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정열
기준영 지음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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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의도하지 않은 일들이 줄줄 생기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시즌이다.

기준영 작가가 그려낸 정열은 기준에 조금씩 못미치는 정열일까?

감당하기 힘든 폭풍같은 정열이라기 보다는 평소보다 15퍼센트 정도 기운을 내본 정열인가?

그 뜨뜨미지근한 정열조차도 버거운 나 주제에 이런 소린 좀 웃기지만. ㅋ

불안과 열망, 이상한 정열, 여행자들이 특히 좋은 단편집이었다.

나는 당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족을 모르는 여자야. 미안하지 않아. 먼 곳, 끝의 끝에서, 수경. - 불안과 열망 중. 33

쟤들이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의 문제에 투신할 생각 없어. 서운하게 생각하지마. 오늘이 너랑 내 편이 아니라서 그래. 그것뿐이야. -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 중. 54

그는 턱없이 더 집요해질 때도 있었다. 보라색 꾸러미를 들고 그와 한 택시에 올라탔던 소년, 가전제품과 개에 정통한 사내, 다리에 흉이 진채로 나타난 옛사랑이 살고 있는 저편, 아니 그가 부재한 자리에서 무언가를 통과해왔고 이제 여기 당도해서 서걱거리고 부딪치고 신음하고 비틀렸다가, 다시 환한 웃음이 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밝아 오는 아침 해를 함께 맞는 것들에. 모든 것을 친애하고 싶은 그의 마음은 한순간 너무 뜨거워져 정염과 헷갈렸다. 그는 때로 열이 오르고 야윈 채로 갈팡질팡했다. 생이 덧없다는 말은 무용했다. - 이상한 정열, 145

˝비 와도 좋다, 그죠?˝
˝네?˝
˝우리 아버지가 영화배우 하고 싶어했고, 우리 엄마는 가수 하고 싶어했고, 그러다 다 잘 안됐거든요. 그래서 내가 멀쩡히 길 가다가 흙탕물 뒤집어써도 그냥 그런가보다 해요. 비 오면 그럴 수 있어.˝
그 말은 나중에는 이상하다고 생각됐는데, 그때는 전혀 이상하지가 않았다. 여자는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미소를 지었다. 나도 미소를 지었다.
(중략)
우리는 비가 조금씩 들이치는 커다란 파라솔 아래 자리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가 와서 발이 묶인 채로 뭔가를 기다리거나, 혹은 이 여자나 내 여자친구를 완전히 떠나가거나 떠나보내야 할지 모를 내 입장은 문득 서글픈 것도 같았다. 하지만 빗속에서 많은 상념들을 불러모으며 쉼표처럼 잠시 멈춰 있는 것은, 두개의 멈춰선 쉼표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일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름답고 싶었고, 사방에 빗소리만이 가득한 이때 우리가 뭔가를 끝없이 말해보고 싶어하는 것이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고 거창하게 사고를 확장했다. - 여행자들 중. 152

누군가는 저 안개를 뚫고 걸어들어올 거야. 그러니 발이 묶여 있을 때라도 눈을 감지는 마. 운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만나지는 것들을 다 만나봐라. 그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고, 여기까지가 오늘 나의 최선이야. - 여행자들 중. 170

2017. F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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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의 기분 문학동네 시인선 41
박상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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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책장에 읽히기 대기중인 책들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왜이렇게 분홍분홍한가....

스치듯 페미니즘 서적 붐탓인가 싶다가도

제목을 훑어보니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니다.

분홍색 되게 싫어하는데....

방 책장에서 분홍색을 없애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분홍색을 좀 더 자주 고르게 된다.

그런 기분이 숙녀의 기분일까.

숙녀라는 입에 붙지도 않고 왠지 찌르르한 단어가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인 듯도 싶다.

그러나 이 시집은 필연적으로 분홍 분홍 샤라랑 샤라랑 할 수 밖에 없는 종류의 언어.

이십대 중에서도 일부의 여자 아이? 숙녀? 들만이(특히 나의 이십대는 절대....;ㅂ; 난 아무래도 학형에 가까운 캐릭터였으므로) 부릴 수 있는 변덕과 새침함과 창피스러움, 고단함, 굴욕이

40대에 접어든 아재?(비하하는거 아니에요) 시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아스트랄함.

그게 또 나쁘지는 않고, 그런데 좀 기괴하기는 하고, 그럼에도 되게 샤라랑샤라랑 해서 갸웃갸웃 시집을 덮게 된다.

하지만 고개라도 끄덕이지 않으면
당장 나는 할 게 없어진다 - 좀 아는 사이 중.

조약돌이 길을 가르쳐주겠지만 이 땅은 가문비나무가 너무 높고 그늘이 깊고 종종 푸르고 씁쓸해 - 청춘 중.


2017. Feb.

여름의 에테르

길고 긴 계절의 편지를 쓰고 계단을 내려갔을 때였지, 코끼리 열차를 타고 온다는 라운지 밴드는 졸다가 가버렸고 담쟁이덩굴만 골목에 가득했어 난 여름의 마음을 담아 목각 인형을 풀어주었지 트로피컬 양산을 귀에 꽂고 잠자리 안경을 씌워주었어

떠돌이 악사를 찾아가, 산악 전차를 타고 다시 여행을 시작해

하늘나라 미술관에선 하트 모양의 펀치를 찍고 있었지 라일락의 마지막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어. 사람들은 어떻게 여름을 살아갈까 마음이 지워질 때까지 얼마나 더 꽃잎을 모아야 할까

아무것도 미운건 없었어 써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지워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나는 또 대문을 닫겠지만 눈길이 닿는 곳마다 만난 적 없는 눈망울과 이 여름의 공기와, 에테르의, 부서져 흩어지는 에테르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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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온 스노우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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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형사 시리즈와는 또 다른 느낌.

어찌나 클리셰 범벅인지 큭큭 거리며 웃게 된다.

볼륨도 여유있고 킬링타임으론 좋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는데(아니 이미 만든건가?) 안봐도 영화의 정조가 어떨지 충분히 예상가능.

2017. F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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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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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편만 읽다 자야지 했는데, 결국 손에서 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었다.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되는가
속으로만 부르는 것들은
네 이름이 내 심장을 죄어온다
소풍이라 말하려 했는데
슬픔이 와 있다 - 저녁의 호명 중.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 목 없는 나날 중.

우리는 타인이라는 빈 곳을 더듬다가
지문이 다 닳는다 - 더듬다 중.

2017. F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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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2-20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봐야겠네요. ^^ 지문이 다 닳는다 ㅡ 빈곳을 ..더듬다가...^^ 좋네요!

hellas 2017-02-20 13:58   좋아요 1 | URL
추천해용!!:)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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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책은 분명 산 이유가 추천이었던 것 같은데.

혁명적인 글쓰기 방법론이라는 표지의 글귀가 참.

사무라이가 되어 써라.라고 말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입가가 찌그러지는 웃음을 지었다는 건 안비밀.

결국 한마디로 ‘아 네에...‘ 하게 된 책.

2017. F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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