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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평점 :
압도적으로 그로테스크한 단편들.
예상할 수 있는 극한의 상황을 상정하고 읽다가 들어맞는 순간의 쾌감이 있다.
매우 절망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 점이 조이스 캐럴 오츠의 가치가 아닐까. 현실위에 엄연히 존재하는 절망들에 대한 이야기. 차라리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고 싶은 직설적 표현들이 더불어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가치 말이다.
<정상 참작 사유>가 무척 강렬했다. 때문이다.라는 반복이 주는 강렬함과 극단적인 선택으로 향하는 과정 속에서 외롭고 지치고 두려워하는 여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략 20여년 전의 작품이지만, 너무 공감되는 소재들이어서 그렇다. 이 단편 뿐 아니라 책 전체가 그랬다.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각색한 <블라이저택의 저주받은 거주자들>이 이 책을 고른 이유 중 하나기도 한데, 원작에서 이미 퇴장한 이들을 ‘전환’한 자들로 소환하는 점도 흥미롭다.
- 예수님은 너도 사랑하셔. 너도 알지, 그렇지 멜리사?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나는 안다고 했다. 울고 있어서 웃을 수 없었다. - 46, 흉가
- 존 던의 시 <유골>에 나오는 유명한 시상 “뼈 옆의 밝은 머리카락”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갑자기 엄청난 공포가 밀어닥쳐 숨이 턱 막혀 왔다. 강의실을 뛰쳐나가 건물 밖으로 도망쳐 나가고 싶었다. 마치 악마가 나타난 것 같았다. 악마가 그녀의 얼굴에다 숨을 내쉬고 밀어대고 저 밑으로 끌어내리려 하는 것만 같았다. 질식할 것이다. 파괴될 것이다. 실체적인 고통이나 뇌리에 떠오르는 장면 같은 건 전혀 없었는데도 그 감각은 그녀가 평생 겪은 그 무엇보다도 끔찍했다. 왜 그토록 겁이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 57, 인형
- 하기야 사교 모임이란 원래 그런 식이다. 비록 다 같이 불행한 운명을 앞둔 처지라도 모임에서 기발한 농담, 고마워하는 웃음, 유쾌한 유대감을 나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사람의 인격이란 얼마나 희한한가. - 61, 인형
- 많은 것의 이름을 잊었지만 그리 슬프지 않았다. 이름들을 모르니 그 이름들 너머 영영 얻을 수 없는 허깨비같은 것들에 대한 갈망도 줄어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실명 상태도 한몫했다. 눈이 멀어서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스러웠다! - 160, 하얀 고양이
- 웃을 수 있었다면 웃었겠지만, 침묵으로 위엄을 지킬 수 있으니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 161, 하얀 고양이
- ‘웃는’ 능력은 곧 ‘사는’ 능력이지. 두 가지는 동의어라네. 180
하니만 나는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 나는 ‘알고’ 싶어. 231, 모델
- 하얀 이를 몽땅 드러낸 그의 함박웃음은 그녀를 너무 심란하게 해서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다른 엄마들도 모두 자기 자식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할까, 그녀는 의아해졌다. ‘내가 과연 자격이 있나?’ - 265, 가해자
- 죄책감이 곪으면 결백한 자 마저도 망가지게 마련이니, 조심할 것! - 278, 가해자
- 어처구니 없게도 그녀의 안에서 여성적 본능이 발동해, 자신이 남자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는 데에 죄책감이 들었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데 그녀가 일조했다는 무슨 합리적인 근거라도 있는 것처럼! - 313, 상변화
- 공포 소설의 한 가지 특징을 꼽는다면, 우리가 그것을 빨리 읽게 된다는 것이다. 점점 차오르는 두려움 속에서 평상시의 회의주의는 완전히 유보한 채로, 의심할 것도 없이 우리는 그 안에 사는 주인공이 되어 버린다. 앞으로 계속 가는 길 외에는 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동화와 마찬가지로 그로테스크와 공포 예술은 우리를 아이로 되돌려 놓고 우리 영혼에서 무언가 원초적인 것을 환기시킨다. 공포는 외적으로 보면 가변적이고 복합적이고 무한하지만, 내적으로는 접근 불가능하다. 다만 그 진상을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토록 밝은 바깥세상에서 수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치열하게 상호 작용하며, 서로를 이름과 직업과 역할과 공적인 정체성을 갖춘 사회적 존재로 인지하면서 대체로 이 세계를 ‘집처럼’ 여기고 살고 있는데, 구태여 추측하려 들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 조이스 캐럴 오츠.
2018. d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