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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중앙 148호 - 2016.겨울
중앙books 편집부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148호의 이슈에 관심이 있어서 봤는데 기대에는 못미쳤다.
이미 sns 상에서 까발려진 실상을 보아버린 탓일 수도.
증언과 우려 이외에 무엇이 더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발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지를 보낸다.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곡시> , 문정희 의 시가 깊이 남았다.
나의 서사는 내가 씁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당신의 서사에 끼워 맞추지 마시오. 지금까지는 당신의 서사만 세상에 전해지고 확정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서사를 우리가 직접 쓸 것입니다. 지금은 당신이 우리의 서사를 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 참고문헌 없음, 이성미, 15
어느 날 앨리스 먼로의 글을 읽다가 한가지 이미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은 ‘오븐의 세계에서 신문의 세계로 넘어가는 여자들‘이었습니다. 오븐 안에 양념을 잘 갖춘 요리를 넣은 다음 타이머를 맞추고 요리가 만들어 지는 동안 식탁에 앉아 신문을 읽는 여자들, 거기에 메모를 하거나 자기 글을 차곡차곡 쓰는 여자들 말입니다. 시소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서서히 오븐의 시간은 줄어들고 신문의 시간은 늘어납니다. 마침내 읽고 있던 신문에 그녀의 시나 소설이 실리는 날이 옵니다. 그녀는 작가가 됩니다. 이것이 그녀의 단편을 읽으며 제가 떠올린 상상이었습니다.
저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정반대였습니다. - 밤은 길어 걸어 고양이야, 김성중, 66
곡시 -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문정희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타국에서
그녀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근대 문학의 선봉으로
새 문예지의 출자자로 기생집을 드나들며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당대의 스타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문장‘지에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성폭력,
비열한 제2의 확인 사살이었다.
이성의 눈을 감은 채, 사내라는 우월감으로
근대 식민지 문단의 남류들은 죄의식 없이
한 여성을 능멸하고 따돌렸다.
창조, 개벽, 매일신보, 문장, 별건곤, 삼천리, 신여성,
신태양, 페허, 조광의 필진으로
잔인한 펜을 휘둘러 지면을 채웠다.
염상섭도, 나카니시 이노스케라는 일본 작가도 합세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그들은 책마다 교과서마다
선구와 개척의 자리를 선점했다.
인간의 시선은 커녕 편협의 눈 하나 교정하지 못한 채
평론가 팔봉 김기진이 되었고
교과서 편수관, 목사, 소설가 늘봄 전영택이 되었고
어린이 인권을 앞세운 색동회의 소파 방정환이 되었다.
김동인은 가장 큰 활자로 문학사 한가운데 앉았다.
처음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
대한민국 국방 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소설 25편, 시 111편, 수필 20편, 희곡, 평론 등 170여 편에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를 처음 이 땅에 번역 소개한
그녀는 처참히 발가벗겨진 몸으로 매장되었다.
꿈 많고 재능 많은 그녀의 육체는 성폭행으로
그녀의 작품은 편견과 모욕의 스캔들로 유폐되었다.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힉대해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2017. A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