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사를 바로 아세요 민음의 시 246
정지우 지음 / 민음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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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를 바로 아세요 - 정지우

열차가 지나가자 나는 움찔 뒤로 물러선다. 분명 몇 사람이 열고 들어간, 그림 밖으로 머리카락이 날리는 역을 지난다. 이동과 소멸은 후미에 있다는 듯 선로 맨 끝에 누워 있는 세상을 향해 바람이 분다. - 9와 4분의 3 승강장 중.

바깥의 소란을 지워야 안이 보이고,
안이 견고해야 보이는 출구를
우리 내부에 건설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잃어버린 처음은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 - 대피하는 요령 중.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가락 사이에 걸린 달. 수억 년 밤을 거울에 비춰 낮을 살아가듯 서로를 찢고 들어가야 비로소 나올 수 있다. 난생처음 밤을 보는 낮의 얼굴로 너를 본다. 마음은 숨길 때 아프다. 서로의 눈 속으로 속절없이 사라진 빛은 동굴을 비추며 타들어 간다. 먼 얼굴은 내 얼굴의 뒷면. 한낮의 그늘이 깊어, 구덩이 속에 묻힌 달을 찾지 않을 그림자를 다시 주워 입는다. - 월식 중.

그것만 있었으면 했는데
그것만 없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 너는 없니? 중.

맛을 알고 있는 사람
그는 보존될 위험에 처해 있는 혀를 갖고 있었다. 기밀문서를 암호로 기억하는 사람. 녹아내리지 않은 사건을 지나왔다. 밤이면 돌덩이처럼 굳어 버린 입술을 열고 싶은 충동이 심연을 두드리며 곤두박질쳤다. 한때 지붕에서 흘러내린 달콤하고 가파른 비밀을 유일하게 맛본 이후,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었다. 하늘까지 자라난 머리를 열면 수천 가지 혀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 초콜릿 계급 중.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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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정체가 뭔데. 레이먼드 카버가 지은이도 옮긴이도 아닌거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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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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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하고 쓸쓸한 단편들.

1960년대의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이지만,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여전히 존재하는 감정과 현상에 대해 이야기 했기 때문일것이다. 

사랑도 가정도 여성의 문제들도 여전하기 때문에.

11편의 단편들에서 느껴지는 분열적 특징들은 여과없는 신랄함을 보여주고 그러므로 씁쓸하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목격자>, <19호실로 가다>가 특히 좋았다.

특히 온전한 자기로서의 완성이 요원했던 수전의 이야기인 19호실로 가다는 강렬하다.

경력이 단절되는 여성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보다는 좀 더 본질적으로 고독할 권리가 있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가 강압적으로 그녀를 전업주부의 삶으로 밀어넣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정된 성역할로서의 엄마, 아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쓰임이 다하면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 60년대 유럽에서 관념화 된 여성의 사회적 지위 이 모든 것들이 그녀를 강박과 집착에 몰아넣어 한 인간이 무너지는 과정이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전개 된다.
충분한 사랑과 이해로 가정을 꾸렸으나 결국 점점 핀트가 맞지않는 부부의 모습은 소설 속 과장도 축소도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이 타인을 이해할수 있는가의 문제는 남겨두고라도.

읽으면서는 한줄 한줄 덧붙일 생각들이 넘쳐났었는데, 막상 리뷰를 쓰려니 무수한 생각들에 오히려 피곤해져서 말을 줄여야 겠다.

언젠고 다시 글을 남기고 싶은 책.


수전은 결혼하지 않은 스물여덟 살 때의 모습과 쉰 살 언저리에 다시 꽃피울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2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뿌리로 삼아 꽃을 피울 것이다. 수전의 본질이 일시정지 상태로 차가운 창고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매슈도 어느 날 밤 수전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수전은 맞는 말이라고,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수전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그녀도 알 수 없었다. 표현이 우스꽝스러운 것 같았고, 그녀도 이렇다 할 느낌이 없었다. - 288

수전은 하루 동안의 ‘자유’를 되돌아보았다. 외로운 미스 타운센드와는 친구가 되었고, 파크스 부인은 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수전은 정말로 혼자가 되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의 황홀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전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앞으로 그런 고독한 시간을 더 자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절대적인 고독, 아무도 그녀를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는 고독이 필요했다. - 306

2018. jul.

