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 오지은의 유럽 기차 여행기
오지은 지음 / 이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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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구석자리에 앉아서, 아름다운 것이 보고’(6) 싶은 것 치고는 꽤나 먼곳을 장거리 기차여행을 하는 이야기.

여행 욕구를 글로 대체하는 편인데다, 마침 지난 번 에세이를 공감하며 읽었던(익숙한 새벽 세시)터라 얼른 골라들었다.

여행에 딱히 목적이 있을 필요가 있나. 사는 건 저쪽이나 이쪽이나... 어차피 지구인... 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금 이곳을 벗어나 다른 어딘가에서 정처없이 걷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곳이! 류의 감동은 식은지 오래다 보니 비슷한 감성의 여행자가 들려주는 소소한 감상들이 오히려 좋다.
주거지 근처에서도 느낄 법한 사소한 감정들을 객지에서 느낄 때의 차이라면, 외롭다는 감정의 깊이 차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만 두꺼운 종이로 만든 책은 자꾸 스스로 덮힌다. 덮히려는 책과 협상을 거듭하며 읽었다.

자본주의의 친절에는 외려 진심이 있다. 네가 여기서 돈을 쓰고 가는 한 나는 네게 잠시 사랑을 줄 거야. 아무렴, 나는 그 사랑을 남김없이 받아갈 것이다. - 26

나중은 없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지금이 있다. 어찌되었든 떠날 수 있는 지금. - 47

창문 너머 설산을 보며 가방을 쌌다. 콧물이 나온다. 진경산수화 아랫집에도 집먼지 진드기가 산다. 마음이 놓인다. - 51

찡그린 눈으로 창밖을 보며 세상의 절경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 화면으로 보는 것이 최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55

역은 소문대로 아름다웠고 파도 소리는 애잔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고 나 또한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허무하고 외로웠다. - 142

2018. 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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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라토 칸타빌레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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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의 강렬한 경험이 기반이 되었다는 모데라토 칸타빌레.

뒤라스는 경험에 빚졌다면, 모호한 서술법은 자기방어를 위한 방법일까.

넘을 수 없는 선 위의 위태로운 중산층 여성은 요즘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시대적 상황이라는 한계에 한 겹 더 감추어져 있으니.
그런 측면에서 대담한 글쓰기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모호성 덕에 캐릭터의 힘을 느끼기는 어렵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절대적 사랑이 존재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라도 있었더라면 조금 더 흥미롭게 읽었을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게 된 침묵(60)에 대해 말하면서 침묵하는 화법은 갑갑하다.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도 에너지가 드는 일이고, 그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시간이 가고 있습니다.” 하고 쇼뱅이 말했다. “점점 더 늦어지고 있어요.”
“오늘 저처럼 이렇게 터무니 없이 늦게 되면, 조금 더 늦거나 덜 늦거나 결과적으론 아무런 차이가 없는 법이죠.” -91

조금 더 설명하거나 덜 설명하거나 결과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뜻일까.

2018. 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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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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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km를 걷는다는 행위를 전제로 아이들이 성장한다.
물론 정체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한가.
‘새삼스럽지만 희안한’ 밤을 걷는 행사는 일종의 극기이고 피크닉이라고 부르기엔 버거운 행위지만, 청춘들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위험요소가 비교적 적은 어둠이라는 점에서는 성장소설의 영리한 장치가 된다.
주인공인 두 캐릭터가 특히나 성장하는 반면, 조력하는 캐릭터들은 왜인지 이미 무럭무럭 자라남이 완료된 상태인 점, 갈등 해소를 위한 ‘요정’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은 작위적이기도 하다.

이야기 속 청춘들의 갈등은 아직까지는 무해하다.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같은 좌절이 ‘아직’은 닥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순간, 그들이 간직한 순수함과 무구함이 개의 사체를 바라보는 순간 젊음의 오만으로 반전되었다. 이 사소한 장면에서 든 거부감은 아무래도 내가 더 이상은 ‘청춘이 아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온다 리쿠가 그리려 했던 ‘관통’은 충분히 이해했으나 나에겐 이미 오래 전 건너온 시절이라는 냉소적인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다시는 다가오지 않을, 지나치면 다시 없을 순간들에 대한 예찬은 살다보니 희끄무레하게 바래진 사소한 기억일 뿐이다.
이제 내가 걷는 생은 익숙한 것들의 반복일 것이고, 지나쳤다 생각했으나 어쨌든 여기서 저기, 저기서 여기인 시간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감상과는 별개로
청춘들이 통과할 어둠 속에서 그들이 진심으로 상처입지 않기를 기원한다.
온다 리쿠가 바라는 점도 그것이었을 것 같다.

