각을 했으니 내일은 행동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희망일 것이라고 애써 위안한다.

단편들 곳곳에 퍼져있는 우울이 어쩔수 없는 감성을 자극한다. 여기서 그려지는 우울은 존재론적 우울이다. 존재하기 위해 감수해야하는, 외면해야 하는 감정들이 우울에 가 닿는 것일 뿐이다. 우울하기 위해 우울하지 않고, 그저 잘 살아보려다 보니 우울해지는 것. 아.... 우울해진다.

‘상행‘에서 오제와 그의 어머니, 나는 고추밭을 털러? 간다. 딱히 고추가 궁해서도 몰려 다니는 것이 꽤나 즐거워서도 아닌. 그저 툭 던진 제안에 툭하고 답했을 따름이다. 고추를 털러간 시골도 사연있는 사람들이 산다. 친지의 자손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을 팔아 사업자금으로 쓰겠다고 하는 바람에 집없이 쫓겨날 위기에 몰려있는 두 늙은 여인.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집) 늦게 팔려라˝뿐이다.
사는것이 곤궁해서, 피곤해서, 목표를 상실해서 사람들은 좌절할 것 같지만, 어찌저찌 나름의 생을 살아간다.
그게 슬픈 상행이다. 그들 앞에서 ‘늦게 팔려라‘라고 객쩍은 소리 한마디 보태고 그들의 자식같은 수확물을 차바퀴가 가라앉도록 싣고 오는 상행이기 때문이다.

‘양의 미래‘ 속 사라진 진주는 나의 탓일까. 더 큰 원한의 대상을 찾지 못한다면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다. 못견디게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면 그저 돌아가지 않는 방법 뿐인 스산한 삶.

‘상류엔 맹금류‘ 다시 읽어도, 아니 다시 읽을 수록 입맛이 쓰다.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화자는. 제희 가족에게 손쓸도리 없이 퍼져있는 암세포 같은 불행의 포자들을 그날 수목원에서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 느낌을 안고 그들이 가족이 되는 일은 어쩌면 자학일 수 있다. 빨리 털고 돌아서는 것이 나에겐 유일한 대책일 것이다. 사랑 하나로 불행을 이겨내는 것은 말 그대로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현실이 그렇다고 말했다.

‘명실‘ 유실되어가는 기억. 그 안에서 끝까지 붙들고 싶은 이름으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는 일.
글로 적어 종이 위에 오래된 만년필로 아로 새기듯 기억을 각인시키고 싶은 마음. 그러나 끝끝내 완성되지 못할 글이라는 것을 그냥 알아챌 수 있다. 헛되다. 그런 헛된 노력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해본 적은 없으나.

‘누가‘ 참으로 노골적인 변명. 웃는 얼굴로 사람을 모욕하고 병신 만들려는 세상에 지쳐있는 한 사람이 내뱉는 대꾸없는, 대꾸없을 절규같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도저히 괜찮은 일상을 살아갈 수 없는 두 사람이 아둥바둥대는 이야기.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더 뼈아픈 상처가 된다. 언젠가 눈치가 너무나도 빠른 사람들이 주인공인 드라마 같은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자신이 처한 위치가 너무도 명백하게 약자여서 타고나길 눈치가 빤한 사람일수밖에 없는 사람들. 약자들 중의 약자의 위치에 대해 생각한다. 약자들 중의 강자의 위치에 대해 생각한다.

‘웃는 남자‘ 작은 행복을 크게 불어서 나눠주는 사람 디디. 입닥치라고 외친 아버지. 그 외침에 입을 꾹 다물고 그냥 죽음으로 향해 간 목공소 아저씨. 누가 주이고 객인지 모두가 주인지 모두가 객인지 모르겠다.

‘복경‘ 존엄한 죽음에 대한 생각. 돈이 없으면 진통을 할 수 없다. 인간다움은 여력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존나 귀할수 있는 것 그것은 인간이 아닌 것이라는 결론이 쓸쓸하다.

와닿은 구절과 문단들이 차고 넘쳐서 구지 기록하지 않는다.
그저 읽어보길 권할 뿐.

