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과 부동명왕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시마야 괴담, 흑백의 방이 돌아왔다.

첫 번째 청자였던 오치카의 무탈한 출산과 더불어 진행되는 이야기.

어려운 시절을, 개인의 고난을 이겨내는 소시민들의 이야기라서 늘 정이 간다.

어리석어 보이고 나이브해 보이는 이들이지만 현대의 인간이 가진 교활함이 덜한, 선의에 대한 사회적 믿음이 좀 더 공고한 시대를 그리고 있어서 그런듯 싶다. 

아이를 낳지 못한 여자, 남편의 폭행에 시달리고, 남편의 가족들에게 냉대 받아 쫓겨나온 여자,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 남편 없이 아이를 낳은 여자. 이들 모두 공동체의 부정적인 시선을 견디며 살아야 하고 구성원으로서 자리 잡기 어려운 시절에 그런 여성들을 보듬어주는 공동체 동천암이 생기고 그를 돌봐주는 신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프기도 하지만 따뜻한 면이 있어 가장 와닿는다. 그게 청과 부동명왕.

악귀가 들린 붓에 얽힌 괴담을 듣고 화공의 꿈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도미지로는 그림을 포기하겠다 생각하지만, 인간의 염원을 담은 종이 인형 마을 괴담을 듣고는 다시금 그리고자하는 마음이 솟구쳐 오르는데 과연 집안에서의 역할이 모호한 차남 도미지로는 자신의 꿈을 좇게 될지...

- 사람은 누구나 평생에 걸쳐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간다. 때로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인생의 덧없음을, 사랑의 아름다움을, 사라져 가는 영혼의 애틋함을, 모든 것을 다 태우고도 여전히 연기를 내며 남아 있는 증오의 끈질김을.
그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 미시마야의 별난 괴담 자리는 계속될 예정이다. - 10

- 누구의 마음속이든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묻고 대답을 얻는다 해도 전부 달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매번 묻다가는 귀찮아서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 말없이 서로 양보하고, 서로 배려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본심 같은 건 캐물어 봐야 소용없다.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진실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진실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 114

- "너는 네 자리를 지키고 속세에서 주어진 역할을 다함으로써 충분히 불도에 귀의할 수 있다."
지금은 아직, 이런 말을 들어 봐야 납득할 수 없을 게다. 그래도 괜찮아. 속았다고 생각해도 좋으니 내 말을 따라 다오.
"언젠가 반드시 네가 네 길을 올바르게 걷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날 게야. 그게 어떤 형태로 어디에서 나타날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나타날 게다." - 128

- 도미지로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로 젖은 눈꺼풀 속에 여러 정경이 떠오른다.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을 가진 화신들. 그 눈에 깃든 웃음과 눈물. 그 존엄함, 그 다정함. 그것은 분명히 '생명'이었다.
그리고 싶다. 나는 역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이런 것을 그리고 싶다. 도미지로는 지금 흑백의 방에 앉아, 도도히 흘러넘친 그 마음에 삼켜지고 있다. - 479

2024. sep.

#청과부동명왕 #미야베미유키 #미시마야시리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9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부의 시들이 취향에 맞았다.

<불가능한 벽> <나는 너의 시체를 가지고 있다> 가 좋았다.

- 바닥에 놓여 있어도
내 두 발은 가라앉지 않는다.
돌로 누르고 눌러놓아도
일요일은 떠오르고
돌과 함께 떠오르고
돌과 함께
나를 깨뜨린다. - 일요일의 아침 식사 중

- 소용돌이가 내게로 왔다. 와서 멈추었다. - 어떤 소용돌이 중

- <나는 너의 시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너의 불을 가지고 있다. 얼어붙은 불, 가만히 불어본다. 너는 불을 깨닫지 않는다.

어두워지는 저녁, 도시의 귀환을 끌어안고 땅 밑을 걸어간다. 심장에 박힌 발을 떼내었지 더 넓은 지푸라기 떼들을 기다리면서

너를 해치고 너를 되돌려주는 일

하늘을 때려눕힌다. 하늘을 따라간다. 다만 움츠러들었던 검은 스토브와 허겁지겁 솟구친 오늘 싹이 난 눈금에 대해 친절할 것이며

움직이지 않는 노래를
얼어붙은 너의 입속에 남겨둘 것

굳어진 태양이 벽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나는 마치 최후의 날씨가 되어 일몰을 미루고 일몰을 버린다.

너를 바꾸지 않고 너를 여러 개로 바꿀 뿐인 저녁

나는 너의 시체를 가지고 있다.
네가 없는 너의 시체

이제 아무것도 너를 가로질러 가지 않는다.

- 나는 발생하지 않은 채로 지속된다.
내가 심었던 것을 내가 파낸다. 존재하는 것 존재하려는 것 존재가 풀리는 것을. 내가 파낼 때 진행되기 시작하는 식물을 - 나는 발생하지 않은 채로 지속된다 중

2024.. sep.

#언제나너무많은비들 #이수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지 12 - 3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2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기화, 봉순이의 참담한 마지막 모습이 기구한 운명의 여성인 월선이와 겹쳐 보이는 면이 있다.
적을 두지 않고 살아온 그럼에도 미움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던 그 시절의 여성들.

상현과 송장환의 대화에서 평가되는 주갑의 인간적인 요소들이 차마 그들이 벗어던지지 못한 체면치레의 씁쓸함을 담고 있었다는 것. 비극적인 것을 낙천으로 발산하고 천진하면서 능수능란한 모습을 가진 주갑을 생각하면 그런 그들의 인물평이 부러움으로 여겨진다.

