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특별판, 양장)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여자의 끊임 없는 독백. 회상과 사유가 넘쳐나는 광인의 주절거림.
중반 이후 몰입해 읽으면서 현기증이 느껴지는 암담함.

여기서 그려내는 세상 안에 내가 존재했다면 어느 지점쯤일까 하는 불안함.

짧은 단락은 몰입에 도움을 준다.

반면 구체적 정황을 모른 채 주인공이 이끄는대로 더듬더듬 가는 길은 불안하다.

이야기가 진행 될 수록 시야가 넓어지듯 펼쳐지는 세계의 모습은 그냥 최악이다.

여성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한도 안의 최악들은 다 모아놓은 듯한 세계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고 어느 남자 작가는 말했지만, 주인공은 빨강은 나의 색깔이 아니라고 초반부터 못박는다.

이 세계에 몸을 푹 담가버리지는 않겠다는 다짐처럼. 응원하며 읽었다.

그 응원이 허무로 남는지 안도로 남는지는 읽어보길 권한다.



우리는 미래를 갈망했다. 우리는 어쩌다 터득하게 되었을까? 영영 채울 수 없는 허기를 갈구하는 이런 재능을, 도대체 어디서 배워버린 걸까? 갈망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 10

사고였어요. 코라가 말했다.
세상에 사고라는 게 어디 있어. 배후에는 다 고의가 있기 마련이야. - 39

행주는 하얀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있다. 행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가끔 이렇게 문득 비치는 정상적 삶의 흔적이 매복하고 있던 병사처럼 옆에서 나를 덮칠 때가 있다. 평범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 세찬 바릴질처럼 과거를 환기시키는 것들. 문맥에서 떨어져 나온 행주 한 장을 보며 나는 그만 헉 하고 숨을 멈춘다. 어떤 사람들에겐, 어떤 면에선, 세상이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게 아닌 것이다. - 85

다 끝나버린 고통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남은 건 그림자뿐인데. 그것도 마음속이 아니라 육체에 새겨진 그림자. 고통은 표식을 남기지만 정작 너무 깊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면 잊혀지는 법. - 215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 남자라면, 그리고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다면, 제발 명심해 달라.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정말이지 그런 충동은 참으로 거역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용서 역시 일종의 권력이다.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권력이며, 용서를 유보하거나 베푸는 일 또한 일종의 권력이다. 아마 그만큼 커다란 권력은 없을 것이다. - 233

우리는 함께 뒤로 돌아선다.
걸을 때 고개를 숙인 채로 걷되 내쪽으로 살짝만 몸을 기울려줘. 그러면 그쪽 말이 더 잘 들리니까. 누가 다가오면 말하지 마.
우리는 보통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나는 너무 흥분해서 숨도 못 쉴 정도였지만 걸음걸이는 차분하게 유지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남의 이목을 끌어서는 안 된다.
네가 진짜 신봉자인 줄 알았어.
오브글렌이 말한다.
너야말로. 넌 언제나 더럽게 경건하더라.
내가 말한다.
누가 할 소리.
나는 깔깔거리고, 소리를 치고, 그녀를 와락 껴안고 싶다.
우리 일원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
나는 되묻는다. 그럼 ‘우리’가 존재하나 보다, ‘우리’가 정말 있나보다. 그럴 줄 알았다. - 289

당신은 내 기분 몰라. 나는 말했다. 누가 내 발을 잘라 버린 기분이었다. 울지 않았다. 하지만 루크를 껴안을 수도 없었다.
일은 일일 뿐이야. 그는 나를 달래려고 했다.
당신이 내 돈을 다 갖는단 말이지,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막상 내뱉고 보니 소름이 끼쳤다.
쉿. 루크가 말했다. 아직도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돌봐줄 텐데 뭘.
난 생각했다. 벌써 이이가 나를 봐주는 척하고 있어. 그러고는 또 생각했다. 벌써 나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구나.
알아. 나는 말했다. 사랑해. - 308

우리에겐 아직도…… 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직 뭐가 남았는지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갑자기 루크는 ‘우리’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한, 루크는 아무것도 빼앗긴게 없었다. - 313

