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 문학동네 시인선 99
안정옥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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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꼬집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
딱 꼬집어 아 이것이다라고 느껴지는 시.


어느 나무에게는 다른 나무의 가지를 잘라 눈접을 붙여 하나로 엉겨붙게도 만든다 그들이 왜 그래야 되는지를 나는 모르겠다 빨간 불빛에 잡혀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알맞은 이 비유,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 - 갈 수 없는 곳과 엉겨붙다 중.

어떤 시도 비밀을 빛나게 해주지는 못했다
있다가 사라지는 나처럼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문장들이 어디 있겠는가 조용히 나를 거쳐갔기에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을 어떤 은유로 그렇게 오래 그렇게 영원히 몰아붙일 수 있겠는가 - 비밀 중.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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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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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이야기.

나의 사랑하는 파시스트 선생님에 대한 회고랄까.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묘하게 꼬여있는 내면을 그를 사랑하고 동경하던 학생이 관찰, 서술하는 이야기다.

브로디 선생은 자신의 전성기에 집착하고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고픈 욕망을 선생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실현하려 한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선동적으로 차단하고(그 경험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스스로 판단해야 할 일), 사실 딱히 교묘하지도 않은 방법으로 교묘하게 아이들을 조종하는 문제의 캐릭터.

그래서 어쩌면 특정 인종이 우월하다는 주장, 인종 개량 같은 극도로 유해한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파시스트는 진 브로디 선생을 위한 맞춤한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더 진보적인 학교에 지원해야 한다는 거야. 내 수업 방식은 블레인보다 그런 학교에 적합하다면서. 하지만 내가 그런 허접한 학교에 지원할 일은 절대 없어. 난 이 교육 공장에 남을 거라고. 여기서 밀가루 반죽을 부풀릴 효모 역할을 해야지. 아직 말랑말랑한 나이의 소녀를 내게 주면, 그애는 영원히 내 것이 될 거야. - 13

영원히 내 것이 될거야... 라고 꿈을 꾸는 얼굴로 말하는 장면을 떠올리니 스릴러 분위기가 훅 끼쳐 오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현실이 전성기라고 자기 암시를 하는 브로디 선생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학생들과 아름다운 사제관계를 만들어가고, 아름답고 격정적인 연인이 있으며, 스스로 문학적으로 고양된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들이 하나씩 부서지는 과정.

붕괴의 과정이 아름다워서 이 이야기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존경과 확신, 선망의 마음에 스스로 균열을 내 성장한 학생들 개개인이 존재해서 (그들 개인의 성공과는 무관하게) 매력적인 이야기다.

그럼 로즈가 배신했을까?
브로디 선생의 징징대는 목소리 - ‘날 배신한게, 날 배신한 게......’- 그 소리가 샌디는 거슬리고 짜증스러웠다. 이 성가신 여자를 배신한게 벌써 칠년 전 일이군. 샌디는 생각했다. 브로디 선생은 뭘 ‘배신’이라 얘기하는 걸까? 샌디는 다른 사람의 비판에 바위처럼 무심했던, 배신 따윈 당할 수 없던 과거의 브로디 선생을 찾기라도 하듯 창밖의 언덕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 80

이렇게 우회적인 방식으로 샌디는 브로디 선생이 그런 인물이 된 이유,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다른 독신 여성들처럼 술독에 빠지는 대신 이국적이고 자기파괴적인 도취에 빠짐으로써 그토록 특이하게 스스로를 고양시키게 된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 144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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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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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로 판정되버린 첫 남편 브라이언, 미성숙하고 불결한 지휘자 찰리, 정신과 의사 두번째 남편 베넷, 어느날 욕망의 대상이 되는 맨스플레이너 에이드리언.

한 여자의 사랑의 궤적을 따라 가다 보면, 이 여자는 어쩔 수 없는 사랑 지상주의자 처럼 보인다.
상대방의 자아를 북돋워주는 역할에 몰두하다 문득 돌아보면 ‘아, 나는 사회복지사인가’ 싶은 한숨을 쉬게 되는 사랑중독자.
나를 지우고 사랑에 헌신하는 일이 더 이상 유용한 무엇이 아니라는 걸 깨닫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원점이 되고 마는 사람.

