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자국 소설의 첫 만남 10
김애란 지음, 정수지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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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침이 고인다’에 실렸던 글이 일러스트를 더해 작은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미 읽은 글인데 왜인지 천천히 되새기게 되는 것은 김애란 작가의 단아한 문장들 덕이다.

‘안일하고 긍정적인’ 아버지를 대신해 국숫집 맛나당을 꾸려나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이 억척과 생명력과 그리움과 애틋함으로 그려져 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배곯아 본 적 없는 주인공의 유년의 기억은 온전히 어머니의 칼질에서 마술처럼 태어나는 음식에 빚져있다. 그 칼자국이 온 몸 , 온 내장에 아로새겨져 한 인간을 무럭무럭 자라나게 하는 것. 그런 충만함이 단어 하나하나에 포개졌다.

새삼 머리카락 끝까지 폭신폭신한 좋은 기운을 폭 뒤집어 쓴 기분이 되었다.

어머니는 순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는 다시 카트를 밀고 주위를 헤맸다. 어머니는 초보 운전자처럼 다른 카트에 치이고 밀리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얼마 후 주방용품 코너에 섰을 때, 부엌칼을 어떤 걸로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내게, 어머니는 독일제 칼 하나를 불쑥 내밀며 “이걸로 해라”라고 말했다. 내가 칼을 쥐고 갸웃거리자 어머니는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내가 칼 볼 줄 안다.” - 34

2018.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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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와 로라 민음의 시 249
심지아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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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잘 도착했습니다
‘잘’ 이라는 부사가 생략하는 것들과 함께 - 작가의 말

새벽 무렵 눈을 뜨면 잠긴 건물들 사소하고 쓸쓸해 지평선은 사라지면서 나타나고 우리는 걷는다 마땅한 인사를 건네지만 우리가 말아 쥐고 있는 것은 목화솜 이불,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는 유일하게 싫증 나지 않아 - 모든 침대는 일인용이다 중

12월이 죽었다
잠에서 깨어 그것을 들었다
풀이 가늘게 자랐다
슬픔은 더 얇아질 수 없어서
그림자로 남았다
더 얇아질 수 없는 옷을
걸친 물체들이
12월을 지나고 있다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고 있다 - 물체들의 밤 전문

2018.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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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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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들어본 듯한 ‘대구 희망원’, ‘전주 봉침 여목사’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낸 소설.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편이 아닌데도, 종교와 연루되어 있는 경우 혐오감 탓일까 더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마 그래서 자세한 사건 개요등은 알고 있지 못했었나 보다.

공지영 작가가 언급하듯 날것, 정글 같은 느낌, 그것들의 아주 부정적인 부분들이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그려진다.

어쩌다 보니 말끝에 ‘상식’이라는 단어를 자주 붙이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어떤 팬덤과 관련된 부정적 이미지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권력과 그 권력이 만드는 부조리, 그런 것들이 너무 뻔한데 뻔하면 안되는 방식으로 현실에 반영되어 있는 것... 으... 읽는 내내 속이 답답하고 불쾌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공지영 작가. 불의라고 생각하는 것에 거침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그녀의 모든 행보에 수긍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정의로운 어떤 것을 갈망하는 목소리에는 힘을 보태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을 사고, 열심히 읽었다.

신부하고 싸워서 이긴 평신도는 한 사람도 없어. 그들은 한 사람이 아니야, 그들은 그 전체야. - 121

원래 세상은 이렇다, 는 말은 무섭다. 어떤 노력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이란 말도 무섭다.
결국 가진 자가 더 큰소리를 치며, 부당한 권력이 부정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세상이 당연하단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잔혹한 시대에 신앙이란 무엇인가. - 198

나는 마르크스의 말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종교는 번민하는 자의 한숨이며 인정 없는 세계의 심장인 동시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그것은 민중의 아편......’ 너무나 정확했어요. 적당히 쓰면 고통을 덜어주고 사람을 쉬게 하면서 스스로 가진 저항력을 북돋아주지요. 그러나 그것에 빠지면 그땐...... 중독자가 되는 거지요. - 254

2018.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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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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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심층 인터뷰집이라고 하니 안 읽을 이유가 없었다.

주로 작업스타일에 관한 이야기들이고, 한 세대 차이가 나는 인터뷰어 가와카미 미에코의 성실한 선행학습?이 깊이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냈다.

하루키는 여전히 사오십대 아저씨 같은 느낌이 있어서 새삼 나이를 확인하게 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곤 하는데, 아무래도 러너의 이미지가 그를 젊게 기억하게 만드는게 아닐까. 인터뷰 중 도스토옙스키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는 부분에서 놀라긴 했다.

