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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평점 :
통쾌한 복수라니... 아니다. 비장한 슬픔이 남았다.
우연히 읽기 시작한 몇 페이지를 멈출 수 없어 끝까지 읽었다.
완전 허구가 아니라는 현장성 때문일까.
반목하는 대상이 무엇이든(이념, 성적지향, 가치, 성별, 자본 등등) 그 모든 몸부림이 ‘삶’앞에서 그리 중요할까 묻는것 같다.
대체 전쟁의 쓸모란 무엇인가. 살육, 파괴를 통해 나도 너도 모두 부서지고 망가지는 파멸의 욕구일까.
새가슴에 편집증적인 알베르와 통제불능의 반골 에두아르.
그 두 전우의 이야기도 그들에게 얽힌 가족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가장 눈길이 머문 캐릭터는 조제프 메를랭이다. 비호감의 완성형이며, 내부고발자이며, 양심을 깨우는 인물.
그의 감사와 보고로 완성되는 두 남자의 복수는 어쩐지 ugly God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쨌든 악인은 댓가를 치르고, 주인공은 평안을 얻었다.
나는 에두아르의 죽음에 몹시 안도했다. 골칫거리로서 잘가라 안녕의 의미가 아니라, 세상과 반목하느라 지친 그의 안녕을 빌어주는 의미에서 말이다.
- 이 전쟁이 곧 끝나리라 믿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오래전에 죽었다. 다름아닌 전쟁으로 죽었다.
- 윗대가리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칼자루를 쥐기 위해, 최대한의 땅을 확보해 두기를 원한다. 30미터만 더 정복하면 이 전쟁의 결과가 완전히 바뀐다고, 어제 죽는 것보다 오늘 죽는게 더 값진 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한 사람들 아닌가.
- 모두가 결정적인 분노로, 복수의 일념으로 무장하고서 적을 향해 돌진한다. 사실 이것은 휴전의 전망이 낳은 역효과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너무나도 고통을 받아 온 그들은 전쟁이 이렇게 끝나려는 것을, 이렇게 많은 친구들이 죽었고 이렇게 많은 적들이 살아 있는 상태로 끝나려는 것을 보고는 모조리 학살해 버리고 싶은, 이번에는 완전히 끝장을 내버리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누구든 사정없이 쑤셔 버리리라.
- 이틀 후, 그도 살인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4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뤘으니, 이제 그럴 때도 되지 않았는가.
- 수첩을 뒤적이면서 알베르는 가슴이 꽉 조여 왔다. 이 모든 것 안에 죽은 이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부상자도 없었다. 시체 한 구 보이지 않았다. 오직 산 자들만이 있었다. 이게 더 끔찍한 이유는, 이 모든 그림들이 절규하듯 외치는 것이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조금 있으면 죽을 것이다.>
-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을 이 억울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모두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상황을 책임져야 했다.
- 그게 바로 전쟁의 좋은 점이죠.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들 주위에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프라델은 질문을 대신하여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전쟁에서 우리는...... 진정한 본성을 드러내게 되니까요. 알베르가 힘들게 말을 끝맺었다.
- <국민복>을 내놓은 정부가 이와 동시에 5프랑 짜리 <국민 앰플>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국민 빵>, 혹은 <국민 석탄>, <국민 신발>, <국민 월세>, 그리고 심지어는 <국민 일자리>도 내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알베르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빨갱이가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조금은 어리석은 향수에 빠져드는 자신이 바보같이도 느껴졌지만, 이렇게 신발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왼손은 붕대로 칭칭 감은 꼴을 하고서, 너무나도 빨리 추억이 되어 버린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스스로가 무국적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날 저녁부터는 불한당이었고, 어쩌면 살인자일지도 몰랐다. 이 끝없는 추락이 도대체 어떻게 끝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 페리쿠르 씨는 쉰 일곱살이었다. 그는 부자였다. 또 세상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그 어떤 전쟁에서도 싸우지 않았다. 하는 일마다 성공했다. 심지어는 결혼도 성공했다. 그런데 살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 결국 모든게 이 둘로 환원된다. 쌩쌩 날아다니는 것들, 그리고 뒈져 버리는 것들.
- 알베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에두아르에게 여러가지를 비난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아이디어들을 찾아내는 재주만큼은 정말 천재적이군. 특히나 재앙을 불러오는 아이디어들 말이야.
- 조제프 메를랭은 아주 지저분하고도 혐오스러운 공무원이요 실패한 공직자이긴 했지만, 그는 또한 성실하고도 꼼꼼한, 요컨대 정직한 사람이기도 했다. (...) 그에게 있어서 첫 번째 공동묘지 방문은 실로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그의 뿌리깊은 인간 혐오증이 뒤흔들렸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지구는 늘 대재앙이나 역병으로 황폐화되기 일쑤고, 전쟁은 이 둘의 조합에 불과하다. 그를 탄환처럼 꿰뚫은 것은 죽은 이들의 나이였다. 대재앙은 만인을 죽이고, 역병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죽이지만, 젊은이들을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하는 것은 오직 전쟁뿐인 것이다.
- 모든 이야기는 그 끝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이 삶의 본질이다. 심지어는 비극일지라도, 심지어는 견딜 수 없는 것일지라도, 심지어는 우스꽝스러운 것일지라도 모든 것에는 끝이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아버지와는 아직 끝이 없었다. 그들은 원수로 헤어진 후에 다시 보지 못했다.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는 죽지 않았지만, 둘 중 누구도 아직 <마지막>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2019. j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