하지만 우습게도 사랑에 목매는 주인공 이사도라는 냉소가 가득한 사람이다. 사랑에 열렬히 빠져든 순간 조차 매력적인 냉소가 빛나는 지성을 가진 사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심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도발적으로 세상의 시선에 고개를 쳐들어도, 결국 그 자신의 내면의 변화 이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고뇌하는 여자.

이 자전적 소설이 1970년대에 발표되었고, 소설의 배경은 50년대이다.

프로이트를 대놓고 비웃지만 프로이트상을 받았다는 점은 전후라는 그 시대의 전복적 시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망덩어리 화자가 말하는, 결혼, 임신과 출산이라는 것, 다채로운 인종들과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유대인 이라는 정체성의 전복같은 것 말이다.
얼핏 콩가루 집안 처럼 보이는 이사도라의 가족들의 존재가 그녀의 정신적이고 학문적인 자양분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에이드리언과 유랑하는 생활을( 그의 표현을 빌면 분노의 포도의 유랑민처럼) 하면서 툭하면 그들이 길을 잃는 설정은 맹목에 대해 에둘러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회상과 현재를 반복하고, 갈팡질팡하고 목적지 없이 흘러가는 듯한 이야기는 결국 “여성”이라는 단어를 남기는 모래글자놀이 같다.


나는 결혼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결혼의 의미를 믿었다. 적개심으로 불타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한 명의 단짝 친구 정도는 둘 필요가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저버리지 않을 한 사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저버리지 않을 한 사람. 그러나 결혼 생활이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고개드는 이 갈망은 어쩌란 말인가? - 27

나는 나 자신의 배신을 경멸하고 나 자신을 경멸한다. 나는 이미 주정을 저질렀고 단시 소심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뿐이다. 덕분에 나는 부정한 여자이자 소심한 여자가 되었다. 만약 에이드리언과 실제로 섹스를 했다면 부정한 여자로 끝났을 것을. - 76

문제는 결혼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가 아니라, ‘언제 한번이라도 옳았던가?’이다. - 153

그러나 누가 억압되었는가? 피아와 나는 ‘자유로운 여성’이었다.(따옴표가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다.) 피아는 화가였고 나는 작가였다. 우리 삶에는 남자 외에도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에겐 일이 있었고 여행이 있었고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 삶은 남자를 향해 부르는 서글픈 노래의 연속이어야 하는가? 왜 우리 삶은 남자 사냥으로 전락했는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여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전전하지 않는 여자, 남자가 있건 없건 완전함을 느끼는 여자는 어디에 있는가? 왜 매번 미덥지 않은 남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가? 보라. 시몬 드 보부아르조차 ‘사르트르는 어떻게 생각할까’를 항상 염두에 두지 않았던가? 릴리언 헬먼은 대시엘 해밋이 그녀를 사랑해주기를 원했기에 남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리고 도리스 레싱의 <황금 노트>의 여자 주인공 애나 울프는 지극히 드문 경우지만 사랑에 빠져 있지 않으면 극치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 외의 여성 작가들, 여성 화가들 대부분은 수줍었고 위축되었으며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삶에 있어서는 소심했고 오직 예술 세계에서만 대범했다. 에밀리 디킨슨이 그랬고 브론테 자매가 그랬으며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고 카슨 매컬러스가 그랬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공작새를 키우며 엄마와 살았다. 실비아 플라스는 오븐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서 전설이 되었다. 조지아 오키프 만이 사막에 홀로 남았고 진정한 생존자였다. 참으로 대단한 집단 아닌가. 그들은 자신에게 혹독했고 자살했으며 기이했다. 여성 초서는 어디에 있었던가? 음액과 기쁨과 사랑과 재능을 모두 지닌 열정적인 여자는 정녕 한 명도 없는가? 누구를 본보기 삼아야 하는가? 풍성하게 머리를 부풀린 콜레트?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사포? ‘나는 굶주리고 또한 갈망한다’라고. 내가 어설프게 번역한 문장 속에서 그녀가 말한다. 우리가 숭배하는 모든 여성들은 노처녀이거나 자살했다. 과연 그게 우리가 가야할 길인가? - 192

