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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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모두 악의는 없고, 그나마의 악의라면 모두 과거의 일에 묻혀 있는 나름의 평온한 상태의 사람들이 등장해서 뭔가 다시 시작하는 움직임이 보이는 이야기다.

오랫만이라 그래 요시모토 바나나가 있었지 하는 마음으로 책을 들었고,
아 이런 점은 역시 요시모토 바나나였지 하는 마음이 들다가,
풋... 이런 나이브함도 요시모토 바나나였어. 하는 감상으로 끝난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팔에 힘이 없어 더는 안을 수 없을 때까지 미치루를 안아 주고 미치루의 조그만 볼에 뽀뽀를 했다. 그 우람하던 몸은 야위었지만, 미치루의 조그만 손을 그 큰 손으로 언제나 꼭 쥐고 있었다. 사람의 손이 사람의 손을 그렇게 꼭 감싸 쥐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가장 부드러운 것을 소중하게 옮기는 듯한 그런 몸짓을 그는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미치루에게 해 주었다. - 28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은 역시 마음 한 구석이 갑자기 찌르르하는 울림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이런 울림은 개인적 체험과 연계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미용실에서 머리에 뭔가를 잔뜩 덕지덕지 발라놓은 상태에서 이런 문장에 가닿게 되어 괜히 눈을 깜빡거리게 된다던지... 뭐 그런 울림.

그러나 비정형이지만 행복한 가족을 구성하고 사는 주인공과, 애초에 그 가족구성이 죽어가는 지인의 소원이었다는 점과, 알고보니 살고 있는 집이 전 남친의 집이라던가. 재회를 하고나니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진다던가....

나열하고 보니, ‘인생은 아름답구나, 삶은 소중해요’ 같은 느낌의 순진무구함은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오는 작가 특유의 지문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읽지 않았었지... 라는 생각이 문득 들고.

그런데 제목인 서커스 나이트는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가? 내가 놓친 거겠지?

별거 아닌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일상이야말로 멋진 것, 평범함이야말로 존엄한 것,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특별한 하루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확고하게 쌓아 올린 토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 273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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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록 범우문고 109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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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요즘의 산문들과는 정조가 다른 글이다.

차분한 마음을 끌어오는 고즈넉함이 있는.

딱히 어떤 주제 없이 신변을 돌아보기도하고,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작가의 발길대로 소소하고 깊이있는 사색들이 담겨있다.

고유명사와 그외 여러 단어들의 옛적의 표현을 읽으면 심장도 그만큼 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만주 기행 중 언급되는 동선당이라는 곳이 궁금해서 여기저기 찾아보았는데, 구휼기구였다 정도 외의 어떤 정보도 쉽지 않았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라지만, 사각지대랄까 다양성이랄까, 정보에도 그런 것이 분명 있다는 생각을 또 한번 한다.

어디든 일상을 벗어나 자연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챙겨 들고 가 찬찬히 읽어도 좋을 글이다.

노인더러 바다를 보았느냐 물으니 못 보고 늙었노라 하였다. 자기만 아니라 그 동리 사람들은 거의 다 못보았고 못 본 채 죽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한 소년이 바다가 뭐냐고 물었다. 바다는 물이 많이 고여서, 아주 한없이 많이 고여서 하늘과 물이 맞닾은데라고 하였더니 그 소년은 눈이 뚱그래지며 “바다? 바다!”하고 그윽이 눈을 감았다. 그 소년의 감은 눈은 세상에서 넓고 크기로 제일 가는 것을 상상해보는 듯하였다. - 32, 바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은 보온만을 위한 세기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든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 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 69, 책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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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을 채워라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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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온다!

라고 해서 좀비물인가... 했는데, 그보다는 좀 삶에 천착하는 이야기였다.

스릴이나 서스펜스 이런거 영에 가까운 평범한 가장의 자기 반성이라고 해야하나.

여러 얼굴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한 ‘분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이미 전작에서 많이 나온 이야기인데,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작가가 그 개념에 너무 심취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데쓰오는 자신을 살해했다고 믿는(죽음의 순간들이 기억이 안나기 때문에) 사에키라는 직장동료의 흔적을 추적하지만 질문에 다가갈수록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흐려진다. 사에키라는 악마적 캐릭터가 가교역할을 하지만, 결국 끊임없이 나에게 되묻는 사색의 과정.

술술 읽히고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많은 이야기지만, 심심하다 라는 느낌이 남았다.

누구도 인간의 고뇌할 권리를 부정할 순 없어요. 그건 잔혹한 일입니다. 우리는 늘 치유를 너무 서두르고, 자기가 사는 세계를 증오에서 지켜내는 데 필사적이라, 타자의 고뇌에 대한 존중을 잊기 쉽습니다. - 353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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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6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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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순으로 국내 출간된게 아니라서 앞 뒤로 왔다갔다 읽게 되었지만, 이제 시리즈는 한권 빼곤 다 읽은 시점이 되었다.

유능하지만 골칫거리인 형사 해리가 철이드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 리디머.
아무래도 알게 모르게 챙겨주던 상사 묄레르의 은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튼 그런 와중에 연쇄 살인마는 등장하고, 수사는 난항을 걷고, 그러다 짜잔 하고 해결되는 뻔한 구조지만, 시리즈물을 읽다보면 생기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가족애가 부족한 부분을 메꿔준다.

