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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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좋아졌다는 소리를 듣던 시대의 뒷면을 환기시킨다.
뜨겁게 읽었는데, 정작 작품은 과잉도 결핍도 아닌 정적인 어떤 선 위에 있는 것 같다.

좋아하는 작가여서, 믿고 보는 작가여서 기대치라는 것도 상당했지만,
같은 세대로 살아가는 독자인 나는 별수 없이 다시 한번 황정은 작가의 팬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아직도 아닌 건너가는 지금이자 다음”을 염두하고 던져지는 질문같은 문장들에 걸려들 때 마다 문득 책에 손이 머물었다.
어떻게 부재와 결핍과 소외를 건너갈수 있을까 아득한 기분이 자꾸 들면서.

마지막 문단을 읽을 때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 난다. 캐릭터와 같이 침묵하고 생명권 보호 의무에 대한 판결을 낭독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 숨통이 트이던 그 때의 감정.

아주 좋다! 정말 잘쓴다! 으악이다! >_<

- d를 이따금 성가시게 했던 세계의 잡음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행복해지자고 d는 생각했다. 더 행복해지자. 그들이 공유하는 생활의 부족함, 남루함, 고단함, 그럼에도 주고받을 수 있는 미소, 공감할 수 있는 유머와 슬픔, 서로의 뼈마디를 감각할 수 있는 손깍지, 쓰다듬을 수 있는 따뜻한 뒤통수...... 어깨를 주무르고, 작고 평범한 색을 띠고 있는 귀를 손으로 감싸고, 따뜻한 목에 입술을 대고, 추운 날엔 외투를 입는 것을 서로 거들며, dd의 행복과 더불어, 행복해지자. - 18

- 검은 길 위로 내동댕이쳐지기 직전에, 나는 dd를 붙들고 있지 않았고 이윽고 모든 것이 그 길 위에서...... 우리가 항상 오가던 길 위에서, 중단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의 결과일까...... 무엇의, 결과이기는 한 걸까. - 36

- 특히 전간기와 2차대전 이후의 예술가들에게 관심이 많았어. 더는 근본도 없고 존나 바닥도 없던 시대에 혁명적 예술가들이 그것을 음...... 그 존나 없음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되게 궁금했거든...... - 120

- 미래에 절멸수용소가 등장할 것을 예상했다면, 니체는 그 문장들을 어떻게 했을까? 언어를 관습적으로 읽는 인간, 읽고 싶은대로만 읽는 인간, 그가 바라는 ‘완벽한 독자’와는 거리가 있는 인간들에게 침을 뱉으며 그것을 지웠을까? 지우고 비운뒤 새롭게 썼을까? 미래를 상상하는데 이미 능숙한 사람이었으니 그에게 워드 프로그램이라는 툴이 있었다면...... 그만하자. - 159

- 어쨌거나 어머니가 모성을 말하고 아버지가 금기를 말하는 이야기는 싫다. 그런 이야기를 도취된 채로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어른도 싫다. 정진원은 그것보다는 좋은 이야기를 읽고 자랐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독서의 경험이란 앞선 삶의 문장을, 즉 앞선 세대의 삶 형태들을 양손으로 받아드는 경험이기도 하니까. 이 생각과 유사한 문장을 나는 최근 어떤 책에서 보았고 그 책의 저자는 아마도 롤랑 바르뜨였을 것이다. “산다는 것는(...)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를 받는것”.... - 211

-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 설치된 2711개의 추모비들은, 콘크리트관 같은 형태를 하고 저마다의 높낮이로 가지런하게 도열되어 있었는데 ‘나치에 희생된 동성애자 추모관’은 그 옆에서 내던져진 한개의 덩어리로, 핍박과 말살을 목적으로 분리된 전체에서 다시 분리된 한 조각으로, 다소 엉뚱하게 공원 가장자리에 꽂혀 있었으며 그 존재 양상은 내게 격리와 배제의 반복으로 보였고 서수경에게는 독자석/가시성으로 보였다.
이렇게 해야 보이겠지. - 249

2019.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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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6 - 2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6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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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느다란 실오라기 한 가닥 작은 귀띔만 잡아도 예리한 추리력은 맹렬하게 인내 깊게 전체를 조명해나가고야 마는 그런 지독한 성미’의 최서희.

서희와 길상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려고 하는 시점.