보행제가 끝나버리면 이제 이 코스를 달리는 일도 없겠구나.
도오루는 왠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들이 어느 날을 경계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행위와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을 장소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뒤에 쌓여가는 것이다. 졸업이 가깝구나, 하는 것을 그는 이 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다. - 19

한참 바람을 맞으며 해안의 길을 걷고 있자니,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무방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향하고 있는 몸이 세계에 노출되어 있는 듯하여 왠지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이다. 건물 속에 들어가고 싶다. 어딘가 몸을 숨기고 싶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버리고 싶다. 그런 충동이 어디에서랄 것도 없이 솟구쳐 올라온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하는 것은 이런 기분을 말하는 것이겠지. - 90

정말로, 정말로, 사소한 내기였다. 내기라고 부를 것도 없는, 작은 바람이었던 것이다. 니시와키 도오루에게 말을 걸어, 대답을 듣는 것.
겨우 이것이, 이 단체 보행 동안에 자신과 한 내기였다.
얼마나 시시한 내기인지. 그러나 이 간단한 것이 3학년이 된 후- 아니, 지금까지 줄곧-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겼다. 나는 이겼다. - 204

2018. 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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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길
존 하트 지음, 권도희 옮김 / 구픽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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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도 좀 그렇고(개인적 취향) 아마도 누군가 추천을 하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 책이다.

기본적으로 깔린 정서는 암울.
영화 <세븐>을 보며 느꼈단 감정과 유사한 답답함(출구가 없는 깜깜한 상태.. 뭐 그런)이 느껴진다.
기쁨, 안도의 희미한 미소조차 보이지 않는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600여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니 그럴만도 하다.

엘리자베스, 채닝, 애드리안, 기드온.
이 넷의 시련은 사슬처럼 이어져있고 애초에 합법적 방법으로는 이들의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가 펼쳐진다.

종교와 구원, 수호자로서의 법, 어느 하나 명쾌한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완벽한 복수, 응징으로 끝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암울’이 이 이야기의 키워드가 되버린다.

피해자로 머물러 있지 않는 두 여성 캐릭터가 없었다면 좀 시시했을지도 모르겠다.

부정적인 감상만 토로했으나, 이 책 엄청나게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재밌다는 말이 어폐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가해와 피해가 돈과 정치, 권력에 의해 모호해지지 않는 세상을 원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일까 생각했다.

추천!

사람들은 자기들이 꼬여 있을 때는 똑바로 생각을 하지 못해. 보통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도 그렇지. 난 네가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를테면요?
나쁜 남자들, 어두운 집.
그는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나쁜 남자들과 어두운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 93

결국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지.
그게 뭔데요?
선택. 그녀는 소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너의 선택. - 134

2018.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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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테이크아웃 7
박민정 지음, 유지현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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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나’ 유리는 대체 무엇에 휩쓸려 다니는지.... ‘가스라이팅’ 이라는 것 외에 말이다.

소모적 관계에서는 물론 둘 모두 소진된다. 그러나 소모량과 방향성은 매우 다르다.
단지 자기 파괴적인 누구와, 주체를 상실한 채 파괴되는 누구.

파괴된 것이 아니라고 부정해야만 살아 갈 수 있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회복을 위해 파괴된 자신을 들여다 봐야만 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런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흑백의 거친 그림이 선명하다.

유리야, 다 네가 원한 거잖아.
나는 이렇게 더러운 것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석현이 들고 있던 유리컵을 깼다. 석현은 네가 얼마나 고결하냐고 소리 질렀다. - 52

유리의 반평생을 걸친 자기 합리화가 청춘이라는 말로 오염되어 있다는 걸. 나 자신도 오래전부터 느껴왔다. - 작가의 인터뷰 중

2018. 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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