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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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 가운데,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을 딛고 선 엄마, 딸, 여자.

딸에 대한 이야기면서 엄마의 이야기, 고단한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 소수자의 이야기까지 많은 부분을 (깊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녹여냈다.

언뜻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직된 사고의 꼰대 엄마 같지만,

엄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엄마에 그 딸이네라는 따뜻한 웃음이 나기도 한다.

무엇 하나 손해 보지 않고 사는 일에 급급하기만 한 사람들 속에서

작은 나눔과 작은 연대를 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추천추천!!

즐거운 일드를 하나씩 잃어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말이다. - 8

그런 사람들이 다수라는 게 위로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내 딸이 그런 부류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매일 충격적이고 놀랍다. 그래서 매번 똑같은 강도의 실망감과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딸애는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불필요한 공부를 내가 너무 많이 시킨 걸지도 모른다. 배우고 배우다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워 버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계와 불화하는 법. - 32

내가 한 거라곤 연단이 올려다보이는 이곳에 앉아 남들이 엿들을지도 모를 말들을 가만히 손으로만 매만지면서 침묵을 키운 것뿐이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 할 수 없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 이제 나는 어떤 말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런 말을 도대체 누구에게 할 수 있을까. 누가 들어 주기나 할까. 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말. 주인이 없는 말들. - 54

나는 좋은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하려고 애써 왔다. 좋은 자식. 좋은 형제.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이웃. 그리고 오래전엔 좋은 선생님.
정말 힘들었겠구나.
나는 공감하는 사람.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나는 응원하는 사람.
다 이해한다. 이해하고말고.
나는 헤아리는 사람.
아니. 어쩌면 겁을 먹은 사람.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깊이 빠지려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입은 옷을, 내 몸을 더러히지 않으려는 사라. 나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표정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사람. 여전히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걸까. 그러나 지금 딸애에게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69

어쩌자고 이 여자는 이렇게 오래 살아 있는 걸까.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음 산이 나타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 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 싸움. 져야만 끝이 나는 싸움. - 91

그 말을 하는 동안 나는 젠이 아니라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라 딸애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세상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내 일이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나의 일이다. 이런 말이 내 안의 어딘가에 있었다는 게 놀랍다. 그런 말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죽을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니라, 마침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렇게 말이 되어 나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 131

나와 마주 않는 그 애들이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다. 손을 뻗으면 언제나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러나 나는 이 애들이 나로부터 얼마나 먼 곳에 어떤 모습으로, 어디를 딛고 서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뚜렷해진다. 이 애들은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니니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애 들은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 한 가운데에 살아 있다. 그곳에 서서 이 애들이 무엇을 보는지, 보려고 하는지, 보게 될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 149

2017. 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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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우르르 꿀꿀 문학과지성 시인선 502
장수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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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시의 신비로운 능력

회색 두부에
꼿꼿한 혀 한 장, 박혀 있다
부러진 커터 칼날처럼
혀 없는 고양이 ‘두시’는
푸른 베일을 쓴 채
한쪽 발로
초승달의 목을 밟고 있다, 파르르
파르르
달은 숨이 할딱거린다.
파랗게 점점 파랗게 미미한 파도처럼
살짝
살짝 치 떨던 달은
차갑게 식는다
모든 낭만의 밤은 끝났다
고양이의 작은 발 주먹 아래서
두시의 등 뒤로 가끔 해변이 열리고
닫히고
누군가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 없는 밤이 지속되었다
혀 없는 고양이 두시는
버려진 괘종시계에서
두 시를 물어뜯었다
아무도 모른다
두 시가 없는 시계
두 시가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끝나지 않는 라디오를
영원히 들으며
오래된 영화 음악 속에서
어쩌면 이 세계에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두 시의 연인
두 시의 오해
두 시의 자살
같은 것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두 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두시 속에서
지겹게 곰팡이를 피우며
착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갈
두 시의 파국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개들은 백색 숲 사이로 스며드는 불같은 노을과 길어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느끼며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 백색 숲의 골초들 중.

그래, 후배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어?
시 써요
시?
그래, 우리는 한때 다 시인이었지
아니 그런 시 말고요 - 여자 햄릿 중.

총 끝에서 피고 지는
꽃의 율동이라니
이 여름도 한칼에 가겠지
휘어지는 여름의 극점
네가 나를 쐈을 때
나는 죽지 않기로 했다 - 여름의 도큐멘타 중.

아름답고 처연하고 웃기고
말도 안 되는 모든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아무 몸짓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외로운 고기가 된다 - 돌이킬 수 없는 중.

2017. 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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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한 건강법 333 - 하루 5분 뇌부터 발가락까지 내 몸을 생각한다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유영미 옮김 / 로고폴리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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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노력을 들이지 못하면서 건강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을 덜어줄 심플한 건강법은

심플해서 새로운 것은 없었다.

유용? 한 몇가지.

1. 마음이 심란할 때는 물고기를 관찰하면 좋다.
2. 친구와 함께라면 피자는 건강에 좋다.
3. 코를 만지면 마음이 안정된다.
4. 건강하고 싶다면 고양이를 더 자주 쓰다듬으며 사랑해주자.
5. 발목으로 8자를 그리는 동작을 자주.

써놓고 보니 그냥 내가 마음에 든 말만 골라놓은것 같다.