와중에 이사람 저사람의 이야기가 깊이 있게 전해지는데, 독립운동, 의병, 동학, 친일, 민간의 무속에까지 엄청난 정보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 점이 산만하지 않다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능력인 듯.
입에 들러붙는 지역 사투리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상당히 오랫만에 6권을 이어 읽었는데도 대부분의 전사들이 쉽게 떠오른 것도 좀 신기하다. :)

올해는 다 읽어야지.

- 심장을 쪼갤 수만 있다면 그 가냘픈 작은 벌레에게도 주고, 공작새 같고 연꽃같은 서의 애기씨에게도 주고, 이 만주 땅 벌판에 누더기같이 찾아온 내 겨레에게도 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운명신에게 피 흐르는 내 심장의 일부를 주고 싶다. - 20

-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조준구가 망하는 날에. - 270

2019.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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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탈한 오늘
문지안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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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되었다.
차분하고 따뜻한 짧은 글들을 봐왔던지라 반가웠다.

읽고 보던 것과 비슷한 호흡과 감정들이 하나로 묶인 것.
가만하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점은 좋았고,
기대보다 짧아 조금 아쉬웠다.

- 닿아있는 시간이 따사롭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 19

- 우리가 그다지 알뜰살뜰 개를 보살피는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종 저런 개에 뭐 그리 공을 들이냐는 말을 듣곤 한다.
‘저런’이라는 기준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나, 당신, 혹은 우리는 하루 세번 공들인 밥을 먹을 만큼 가치있는 존재가 맞는지 얘기가 복잡해진다. 그러니 그런 말은 말기를. - 31

- 삶에 허락된 운의 커다란 부분을 호두를 만나는 일에 써버렸다 해도 아쉬움이 없다. - 44

- 후줄근한 오늘을 보냈을지언정 모든 날들이 그렇지는 않으리라 가만히 믿어본다. - 163

2019.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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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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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호흡과 산문의 호흡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시를 쓰는 나에 대한 깊은 사유가 곳곳에서 느껴지고, 그래서 시어 인듯한 산문이 조용하고 가만하게 다가온다.

천천히 길을 걷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느낌으로.


-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 10

- 잘할 것 같은 자신감이 아니라 잘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든함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하고 싶은대로 했고 다행히 엉망이 되지 않았다. - 21

- 내가 처음 시를 썼던 1990년대에는 속임수임이 분명한 희망들이 노골적으로 도처에 전시되어 있었다. 절망은 꼭꼭 숨어 복병처럼 안 보였다. 시가 안 보이는 것을 노래해야 하니까, 그 시절 시인들은 당차게 절망을 노래했다. 이제는 절망이 노골적으로 도처에 전시된 시대를 살고 있다. 가장 안보이는 것은 희망이다. 그러나 시가 안 보이는 걸 노래해야 해서, 안보이는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 같다. 그러나 멍청한 시인의 멍청한 시를 나는 은밀히 기다린다. 사람을 둘러싼 풍경 중에서 가장 희망에 가까운 풍경을 가장 멍청하고 가장 오롯하게 제시하는 시를 나는 기다린다. - 27

- 썼던 문장이 내 귀로 되돌아오는 것에 대하여 자문하고, 했던 말이 나를 지우고 있다는 것을 자백하고, 종내는 말을 포기할 때를 기다린다. 말의 무력함과 말의 무용함과 말의 허구성과 말의 폭력성에 대하여 대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버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해 이상한 발명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 45

-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이미 비루함과 지루함,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하기 때문이다. - 252

2019.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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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의 시대 - 일, 사람, 언어의 기록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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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고 연구할 만한 것들.
학교, 회사, 개인의 훈들에 대해, 말의 힘에 대해 간과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 선언만 반복하는 개인은 그 어떤 변화를 추동할 수 없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 9

- 인용된 교훈과 교가를 살펴보다가, 나는 ‘이래도 되나’하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순결함은 우리의 자랑”, “어여쁜 겨레의 딸”, “겨레의 참된 어머니”, “알뜰히 부덕을 닦아”, “순결 검소 예절바른 한국 여성”이라는 훈의 노래는 몹시 민망한 것이었다. 착한 딸과 어진 어머니와 참된 일꾼에 불편을 느낀 것에 대해 아내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고작 그런 걸로 내가 또 뭘 복잡한 표정을 지었을까, 하고 미안해졌다. 이미 생명을 다한 줄 알았던 언어들이 학교에 모두 모여 있었다. - 44

- 한 시대의 언어는 그 시대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몸보다 뒤처져서는 안된다. 훈은 개인보다 후행하면서 그들을 퇴보시키기 보다는 선행하며 변화를 이끄는 역할을 해야한다. 학교라는 현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 65

2019.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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