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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식탁 위의 개
클로디 윈징게르 지음, 김미정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은둔자와 같은 생활을 하는 작가에게 찾아온 학대당하던 떠돌이 개 예스.
존중받지 못한 생명, 자연에 대한 사색들이 가득하다.
여성주의 생태학에 대해서 생각할 계기가 되어준다.
한 평생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함께 걸어온 동지, 파트너의 존재가 새삼 경이롭게 느껴지는 글.
그들은 마치 추방된 무리, 미친 사람들, 현실을 깡그리 무시하는 존재들 같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 자기 방에서 내려온 그리그는 회색 머리칼에 닷새 동안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덥수룩하고 목에는 붉은 반다나를 두른,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서두르는 기색도 전혀 없다. 그는 항상 무덤덤한 사람, 매사에 무관심하고 어떤 일에도 놀라거나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자신의 실패와 아울러 노쇠한 몸을 이미 받아들여 이제는 실제 세상보다 책들의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담배와 소설과 밤의 냄새를 풍기며 늘 그렇듯이 방해받아 언짢다는 듯 투덜거리며 다가왔을 때, 개는 내 발 아래에 몸을 피했다가 이제는 드러누워 젖꼭지들이 점점이 박힌 배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개처럼 지나가는 문장이 있었다. 그렇다, 나는 예스라고 말했다. 나는 동의할 것이다. 그렇게 개는 '예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 14
- 세상을 뜻하는 단어는 숲이다. (The word for world is forest.)
여성을 뜻하는 단어는 황무지다. (The word for woman is wilderness.)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에게 정원이 필요하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부아바니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 24
- 세계가 느닷없이 우리 앞에 비현실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의 무의식이 활짝 열린 하늘로 터져 나온 것처럼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최악의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런 일은 일어났다. 우리는 돌연 인간 및 동식물의 사체 더미를 상시적으로 마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으며, 이런 현상은 가속화하고 있다. 전 지구적 공포의 시대. 누가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수 있겠는가?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상상하지 말기를. - 44
- 나는 이 세상의 인간을 찬성한다. 다시 한번 모순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가당착에 빠진다. 모순은 세상의 법칙이며, 그로부터 그 두 단어를 탐험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인간에 찬성한다. 인간을 다루는 일은 지루하지 않다. 지구라는 소설에서 인간은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니까. 긍정적인 영웅이라니 그건 안 될 소리다. 절대, 절대 등장시켜선 안된다. 그런 건 사람들이 읽다가 집어치울 것이다. 멋진 악당이 낫다. 그가 처형당할까? 궁지에서 빠져나올까? 출구를 찾을까?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무엇보다도, 특히 결말을 노출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결말을 아는 인간은 없다. 그를, 인간을 의지하지 말 것. 인간은 의지할 대상이 못된다. 인간을 경계하라. 이것들은 전부 내가 종종 생각하는 주제다. - 182
- 타고난 성품이 강인한 소녀들은 맹렬히 물어뜯긴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하지만 가장 뛰어난 이들조차 여성 혐오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는다. 나는 기억한다. 플랑튀, 사랑스러운 플랑튀, 천재 플랑튀가 그리그와 내가 무너져가는 세상의 소식을 전하는 텔레비전을 아직 시청하던 시절 밤 인사를 하면서 그레타 툰베리를 히스테리 환자로 취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비열한 우리 지도자들에 맞서 분노를 표출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모두가 웃었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항의한다.
나는 다음의 글을 금언처럼 기록해 두었다. 글쓰기는 저항으로부터 탄생하며, 일종의 참여 또는 항의가 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한 바였다.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혹은 투쟁하는 날이 있고, 쓰러지는 날도 있다는 것. 작가는 어떻게 투쟁하는가? 그리고, 구별 지어지는 '여성' 작가는 어떻게 투쟁하는가? 그녀들의 무기는 '남성' 작가들의 무기와 다른가? 나는 그들의 책에 대해 말하고 싶은가? - 229
- 그리그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려고 들었다. 동시에 내가 그 짓을 완전히 포기하기를 바랐다. 그는 우월한 태도로 말했다. 여보, 그곳에 가서 그 혼란 속에서 한몫하려는 건 그만둬.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애쓰지마.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있을 거야. 더러운 역사로. - 295
2024. apr.
#내식탁위의개 #클로디윈징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