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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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으로 휘몰아치는 단편들.

읽으면서 점점 고조되는 기분은 상쾌하기까지 한데, 이야기의 내면들은 어두워서인지 그 둘 사이의 부조화가 더욱 긴장을 유발하는게 아닌가 싶다.

악보상의 같은 음계라도 구병모 작가는 좀 더 세게 끊어치는 주법의 연주자같은 인상을 조금 더 갖게 된다.

- 펜 끝에서 한 번 번져 나가기 시작한 말들이 그리는 궤적을 바라보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흘러가는 말들을 포착하여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은 물방울의 표면에 새겨나가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지금은 원래의 가장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기에, 그리고 말의 죽음을 맞이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일 뿐이다. - 39,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

- 나는 왜 쓸까요.
소설이 원래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인가요.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없을까요.
또는 반드시 무언가를 주어야 하는 것인가요.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내게 말해준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 270, 오토포이에시스

2018. d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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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민음의 시 221
서윤후 지음 / 민음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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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소년의 이미지가 어른어른대는 시들. 딱히 취향의 소년(? 이상한 말이다....)이 아니었던 걸까... 라는 생각과 함께.

- 얼음을 줍고 있었다 손에 가득 쥐자 천천히 사라졌고 두 뺨은 붉어졌다 내게도 아직 에너지가 남아 있다 - 에너지 중

- 엎드려 있으나 잠이 비껴가고 슬픔으로 젖지 않는 주소로 나는 배달되었다. 나는 멸종 위기가 아니다. - 소년성 중

- 네 번의 종이 다시 울리면, 네 시에 하기 좋은 일들을 했다 거리의 고양이에게 밥을 주기에 이른 시간이란 없었다 - 무사히 중

2018. d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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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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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출하지 않는’, ‘회상’ 신형철의 발문 속 문구.

마음의 밑바닥까지 와 가라앉지는 않아도
마음의 밑바닥이 들썩거리게 하는 시.

- 내연이라는 어려움과
외연이라는 다름을 오래 생각했다 - 연풍 중

- 이 겨울과 밤과 잠과
아직 이른 순과 윗바람 같은 것들은
출현보다 의무에 가까웠으므로
불안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 잠의 살은 차갑다 중

2018. d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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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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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동구권 해체 이전의 작품.
몰락의 예언. 딱히 제시하는 비젼이라면 인간성의 회복 정도일까?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하는 태도가 몰락의 이유이고 증거이고 결론일까? 소외된 이들에게 무감각한 주민들이 이미 가망없다는 선고가 내려진 곳에서 미련스레 일상을 산다는 것, 새로운 출발과 닥쳐올 변화에 온몸이 움츠러들었을 만큼 동력을 상실했다는 것.
그런 세계가 펼쳐졌다.
그들의 클라이막스인 술집에서의 광란의 춤은 그래서 더 위태한 몸짓으로 보인것 같다.

태도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인데다, 태도가 이끄는 방향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나는 바람직한 태도로 이 삶에 임하고 있나.... 생각하면 좀 한심한 구석이 있다.
한심한 구석을 받아들이는 태도 자체는 긍정적이겠거니.

조금 올드한 느낌의 어떤 디스토피아의 탱고 스텝을 밟고나니 매우 지치는 상태가 되었고, 회복은 요원하다.


- 가끔씩 그가 사는 오래된 펌프하우스의 기계실에서 석회 덩어리를 깨 한 조각 맛보고싶은 충동이 일었는데, 그렇게 향과 입맛의 질서를 무참히 깨트릴 때 어떤 경고를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죽음이 절망적이고 영구적인 종말이 아니라 일종의 경고라고 확신했다. - 23

- 시계가 둘인데 하고 체구가 큰 사내가 다른 사내에게 말한다. 시각이 제각각이군. 둘 다 정확하지 않고. 여기 우리 시계는... 그가 보기 드물게 길고 가느다란 섬세한 검지로 위를 가리키며 말한다. 너무 느리게 가네. 저쪽 시계는... 시간이 아니라 처분을 기다리는 영원한 순간을 가리키는 것 같군. 비를 맞는 나뭇가지나 우리나 마찬가지야. 거부할 방법이 없지. - 43