그래서 나는 남자에게서 여자를 배웠다. 나는 남성 작가의 눈으로 여성을 보았다. 물론 나는 그들을 남성 작가들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을 작가로, 권위자로, 신처럼 모든 걸 알고 있는자,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다. 당연히 나는 그들이 말하는 모든 걸 믿었다. 비록 그게 나의 열등함을 의미할지라도. - 293

다른 사람은 결코 나를 완성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완성할 힘이 없을 때, 사랑을 찾는 건 자살행위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 희생이 곧 사랑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 553

19세기 소설은 결혼으로 끝난다. 20세기 소설은 이혼으로 끝난다. 그 외에 다른 결말도 가능할까? 나는 고지식한 나 자신을 비웃었다. - 569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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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문제소설 - 현대 문학교수 350명이 뽑은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 / 푸른사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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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의 올해의 문제? 소설.

이 중 이미 반은 읽은 작품이었다.

한국현대소설학회라는 단체가 있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고,

무엇보다 올해의 문제 소설을 선정하고 엮어내기 전에

이 책의 디자인과 타이틀은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했다.

좀 후졌...고, 일단 만듦새라는 것이 좀 그렇다.

여전히 좋았던 작품은 좋았다. 난 진짜 요즘 한국문학 좋아하는 것 같음...

멀리 보이는 첨성대를 등대 삼아 그 길을 걷노라면, 들판에 내려앉은 어스름 너머로 황남동 인가의 불빛들이 나지막이 반짝이는 것이 보입니다. 그쪽을 바라보며 계속 걸어가면 빈 들판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멀고 가까운 무덤들이 서로 겹쳐졌다 멀어지지요. 그 풍경을 바라보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달은 천 년 전의 달과 똑같은데, 사람은 한번 헤어지고 나면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렇게 걸어가는 발걸음에 따라 서로 겹쳐졌다 멀어지는 무덤들을 바라보며 어스름 속을 걷는데, 시원한 저녁 바람에 기분이 좋아져 하하하 호호호 서로 농담하고 웃는 관광객들 중에 내가 우는 걸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좋았다는 거예요, 내 말은. 아무도 내가 우는 줄을 몰라서. 여러분들도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우셔도 됩니다. -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김연수

망각했으므로 세월이 가도 무엇 하나 구하지 못했구나. - 몰 : mall :沒 , 임성순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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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계속해주세요 - 한일 젊은 문화인이 만나다
문소리 외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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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문화인의 대담집.

소설가와 건축가와 배우와 감독과 사진작가, 연출가, 일러스트작가 들이 각자의 나라에서 한번씩 두번의 대담을 나눈다.

기본적으로 둘 사이의 대화이지만, 관객을 염두에 둔 것이니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 않다.

소설가의 대담이 특히 관심있는 부분이었고, 좋아하는 작가의 일면을 알게 되어 좋았다.

그나저나 김중혁 작가 인터뷰 스킬이 상당하다고 느껴졌다.

역시 방송을 많이 해야... 인지도:)

밑의 글은 언제고 한번 써먹어 볼까 하는 생활의 지혜. ㅋㅋㅋ

저한테는 아주 긴장될 때 하는 마인드컨트롤이 있는데, 머릿속으로 ‘나는 금동반가사유상이다. 금속이다, 배고 안 아프고 땀도 안나고 아무 생각 없이 평온한 금동반가사유상이다’하고 중얼거려요. 혹시나 사람들 앞에 설 때 많이 긴장하시는 분들이 있을까 싶어 말씀드려요. - 정세랑. 217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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