시종일관 진지하게 진행되지만, 인터뷰어의 고난도(작품분석)질문에 내가 그렇게 썼냐?고 되묻는 일이 종종 있어 웃음포인트가 되었다. 쓰고 잊는다는 주의인데, 전작에 집착하는 스타일보다는 훨씬 쿨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충분한 시간을 들인 여러번의 인터뷰여서 작품속 여성관에 대한 이야기도 진지한 무엇인가를 기대했었는데, ‘제가 그쪽은 잘 몰라서, 뭔가 부적절했다면 미안합니다만....’이라는 태도는 역시 어쩔수 없는 그 세대 남성의 기운인가 싶기도 하다.
호의적 분위기의 인터뷰에서 종주먹들이대며 따지기도 부적절하겠지만... 아쉬운 태도랄까. 일본 내의 여성에 대한 관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하루키를 더 알고 싶다면, 물론 재미있다.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고베 지진이 일어나고,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원전 문제가 생겼죠. 전 그런 시련을 통해 일본이 좀더 세련된 국가로 나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명백하게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그게 제가 위기감을 느낀 이유이고, 어떤게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64

-그럼 기사단장과 이데아에 대해 묻고 싶은데요, 기사단장은 자신을 이데아라고 말하며 ‘나’의 앞에 나타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악의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아요. 이데아란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니까요.
무라카미 몰랐는데요.
-서, 설마요. 저 이 인터뷰를 위해 플라톤의 향연과 국가를 대충이나마 훑어 보고 왔는데요.....
무라카미 맙소사. 대단하군요.
- 그도 그럴 게, 부제를 보세요! 이데아와 메타포가 나오고..... 교양수업에서 플라톤주의를 배우긴 했지만, 이야기가 나오면 따라갈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아서요. 글자가 깨알만해서 힘들었는데, 어쨌거나 이데아는 모두 선하다, 악의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플라톤도 동굴의 비유를 하는데요.
무라카미 아, 그건 알아요. 유명한 비유죠. 내용은 잘 모르지만.
- 무라카미 씨...... 저기 말이죠. 소설을 쓰면서 이데아라는 단어를 무라카미 씨가 타이필한다고 쳐요. 키보드로 이렇게, ‘이, 데, 아’라고. 이데아는 워낙 유명한 개념이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이데아에 대해 좀 알아두자, 정리해두자’라는 생각이 안 드시나요?
무라카미 전혀 안 들어요.
- 정말로요?
무라카미 네. 정말로 그런 생각은 안 해요. 전 그저 그것에 ‘이데아’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고, 진짜 이데아,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관계 없습니다. 그냥 이데아라는 말을 빌려온 거죠. 어감이 좋아서. 게다가 기사단장이 ‘나는 이데아다’라고 자기소개를 했을 뿐, 그가 진짜 이데아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몰라요.
-이른바 플라톤에서 시작된 이데아 개념과 ‘기사단장 죽이기’의 이데아가 관계없다니,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이데아하면 보통 그 이데아를 떠올리잖아요. 전 예습까지 해왔는데......
무라카미 이런,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 162

2018.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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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동물원
진 필립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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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이란 환상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그 환상 속에 갇혀버렸다.
폐장 시간이 지난 동물원 안에서 대량 학살을 벌이는 얼굴모르는 괴한들에 의해.

아들을 보호하려는 엄마의 사투가 현실감있게 그려져 있어,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 하다.
비록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야간투시경으로 보는 듯한 밤의 동물원일 뿐이지만,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심리는 오히려 더 밝은 빛 아래 볼 수 있다.

영화같은 흥미를 끈다기 보다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공포의 한자락을 내보이는 이야기.

그런데 정작 눈에 들어오는 구절은 생존하려는 자들의 말이 아닌, 학살자 중 한명의 이야기였다.
무엇이 그렇게 그를 이끌었을까.



그는 아직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기다린다. 그녀는 두번째 기회니 파이니 이끼니 하는 이 모든 생각들을 한데 엮어야만 한다.
“그 사람들한테, 경찰한테 네가 우리를 도와줬다고 얘기할게.”
그녀가 말한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면......”
그가 미소를 짓는다. 어둠 속에서 그의 치아가 보인다.
“괜찮아요, 파월 선생님.” 그가 말을 끊는다.
“뭐가 괜찮아?”
그는 다시 등을 돌린다.
“그 사람들한테 아무 말 하지 않으셔도 돼요.”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시끄럽다. 한마디 한다미가 또렷하게 들린다.
그는 언덕을 올라간다.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떠나버린다. - 259

2018.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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