- 그러나 몇 달 전에 그는 더 이상의 실험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설령 자기가 원한다해도 이제는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저렇게 변화를 줘봐도 썩 흡족하지가 않았다. 시도는 무언가 변했으면 좋겠다는 욕구의 은밀한 현시이거나, 혹은 기억력 쇠퇴의 증표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력하며 혼자서는 절대로 점령해 오는 몰락을 저지할 수 없다고 느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모든 것 - 집들과 담장들, 나무와 들판, 공중에서 하강하며 나는 새들, 배회하는 짐승들, 육신을 가진 인간들, 욕망과 소망들 - 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힘에 맞설 수는 없었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위협적인 공격에 헛된 저항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 87

- 그 아이는? 그래, 쥐약을 삼켰어. 그런데 어쩌라고? 불행한 아이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라. 적어도 더는 괴롭지 않잖아.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 270

- 일은 어렵게 시작해서 나쁘게 끝난단다. 중간에 일어나는 일은 다 좋은 법이야. 네가 걱정할 건 마지막 순간이란다. - 363

2018. d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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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없는 사랑 지상주의자의 이야기.

몰두할 무엇이 오로지 사랑, 사랑 뿐인 사람과 시대의 이야기이고, 사랑을 모든 것의 변명으로 미화하는 이야기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생의 연인을 위해 ‘단지 결혼만 ‘하지 않은 채 그 여인을 기다리는 남자.
딸과 아내라는 역할 말고는 비참한 독신녀나 창부가 될 수 밖에 없던 시대의 여자.

초반에 미스터리 추리물 처럼 등장하는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존재가 너무 휙 지나가 버려서 이 캐릭터는 대체 왜 등장한걸까하고 잠깐 생각했었는데, 죽음도 이겨내는 사랑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였나?

다사가 원한 것과 아리사가 원한 것이 동일하다라고 느껴지질 않아 그 점에서 이 이야기를 사랑이야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겠다 여겼으나, 그것은 독자가 나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해석과 사고 때문일지도.
맹목의 사랑에 평생을 의지한 사람과 자기의 삶이라는 것 자체를 평생 고민한 사람으로 달리 보였으니 말이다.

어찌됐든, 그들이 영원히 그 배에서 내리지 않을 수는 없다. 산채로는 말이다.
영원한 항해가 없듯, 영원한 생, 영원한 사랑도 없을 것이라 믿는 나에게 이 책이 말하는 사랑은 그저 대책없는 낭만일 뿐이다. 그럼에도 매혹되어 읽었다.
투박한 정서와 시대반영, 사랑관들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리라.

다만.... 나는 아리사의 어린 애인... 그 소녀의 등장 자체가 불필요했다라고 생각하는 독자다. 몹시 그렇다.

- 그들이 결혼의 대재앙을 피하는 것이 사소한 일상의 불행을 피하는 것보다 쉽다는 것을 제때에 배웠더라면, 아마도 두 사람의 삶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혜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때 온다는 것이다. - 51

- 그들은 느린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늙거나 병들거나 혹은 죽는 대신, 단지 시간 속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안개와 같은 다른 시절의 기억을 망각으로 여기게 될 때까지 그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 199

- 그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유일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인생이란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이었다. - 26

- 그녀는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종속된 생활을 하면서 양보해야했던 모든 것을 되찾고 싶었다. 물론 남편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었지만 그가 죽자 그녀는 누구인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 아침에 고독하게 변해버린 거대한 타인의 집에서 이리저리 배회하는 유령이 되어, 죽은 남편과 살아남은 자기 중에서 누가 더 죽은 것인지 자문하면서 고뇌하곤 했다. - 209

- “이 집에서 떠나고 싶어요. 계속해서 걷고 또 걷고 싶어요. 더 이상 이 집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대답했다.
“그럼 배를 타고 떠나도록 해요.” - 289

-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 331


2018. d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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