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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작별 - 한강>
담담하게 사라짐을 받아들이는 그녀는 무채색이고, 눈사람이다.
필연적으로 녹아 사라질 존재가 되었는데, 남겨지는 이들의 안부만 잠시 생각할 뿐, 홀로 아이를 키우며 버텨온 세월이 그녀의 삶에 대한 미련도 천천히 녹여 사라지게 한게 아닐까.
쓸쓸하게 마무리되는 삶이지만, 죽음의 한 형태로 ‘기화’를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어떻게 할 거에요?
어떡하지요, 라는 물음에 우리가, 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라는 물음에는 당신이, 라는 말이 생략돼 있다. - 19, 작별 중
하지만 무서울게 뭐야, 문득 소리 내어 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늑골이 무너지고 옆구리가 부스러지면 이 때, 뒤이어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좀 전 보다 또렷하게 목소리를 내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고통이 없다면 두려움도 없지. - 43, 작별 중
내가 널 원망할 거라고 생각해왔을지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네가 윤이와 나에게서 멀어져가는 매 순간을 난 명백히 이해했어. 자신을 건설하기 위해 가깝고 어두운 이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사람의 용기를. 정말이야,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어. 같은 방식으로 윤이가 나를 떠났다 해도 난 서슴없이 이해했을 거야. 다만 분명히 알 수 없는 건 이것 뿐이야. 먼지 투성이 창을 내다보는 것처럼, 아니, 얼음 낀 더러운 물 아랠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 - 46, 작별 중
<희박한 마음 - 권여선>
아무래도 묘하다. 불타는 얼음같은 발작적 분노를 터트리는 데런은 데이트 폭력 가해자같은 모습이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그런 데런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회고되는 관계라서 일면 사이코드라마 같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얼음에 불이 붙기 시작하는 찰나엔 말이지, 하고 디엔은 말했다. 그 때의 데런은 더 이상 자신이 알던 데런이 아니고 절대적인 무엇을 담지하고 있는 순수 존재처럼 느껴진다고, 그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저 산불처럼 무섭게 번지는 파괴 앞에서 타죽어도 마땅한 작은 벌레나 한갓 풀포기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고 했다. 그것은 확실히 디엔에게 어마어마한 공포였으리라고 데런은 말했다. 디엔은 정말 그렇다고, 그런 일은 아무리 겪어도 너무나 두렵다고 하면서, 데런 네가 그렇게 드라이아이스처럼 하얗게 타버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 같아서, 라고 말했다. 그런 폭발이 일어났던 날들에 대한 기억, 웃던 디엔을 순식간에 겁에 질리게 했던 지워질 수 없는 날들의 기억 때문에 데런은 때로 눈알이 드라이아이스처럼 타는 것 같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 106, 희박한 마음 중
이런 꿈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디엔. 디엔은 대답이 없고 데런은 도대체 이런 꿈들은 어떤 사고, 어떤 심리에서 발아해서 어떤 경로로 뻗어나온 것일까, 그래서 결국 어쨌다는 것일까, 이것 역시 꿈일까 디엔, 묻고 또 묻는다. - 112, 희박한 마음 중
<소돔의 하룻밤 - 이승우>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온 천사.
천사들을 만난 롯의 소돔 탈출기인데... 그래 뭐.
인간은 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악하고, 절멸만이 답이다, 라는 답을 골라드는 수밖에.
그 와중에 롯은 진심 짜증나는 인간의 유형이고...
롯이 의도한 것은 구별하는 것이었다. 악과 악이 아닌 것,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되는 것을 대비시키는 것이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섬세해지는 것이었다. 잠든 그들의 윤리적 감각을 깨우는 것이었다. 윤리적 감각은 무분별, 무차별의 함몰 상태를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똑바른지 휘어졌는지, 명중했는지 빗나갔는지, 선 안에 있는 선 밖에 있는지 묻고 따지는 것에서 비롯한다. 롯은 몰려온 소돔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구했다. 무엇이 악한 짓인지 아닌지, 선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 구별해내라. 차이를 찾아내라. - 151, 소돔의 하룻밤 중
이 심각한 경고의 말이 그들에게는 농담으로 들린다. 위기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이다. 도시와 도시에 만연한 풍조와 도시가주는 쾌락으로부터 자기들을 분리해서 사유하지 않는 사람에게 도시는 어떤 위기도 두려움도 제공하지 않는다. 악취 속에서 악취를 뿜고 마시며 사는 사람은 악취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 그가 마시는 악취가 그가 내뱉는 악취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냄새는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가 없으므로 위기도 없다. 위기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진지한 이야기는 농담이 된다. 가장 진지한 이야기는 가장 어처구니없는 농담이 된다.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돔의 이 젊은이들도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와 시대의 기류에 흡수되어 있다. 흡수되어 있는 자에게 모든 위기는 농담이다. - 167, 소돔의 하룻밤 중
<언니 - 정이현>
딱 정이현 작가답다고 느껴지는 단편.
더 후벼파지 않는 그 선위에 정확히 멈춘다. 멈춤이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아서 좋아한다.
나는 있잖아, 이 일이 참 재밌다. 그래서 어떻게든 꼭 잘해내고 싶어.
낙관도 비관도 업싱 의지에 의해 걷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 188, 언니 중
<Light from Anywhere - 정지돈>
반복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미래라는 말을 이해하는데 평생을 다 쓴 것 같은데 지금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 - 223
2018. o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