읽고 나니 왜인지 ‘아.. 독일 사람...’이라는 생각도 조금 든다.

2017. 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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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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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계속 의심하고, 남성의 판단과 조언에 의존하게 되고, 스스로 인간관계와 활동범위를 줄이고, 답답하고 찜찜함 불편함을 겪으면서도 여성들은 그것이 타자에 의해 조정되는 단계인 것을 차마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조남주의 현남오빠에게에서는 이런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여성의 이야기가 편지 형식으로 담겨 있는데, 그녀가 한 발 한 발, 아니 한 마디 한 마디 보탤 때마다 어쩌면 통쾌한 기분까지 들게 된다는 것은,

나 자신도 이런 경험을 무척 여러번 겪어왔기 때문이다.

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한 경험, 애정을 빙자해 나는 가두려고 하고 제한했다는 점, 그렇게 나는 무능하고 소심한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점(p.38)이 정확하게 그러했다.


최은영의 당신의 평화에서는 딸에게 지워지는 가부장제의 등짐에 대해 얘기한다.

가족이라서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고들 말하지만, 여자로서 엄마를 이해하는 일, 여자라서 가족이 평온하게 유지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일, 선택지가 놓일 경우 나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딸의 입장 같은것... 그것들이 많이 생각났다.

김이설의 경년을 읽으면서 가해자의 입장에 놓인 아들을 키우는 엄마라는 상황이 주는 불편함을 마주했다. 실제로 주변의 많은 엄마들이 딸을 키우는 입장과 아들을 키우는 입장이라는 온전히 자신의 무엇 때문이 아닌 일로 마음을 쓰는 것을 봐왔기 때문에, 공감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듣고보게 된다. 이 지점에서 얼마전 페미니스트 선생님 논란(? 논란이라니.... 그것 조차 웃픈일이지만)도 자연스레 연결되고, 도저히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 아이들에게 어떤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하는지 생각한다.

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

최근 몇 년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작가들의 소설이 반갑다고 덧붙인다.
이런 기획 매우 지지 한다고도 덧붙인다.


여자로 사는 일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다고, 별일 아니라고, 원래 그렇다고 생각했던 일들에 대해 자주 의심합니다. 저는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결말을 믿지 않지만 또 절대 불가능한 결말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조남주, 작가의 말 중.

“자고 가기로 했잖아.” 유진의 아빠가 말했다. “엄마랑 좀 그만 싸워라. 설거지하는 게 뭐 그렇게 힘든 일이라고 여자들끼리 신경전 벌이고 그래. 서로서로 양보하고 그래야 가정이 평화롭지.”
“아...... 평화요.”
유진은 구두에 발을 꿰고 집을 나섰다. - 70. 당신의 평화 중.

딸아이를 품에 안고 있자니, 아들아이가 만난 여자애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도 생리를할 텐데, 걔들도 처음엔 무섭고 떨렸겠지. 누군가 그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괜찮다고, 너희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으면.
“엄마, 엄마도 울어? 왜 울어. 나 안울게, 울지 마.”
네가 여자여서, 세상의 온갖 부당함과 불편함을 이제 얼린 너와도 나눠 갖게 된 것이 서글프기 때문이라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 119. 김이설, 경년 중.


2017. 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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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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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단절과 머뭇거림이 스며들어, 잔잔하게 펼쳐지는 이야기.

나에게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잡았는지, 못본 채 했는지, 기겁을 하고 도망쳤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종수의 실패담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가 대체 뭔지 정말 모르겠다가도, 어떤 장면을 마주하면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가만히 있는 기쿠 박사님을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기쿠 박사님이 내게 말했다.
“종수, 인생은 길러, 정말이지 길어.”
나는 그게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 25

나를 대학원에서 ‘내쫓아낸’ 기쿠 박사님을 더이상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일은 여전히 내게 복잡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일 뿐이다.” - 27

그릭 문득,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지아 류가 떠올랐다. 그는 앞으로도 내 집 문을 두드릴까? 그가 그 문을 계속 두드린다 하더라도 이제 거기엔 내가 ‘없다’. 이제 이 세상에, 이 우주에, 내가 머무는 곳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이제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81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에 대한 글을 끊임없이 읽어댔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나 자신을 떨어뜨려놓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내게 닥친 문제들에 너무 무심하지도, 혹은 너무 애쓰지도 않을 수 있다고, 그러니까 마치 공중에 걸린 줄 한가운데에 언제까지고 균형을 잡으며 서 있을 수 있다고, 그런 착각 속에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면서. - 92

지아 류 말이에요. 있잖아요, 그 친구는 내가 학교에 안 나간 후부터 내 집 문을 두드렸어요. 노크 말이에요. 누군가 내 집 문을 노크해줬죠. 섀넌, 나는 그걸 계속 비웃었지만, 이제는 비웃는걸 그만해야 할까봐요. 섀넌, 이 세상의 누군가는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거예요. 그냥 잘 들으려고 노력만 하면 돼요. 그냥 당신은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 270

물론 나는 자주 실패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없을 때가 있다. 망원경이 고장났을까봐, 내가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서 그들 표정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어쩌면 소설가로 살아가는 내내 그런 걱정에 휩싸여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행복한 삶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저 나는 소박한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내가 ‘매우’ ‘멀리’ 존재하는 세계를, 그리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게 되기를. - 작가의 말 중.

2017. 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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