저도 이제부터 여기 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당신이 즐거워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가벼운 말투로 말한다. 하지만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다. 하마터면 나는 그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뻔했다.
앞으로도 그러길 바라오.
제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고 싶으신 거군요.
내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은 질문이 아니라 직설적인 지적처럼 느껴졌다. 단호하고 의도가 분명한 진술. 내 삶이 견딜 만하다면, 그럼 그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이 다 정당화된다.
그래. 맞아. 나는 그랬으면 좋겠소.
좋아요, 그럼.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내가 그의 약점을 쥐었다. 그에 대항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나 자신의 죽음이다. 내가 잡은 약점은 바로 사령관의 죄책감이다. 드디어.
당신은 뭘 갖고 싶소?
그의 말투는 여전히 가볍기만 하다. 이게 단순한 금전 거래에 지나지 않는 문제인 것처럼, 그리고 사탕이나 담배를 사듯이 거래 규모도 아주 하찮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핸드로션 말고 말씀이시죠?
핸드로션 말고.
그가 동의한다.
저는…… 저는 알고 싶어요.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고 한 말이라, 우유부단하고 심지어 어리석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뭘 알고 싶은 거지?
저한테 알려줄 일이 있으시다면 뭐든지.
하지만 그건 너무 경솔하게 들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이에요. - 325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소.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오.
더 좋은 세상이라고요? 나는 조그맣게 되뇐다. 어떻게 이걸 더 좋은 세상이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더 좋은 세상이라 해서, 모두에게 더 좋으란 법은 없소. 언제나 사정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조금 있게 마련이지. - 363


2017.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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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7-06-19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결코 부정적인 미래의 이야기만이 아닌게 지금 이 때도 여자에게 끊임없이 바라죠. 애도 낳고 일도 하고... 외부에는 아내 역할까지. 여자에게 좋은 세상이란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ㅜㅜ

hellas 2017-06-19 21:08   좋아요 0 | URL
여성수난사는 어떤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사건이 적기도 하고. 어쩔도리없이 분노와 실망 이런 기분이 지배적이라서 씁쓸해요 :(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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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달부터 독서가 부진했다.

이 달도 왜인지 그럴 듯 한 기분이 들어,

뭔가 환기가 되면서 단숨에 읽을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게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이라는 긴 제목의 책.

내 나름의 독서법을 이미 찾았으니 이런 류의 책은 그만 읽어도 될텐데

보이면 자꾸 사게 되는 것이 뭔가 남들에게 묘책?이라도 있는거 아닐까.하는 마음인 것 같다.

그러나 허탈하게도 대부분 읽고나면 딱히 탁월한 무엇이 있는 사람은 없다.

본문의 내용이 딱 그 이야기였다.

세상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빠르게 완료하지 못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은 대부분 오래 걸리는 시간 자체가 그 핵심입니다. 책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책과의 만남, 그 글을 쓴 저자와의 소통 또 책을 읽는 나 자신과의 대화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 58

2017.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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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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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독서를 시작했다가 그만둔 적 있는 책이다.

아마 지루해서였겠지?

이번엔 토마스 만의 작품들을 좀 읽어봐야 겠다는 나름의 목표가 있어 생각보다 수월했다.

구체적으론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기 위해서 였다.

전체적인 구식의 냄새, 시간의 흐름이 요즘과는 사뭇 다를 시대의 사색이랄까.

어쩌면 전심전력을 다하는 그 시대의 의식의 흐름이 이전의 실패했던 독서에서와는 달리 조금 느껴졌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위대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 베니스에서의 죽음 중.


그러나 토니오 크뢰거는, 변치 않는 마음이란 이 지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과 환멸감에 가득 찬 채, 그 불 꺼진 제단 앞에 아직도 한동안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양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는 자기 갈 길을 갔다. - 34

그의 말을 빌리면,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의 유일한 생활 신조로 삼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차피 천상의 담당 감독으로부터 깊은 배려 없이 아무렇게나 상연되는 연극과도 같은 이 풍진 세상은 회의도, 주저도 없이 그저 마음껏 향락할 일이며, 그러고 나서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걸 그랬나?’하고 자문하면 된다는 것이다. - 189

그가 스스로 인정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탈출하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미지의 새로움을 동경하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면서 모든 짐을 덜고 모든 걸 망각하고자 하는 충동 - 그건 곧 작품에서, 경직되고 냉정하며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상의 작업장소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 423



2017.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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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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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여의 작품들을 모은 단편집.

특유의 알싸한 불편함과 체념, 그럼에도 존재하는 유머가 있는 글들.

오직 두 사람, 최은지와 박인수가 특히 좋았다.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매일 전단지를 돌린 것처럼, 남들이 보기엔 아무 희망도 없는 부부관계에서 그는 삶을 지탱할 최소한의 에너지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그에게 미라는 카라반의 낙타와도 같은 존재였다. 목표와 희망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말을 못해도 돼. 웃지 않아도 좋아. 그저 살아만 있어다오. 이 사막을 건널 때까지. 그래도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 끔찍한 모래지옥을 함께 지나가겠는가. - 71, 아이를 찾습니다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다. 팩트 따윈 모르겠다. 그냥 그들을 느낀다.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다. - 작가의 말 중.

2017. 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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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6
강상중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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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쉽게 소세키의 생애가 작품에 어떤 방식으로 녹아들었는지 설명하는 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3,4 권 정도 읽었는데 현암사 전집을 들이고 나니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읽어보았다.

매우 도움이 된다.

이미 읽은 작품의 이해도도 높아졌다.

2017. 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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