문득 그레이엄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큰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대에서 벗어나 음침한 통로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분장실로 통하는 통로였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미숙하고 타협을 모르고멋지고 자기중심적이던 스무 살 때 모습과 지금 자신의 모습이얼마나 다른지 실감이 났다. 저기서 함께 일하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논쟁하는 사람들. 그래, 그는 저런 분위기를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의 작업을 공평하게 존중하는 마음, 자신과 서로에 대한 자신감으로 한데 묶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로뭉쳐서 세상과 맞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세상을 경멸하고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을 가늠하고 이해하며 죽을 때까지싸우려고 했다. 자신들의 신념과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그가 그런 소속감을 느낀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는 또한 방금 자신이 바버라 콜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있는 모습을 보았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냉소적으로 늙어버린 눈꺼풀에서 눈물이 말라가던 그 순간, 그는 바버라 콜스와 자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그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오로지 이 결심을 위한 의지로 불타오르며 문을 통과해 다시 무대로 나갔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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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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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는 타이밍이 필요하다.

세계 각지, 국내 곳곳을 돌아다닌 저자의 이야기가 즐거울 때 읽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한 곳에 묶여 있으나 자유롭지 못하다 생각되지 않고, 어중간하게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슬쩍 비출때 아마 좋을지도.

김연수 작가가 여행지에서 문구점을 좋아하는 성향은 매우 반갑게 다가온다. 객지의 물건 중 별거 아니면서 매우 별것인 무언가를 나도 무척 좋아하기 때문.
모든 삶을 다 살 수 없으니 나는 연필을 사겠다. 라는 문장이 이심전심이었달까.


국경 쪽으로 세차게 부는 바람 속으로 날아가던 모자처럼 여행지에 내가 남겨 두고 온 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 갖가지 잃어버린 물건부터 보지 못하고 온 것과 사지 못하고 온 것에 이르기까지. 그럴 때마다 그랬던 것 같다. 차를 돌릴 수 없으니 마음을 달랠 수밖에, 라고. 밤의 알람브라가 내게 가르쳐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 여행이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고. 그러고 보면 여행을 통해 나는 비정함을 익혔다. 눈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토록 찬탄하던 곳과 작별하는 법을 알게 됐으니까. 이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 31

대개의 경우 내게 독서는 12시간 동안의 비행과 같은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는 좋은 취미 생활이지만, 때로는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자유는 남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더 많은 사람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는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 75

조직은 인간을 난쟁이로 만든다는 것, 고독은 우리의 성장판이라는 것,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해야 할 일을 할 때 인간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는 것. 비록 나는 안중근의 손가락은 찾지 못했지만, 그의 여정이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141

작가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여행과 마찬가지로 인생 역시 사진보다는 기억에 의존하는 게 더 좋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좋은 시절, 나쁜 시절이 있엇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시절이 이제 모두 지나갔다는 사실도. 그래서 누군가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우선 나빴던 시절을 떠올리고 그 시절이 모두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그다음에는 좋았던 시절에 대해 말하리라. - 235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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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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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야말로 하드보일드.

불친절한듯 툭툭 던져지듯 알려주는 조각의 인생이 어찌나 스산하고 건조한지.

흔치않은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읽기 시작했고, 캐릭터의 힘 못지않은 쫀쫀한 서사가 끝까지 재미를 끌어내는 이야기다.

방역의 부정적 결과로 생이 망가진 투우가 집요한 복수를 하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조각의 삶에 대한 경의를 보내는 듯도 하고, 결과에 따라서는 자신의 마지막을 완성해줄 동류의 인간에 대한 인정이 담겨있다. 또 그녀가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장치하는 무용의 존재가 오히려 조각의 쓸쓸하고 비정한 생을 부각시킨다.
그런 지점들이 무척 마초적인데 그 중심에 노년의 여성이 자연스럽게 안착한 것을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통쾌한 일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조각의 자리에 위치한 남성 캐릭터들에 익숙해지고 있었고 그 통념에 지루해지고 있었기 때문이겠다.

어디선가 파과를 영상화한다면 조각의 역할에 배우 예수정님이면 어떨까 하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이어서인지 내내 그 배우의 얼굴을 한 조각을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무척 어울리면서도 상상력엔 제약이 따르는 과정이었으나 만족스러웠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과 그 변용이었다. - 128

자신이 류를 바로 따라가는 것과 가능한 한 늦게 따라가는 것 가운데 어느쪽이 류가 바라는 일일까를 한동안 고민하다가, 둘 중 그 무엇도 류가 자신에게 바라는 건 없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류의 유지를 받들어, 같은 생각은 해본 적 없었고 애당초 유지라는 게 있지도 않았으며 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 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 264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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