인생의 도덕적 역설, 바람만으로는 부족한 어떤 순간들,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허술한 문명이라는 기반... 시종일관 염세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지만 결국은 뭐 정의가 이기는 이야기라 다행이랄까.

그나저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해리를 떠나가고 있다는게 참 현실적이어서 처량하다.

당신이 뭘 믿는지 말해주세요, 해리.
다음 약속을 믿습니다. 몸을 돌려 실눈으로 한가한 일요일 아침의 대로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비록 지난번 약속은 지키지 못했어도 다음 약속은 지킬 수 있습니다. 난 새로운 시작을 믿습니다. 이런 말은 한 적이 없지만...... 그는 푸른 등을 달고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게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 450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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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페미니즘×민주주의
정희진 외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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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방점이 찍힌 이야기.
한겨레에서 주최한 강연을 글로 엮은 책이다.

젠더 권력, 한국 남성, 대중문화, 정치, 민주주의안의 여성, 혐오에 대한 8개의 강연이다.

좋은 내용의 이야기지만, 다양한 청중을 고려하는 강연이어서 일까, 강도, 심도가 얕다고 느껴진다. 스피치라는 것은 아무래도 현장성이 중요하니 더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라는 방점도 급변하는 여성운동의 흐름에 비춰보면 조금 올드하다고 여길만한 지점들이 곳곳에 있다.

그래도 사 읽는다. 왠지 모를 의무감이 들어서.


한국사회에서, 아니, 모든 가부장제 사회에서, 젠더 문제와 관련해 가장 흔히 하는 말은 아마도 “사소하다”가 아닐까 합니다. ‘여성이 억압받고 있다/아니다’ 이런 이야기보다, 여성이 성차별의 피해자든 ‘여성 상위 시대’든 간에 어쨌든 ‘여성’만 들어가면 ‘사소하다’, ‘개인적인 문제다’, ‘집안일이다’ 등등의 담론이 대세를 이루죠. - 16, 정희진

페미니즘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 중 하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The personal is the political”죠. 이 말이 뭐냐면 남성에게는 퍼스널한 문제가 여성의 입장에서는 폴리티컬하다는 거예요. 여성에게는 공적 영역도, 사적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영역도 모두 정치의 장입니다. - 24, 정희진

이 세상의 모든 범죄 중 피해자를 욕하는 범죄는 드뭅니다. 심지어 보이스피싱도 피해자를 욕하지 않아요. 그런데 성범죄는 피해자를 욕하는 거의 유일한 범죄입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네가 끝까지 저항했으면 성폭력은 불가능했을것이다’, ‘네가 만만해서 그랬을 것이다’라고 성범죄 피해자들 탓을 합니다. - 37, 서민

작가들은 여성인물뿐만 아니라 남성인물에게도 어떤 결함과 장애를 줍니다. 그런데 제가 남성인물에게 문제를 발생시켰을 때는 거기 부딪히고, 해결을 시도하고, 문제를 극복하거나 좌절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자 작품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성인물에게 주어진 상황은 그저 전시되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죠. 제 무의식적 우선순위가 들통났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식이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작가들은 이런 불평을 하기 쉬워요. “이야기 안에서는 살인도 하고, 전쟁도 일어나는데, 여성혐오는 왜 안 돼?” 판단 착오입니다. 작가가 작품 안에서 세계의 문제를 드러낼 때는 보통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를 모형으로 만들면서 일종의 ‘문제적’ 대상화를 하지요. 문제의식이 있는 작가들은 거기서 작업을 끝내지 않습니다. 대상화된 인물들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싸우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게 바로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이 완결되면 작가의 의도대로 이 세계가 작품 안에 ‘투사’ 된 것입니다. 여성혐오라고 비판받는 영화는 세계의 문제를 투사하는 게 아니라 재생산하는 데서 멈춥니다. 단지 여성이 두들겨맞는 장면이 영화에 나왔다고 ‘여성혐오’라고 말하는 여성관객은 없습니다. 그건 관객의 수준을 무시하는 거예요. 관객들은 맥락을 본능적으로 구분해냅니다. 영화가 여성인물이 당면한 문제를 전시하고 지나가는지, 아니면 작가의 문제의식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중인지. (중략) 여성이 치명적 위협으로 느끼는 상황이 작가적 고민이 느껴지기는 커녕 ‘툭’하고 장면으로 떨어진 채 지나간다면 관객들은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창작자가 그 상황에 윤리적으로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무의식적인 가치의 우선순위가 반영이 된 거예요. - 72, 손아람

박찬욱 감독은 이에 대해 좀 반성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아가씨>(2016) 개봉 즈음에 JTBC <뉴스룸>에 나와 “<올드보이>(2003)를 찍었을 때 강혜정이 연기한 여성캐릭터만 진실에서 소외된 상태로 남겨놓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걸 해결하려는 것이 <친절한 금자씨>(2005)나 <박쥐>(2009), <스토커>(2013)로 이어지는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아가씨>는 박찬욱 자신이 큰 영향력을 행사한 감독으로서 일정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 ‘한남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어떤 반성문과도 같은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 193, 손희정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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