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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평점 :
지난 가을 출간되어 바로 구입한 책인데, 쌓여있는 책이 많다보니 이제야 읽었다.
언제나 깔끔한 문장들.
여러 소설 집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불운이 정이현의 소설속에선 좀 덜 느껴진다.
배경, 환경, 캐릭터 크게 다르지 않은데 어떤 점이 편하게 다가오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겠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아무것도 아닌 것>, <영영, 여름>이 무척 좋았다.
상냥한 폭력이 시대라는 제목과 보들보들한 표지가 어쩐지 매우 어울렸다.
난 널 베어버리지 않는 종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안 표지에 ‘지금, 여기, 함께‘라는 작가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는데, 한 계절을 건너 손에 잡은 나의 ‘지금, 여기, 함께‘와 얼마나 멀어졌는지, 별 차이없는지, 괜한 감상에 젖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은 뱉는 순간 허공에 흩어진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가장 깊은 안쪽에 가만히 모아두고 싶다. 그것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중. p. 9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유로 떤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중. p. 31
어떤 아이도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도 머지않을 텐데. 또다시 살아가기 위하여 나는 바다 쪽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 우리 안의 천사 중. p.97
누구나 죽는다. 언젠가 장의 부고도 받게 될 것이다. 장이 양의 부고를 받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었다. 최후의 문장이 누구의 것이든 애도는 남아 있는 자의 의무였다. 그녀에겐 여전히 긴 오후가 남아 있었다. - 밤의 대관람차 중. p.160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시대에 살아가는, 나와 빼닮은 그들을 이애하려 노력 할 수밖에 없다. 쓸 수밖에 없다. 소설로 세계를 배웠으므로, 나의 도구는 오직 그뿐이다. - 작가의 말 중.
2017. F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