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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신랄하고 쓸쓸한 단편들.
1960년대의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이지만,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여전히 존재하는 감정과 현상에 대해 이야기 했기 때문일것이다.
사랑도 가정도 여성의 문제들도 여전하기 때문에.
11편의 단편들에서 느껴지는 분열적 특징들은 여과없는 신랄함을 보여주고 그러므로 씁쓸하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목격자>, <19호실로 가다>가 특히 좋았다.
특히 온전한 자기로서의 완성이 요원했던 수전의 이야기인 19호실로 가다는 강렬하다.
경력이 단절되는 여성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보다는 좀 더 본질적으로 고독할 권리가 있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가 강압적으로 그녀를 전업주부의 삶으로 밀어넣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정된 성역할로서의 엄마, 아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쓰임이 다하면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 60년대 유럽에서 관념화 된 여성의 사회적 지위 이 모든 것들이 그녀를 강박과 집착에 몰아넣어 한 인간이 무너지는 과정이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전개 된다.
충분한 사랑과 이해로 가정을 꾸렸으나 결국 점점 핀트가 맞지않는 부부의 모습은 소설 속 과장도 축소도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이 타인을 이해할수 있는가의 문제는 남겨두고라도.
읽으면서는 한줄 한줄 덧붙일 생각들이 넘쳐났었는데, 막상 리뷰를 쓰려니 무수한 생각들에 오히려 피곤해져서 말을 줄여야 겠다.
언젠고 다시 글을 남기고 싶은 책.
수전은 결혼하지 않은 스물여덟 살 때의 모습과 쉰 살 언저리에 다시 꽃피울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2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뿌리로 삼아 꽃을 피울 것이다. 수전의 본질이 일시정지 상태로 차가운 창고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매슈도 어느 날 밤 수전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수전은 맞는 말이라고,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수전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그녀도 알 수 없었다. 표현이 우스꽝스러운 것 같았고, 그녀도 이렇다 할 느낌이 없었다. - 288
수전은 하루 동안의 ‘자유’를 되돌아보았다. 외로운 미스 타운센드와는 친구가 되었고, 파크스 부인은 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수전은 정말로 혼자가 되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의 황홀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전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앞으로 그런 고독한 시간을 더 자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절대적인 고독, 아무도 그녀를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는 고독이 필요했다. - 306
2018. jul.
문득 그레이엄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큰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대에서 벗어나 음침한 통로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분장실로 통하는 통로였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미숙하고 타협을 모르고멋지고 자기중심적이던 스무 살 때 모습과 지금 자신의 모습이얼마나 다른지 실감이 났다. 저기서 함께 일하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논쟁하는 사람들. 그래, 그는 저런 분위기를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의 작업을 공평하게 존중하는 마음, 자신과 서로에 대한 자신감으로 한데 묶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로뭉쳐서 세상과 맞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세상을 경멸하고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을 가늠하고 이해하며 죽을 때까지싸우려고 했다. 자신들의 신념과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그가 그런 소속감을 느낀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는 또한 방금 자신이 바버라 콜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있는 모습을 보았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냉소적으로 늙어버린 눈꺼풀에서 눈물이 말라가던 그 순간, 그는 바버라 콜스와 자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그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오로지 이 결심을 위한 의지로 불타오르며 문을 통과해 다시 무대로 나갔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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