명희의 애정 없는 결혼생활과, 인실과 오가다 지로와의 이어질 수 없는 인연, 환국을 짝사랑하는 소림, 새로운 세대의 여러 인연들이 서술된다.

초반의 인물들은 하나 둘 세상을 뜨고 어리기만 하던 세대가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닌 채로 일제 강점기의 시대를 깨우치고 있어서 이야기가 흥미로워 진다.

- 지나친 겸손은 오만보다 나빠. 위선이며 비굴해진다. - 170

- 해 질 무렵, 새들이 잠자리를 찾아 날아가는데 용이네 집에서 곡성이 울렸다.
"초상났구나."
마을 사람들이 용이 집을 향해 달려간다. 상가에는 홍의 사무치는 울음소리, 보연의 호들갑스런 곡성말고는 모든 절차가 정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장지도 마련돼 있었고 영팔이, 연학이, 그리고 뜻밖에 두만 아비까지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돈뻘인 한경이가 의관을 차려 입고 나타났으며 최 참판댁 언년이 부부도 와 있었다. 보연이가 시아버지 병간호를 하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평사리에 온 것은 석 달 전의 일이었다. 홍이는 진주에 있으면서 이따금 평사리를 다녀가곤 했는데 보름 전부터 휴직을 하고 아비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와 있었다. - 319

- 불시에 당한 일도 아니었고 오래 전부터 각오를 했었는데,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한데 사람이란 죽을 때가 되면 모두 죽는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 331


2024. jul.

#토지 #박경리 #3부4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크와 그의 주인 - 드니 디드로에게 바치는 3막짜리 오마주 밀란 쿤데라 전집 1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니 드니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원작을 읽은 지 오래라 기억이 가물하고
애초에 이 책 자체에 큰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단 쿤데라 전집을 사 모을 때 산 책이다.

포스트모던한 점이 흥미를 끌어올리기도 하지만, 이번 작품은 지루하게 읽었다.

- 감성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그것이 가치처럼, 진리의 기준처럼, 행동을 정당화하는 증거처럼 간주되는 순간 위험해진다. 더없이 고결한 애국심이 최악의 혐오스러운 행동까지 정당화할 수 있다. 하여, 서정적 감정으로 가슴이 벅차오른 사람이 성스러운 사랑의 이름으로 비열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것이다.
합리적 생각을 대체한 감성은 무분별과 불관용의 토대가 된다. 그것은 카를 구스타프 융이 말했듯이 "폭력의 상층 구조"가 된다. - 13

2024. sep

#자크와그의주인 #밀란쿤데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긴박감 넘치는 하드보일드, 그 짜릿한 느낌의 초기 정유정이 조금 느껴졌다.

제목이 너무 평범해서 아쉬운 면도 있다.
재밌게 읽었지만 돌아서면 희미해지는 평이한 제목이랄까.
온갖 책의 제목 같은 느낌.

영원한 삶이 영위된다면 과연 인간은 행복할 확률이 높아지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홀로 남아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추억을 소환하면서 살거나, 프로그래밍된 상황 속에서 게임하듯 살아가는 삶.
장담할 수는 없지만, 허무와 공허가 무한대로 확장되는 삶 아닐까.

최근작들에 실망을 좀 해서 이젠 그 정유정의 작품은 없는 걸까 생각했는데
이번 작품은 그 기대감을 조금 더 충족시켜 준다.

- 좋은 게 하나 있다면 승주를 조금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를 집 안에 가둔 건 승주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이나 슬픔이 아니었다. 삶의 불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감도 아니었다. 불공평한 운명에 대한 분노 역시 아니었다. 그런 건 살고 싶어 할 때에나 생기는 감정이었다. 살려는 마음이 사라지면 평화가 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화, 아무 생각도 없는 평화, 아무 감정도 일지 않는 평화. 새로운 평화주의 자아는 내게 밖으로 나가라는 훈계를 하지 않았다. 집 안에 갇힌 나는 한없이 평화로웠다. - 45

- "알고 받아들이기와 모르고 지나치기는 다르지 않겠어요?"
베토벤은 코웃음으로 내 말을 받았다.
"넌 네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다 알고 싶냐? 나는 모르고 싶다."
가만히 생각해 봤다. 나도 모르고 싶을 것 같았다. 다 안다면 과연 열렬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열렬하게 산다는 건 내가 인생을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 273

- "네 말이 다 사실이라 치자. 그래도 난 이해를 못하겠네. 과학이 왜 인간한테 그런 짓을 해?"
"과학은 후진이 불가능해. 그저 도착하기로 예정된 곳에 도착한 것 뿐이야." - 320

- "저쪽 세상에서 살 때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고 생각했어요. 사는 게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살다 보면 나아질 거라 믿었고. 결국 그런 믿음은 허상이었어요. 내가 왜 사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 거죠."
"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삶을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되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서 롤라에 온 게 아닙니다. 그저 도망친 겁니다. 그것도 아주 성급하게. 이곳에 와서야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 삶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이해할 만한 실마리라도 찾지 않았을까." - 389

- 그러니까 이 소설은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지막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 삶의 가치라 여기는 것에 대한 추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욕망과 추구의 기질에 나는 '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종종 야성을 잃어가는 시대에 사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 자체를 조롱하거나, 가치를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흐름이 읽히기도 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요인도 분명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나, 우리는 사회적 존재인 동시에 개별적 존재다.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은,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는 내 삶의 실행자인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쪼록 기억해주시기를. 우리의 유전자에 태초의 야성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 삶의 소중한 무기라는 것을. - 작가의 말 중

2024. sep.

#영원한천국 #정유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