2017.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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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7-01-2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저는 헬라즈님 별 네개짜리, 다섯개짜리 포스팅 올라올 때마다 지름신이 강령해서 힘들어요~ ㅋㅋㅋㅋㅋ 그래도 좋아요~

hellas 2017-01-22 14:13   좋아요 1 | URL
별 넷 다섯 드무니까....;ㅂ; 괜찮지 않을까요 ;;;;ㅋㅋ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24개로 구성되는 연가곡이다.

이 연가곡 하나로 이런 볼륨의 책이라니.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무척 궁금했다.

역사학자이면서 테너인 이언 보스트리지의 인문학적 식견이 빛을 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각 곡 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층위가 다채로워서, 쉽게 지루해지지 않았다.

공연 중의 에피소드를 떠올리기도 하고, 유럽 역사, 현대 철학자, 문학가, 예술가 들을 아우르는 제네럴리스트의 본보기 같은 모습. 그 와중에 당대 배경 설명과 슈베르트에 대한 이야기는 기본이다.

이 책 원서의 부제는 ˝집념의 해부˝다. 과연 그러하다.

앨범 하나 골라서 플레이하면서 읽다보면 술술 읽히는 매력이 있다.

가곡. 성악은 취약하고 아는것 많이 없지만 매우 읽을 만 하다.

이런 구성의 다른 책에 대한 기대치가 생길 만큼.

겨울 나그네를 이렇게 진지하게 들어본 적이 있었나 싶다.

우울하고 자신에게 냉소적인 고독한 인간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가곡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도 하고.

이 우울이 요즘 듣기 매우 적절하지 아니한가 생각하게도 되고.

개인적으로는 21곡 여인숙과 24곡 거리의 악사가 가장 좋다.



나를 멸시한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마음속에 품고...... 먼길을 돌아다녔다. 여러 해 동안 노래를 불렀다. 내가 사랑을 노래하려고 할 때마다 사랑은 고통이 되었고, 고통을 노래하려고 하면 고통은 사랑이 되었다. - 슈베르트가 쓴 <나의 꿈>이라는 글 1822년 7월3일.

2017. Jan.

소외는 <겨울 나그네>의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소외라는 단어에는 아주 단순하게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 아무렴 이 연가곡도 남녀간의 연애에 이어 소원해진 관계로 시작하지 않는가. (중략) 첫 단어 ‘Fremd‘를 통해 이 작품은 부조리주의, 실존주의, 기타 20세기를 풍미한 수많은 주의들과 연결되고 또 베케트, 카뮈, 폴 오스터의 주인공들과 연결된다. 슈베르트가 살았던 시대는 아마 역사상 최초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대단히 외롭게 보였던 시대였다. 의미 없는 텅 빈 우주가 드러났다. - 50

슈베르트가 삶의 이 무렵에 확립한 자아 개념은 음악에서와 마찬가지로 외톨이, 버림받은 자였다. 삶에서 겪은 실망은 예술로 옮겨갈 수 있었다. - 67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의 길을 가네.
밝고 즐거운 인생을 지나
홀로 반겨주는 이 없이.
오, 하늘이 이토록 고요하다니!
오, 세상이 이토록 밝다니!
폭풍이 몰아쳤을때도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는데. - 12곡 고독 중.

나그네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병리학의 대상이거나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일까? 이것은 내가 <겨울 나그네>를 부를 때마다 본복해서 돌아오는 길문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그와 동일시해야 할까. 아니면 배척해야 할까? 그는 동정심을 자아내는 인물일까, 혐오감을 주는 인물일까? 통찰을 안겨줄까, 당혹감을 선사할까? 괴팍할까, 정상일까? 이런 당혹스러운 반응들이 <겨울 나그네>를 그토록 매력적으로 만든다. - 347

다른 세상의 느낌을 주는 음악이 더해져서 우리는 은유적이든 아니든 이 태양들이 나타내는 것이 나그네가 잃어버린 불가해한 무엇, 불행한 연애 이상의 무엇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이어지는 마지막 곡의 파리한 비음악nonmusic뿐이다. -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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