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2017년 3월
평점 :
아마도 작가의 페르소나인 듯한 아이리스의 괴롭고 외로운 경험들이 예민하지만 신경질적이지 않은 그 어떤 지점의 시선으로 다루어진 것이 좋았다.
손에 베일 것만 같은 예민함이, 조금만 삐끗하면 추락할 것 같은 위태로움이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데, 지적으로 충만하나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관계맺기에 능란하지 못한 여성으로 설정되는 아이리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과연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게 만들었다.
화자인 아이리스라는 캐릭터는 고스란히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 아이리스와 대항하는 남성들의 캐릭터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자신을 감추고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속삭임의 익명성을 애호하는 모닝, 결국 어떤 꿍꿍이가 있었던 것인지 의심스럽기만 한 조지, 스티븐, 패리스, 유약한 모습으로 쓸쓸하게 퇴장하는 마이클.
그들과의 관계를 거쳐 결국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아이리스를 타자화하여 바라보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시리 허스트베트를 처음 만난 소설이고 작가 자신의 첫 소설이어서 여러 측면에서 기준점이 될 작품이었는데, 무척 좋았다.
단언하건데 나는 시리의 애독자가 될 것 같다.
덧붙여 의역된 제목인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은 무척 시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클라우스, 말도 안 되는 무의미는 반드시 찾아올텐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무의미는 찾아온다. - 198
당신은 다른 사람들 같지가 않아요. 잠시 말을 쉬었다가 그가 말했다.
하지만 대체로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패리스가 말했다. 당신은 날 수 있어.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날갯짓만 퍼덕퍼덕 하면 되겠네요, 그렇죠?
패리스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에요.
그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고 아이러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내가 말했다.
말이 시간을 두고 가라앉아야 할 때가 자주 있죠. 있잖아요, 한동안 땅 속에 묻어두는 거. - 242
2017. M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