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루 GD 시리즈
티아구 호드리게스 지음, 신유진 옮김, Nyhavn 사진 / 알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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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 프롬프터.

암흑 속에 숨죽여 무대의 빈틈을 감쪽같이 지워주는 역할의 프롬프터.
반전되는 역할 분담에 무대의 추억들이 서서히 환기되는 이 극을 조금 가만가만 읽게 된다.

정적이며 조용한 대화들이 문득 격정에 휘몰아칠 때 몰아치는 감동이 있다.

극으로 본다면 또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한 번 꼭 보고 싶어졌다.

2. 폭풍처럼 쏟아내는 독백. 그게 가장 큰 매력
잊고 있던 감각인데, 새로운 언어로 문장을 말하고 읽을 때는 조금 더 감상적이거나 로맨틱하다고 느끼는 감각이 있다.
프랑스어로 읽는 안나 카레니나.. 좀 에로틱한 분위기까지 괜히 느껴진다.

- 나는 1978년 2월 24일부터 줄곧 극장에서 일했지만 무대 위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나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일했습니다. 지금 나를 처음 본 당신들은 내가 얼마나 창백한지 분명히 눈치챘을 겁니다. 나의 피부는 빛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나의 몸, 얼굴, 걸음걸이는 빛 속에 사는 사람의 몸과 얼굴과 걸음걸이가 아닙니다. 나의 시커먼 옷은 어둠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복장입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도록 옷을 입습니다. 나는 보이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무대 위 조명이 비치는 곳에 서 있습니다. 오늘 나는 나의 소중한 창백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 9

- 경계에 살기. 잠시 머무는 곳에 살기. 무대와 무대 뒤 그 사이에서 살기. 현실의 둑과 허구의 둑을 잇는 다리에서 살기. 그 두 강둑 사이로 흐르는 큰 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법을 알기. 세상과 무대를 가르는 말의 유수 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알기. 기다리기, 지켜보기, 듣기. 살면서 좋은 날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고 강물에 몸을 담그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고 여기는 누군가를 위해 구조 대원이 되기. 사고를 기다리기, 극장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실수를 기다리기. 배우가 망각의 불안에 사로잡힐 때, 예기치 않게 기억이 꼬일 때, 현실에서 갈피를 못 잡을 때, 자신이 유한한 존재이고,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 잠시 빌려온 연약한 육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 그를 단어로 구하기, 그의 귀에 속삭이기, 그를 소생시키기, 그에게 대본을 조용히 일러주기, 그에게 생각과 의미와 몸짓을 되돌려주기.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말해야 할 이야기이자, 우리가 보여줘야 하는 것들입니다. 구조 대원이 강물에 뛰어드는 순간 말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강물에 빠졌고, 삶이 허구의 둑을 범람하기 때문입니다. 프롬프터, 당신을 말하고 싶어요. 프롬프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진짜 프롬프터인 당신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에게 대사를 알려주고 그들을 구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사고를 다루는 이야기를 쓰는 거죠. 사고가 났을 때의 구조 대원 이야기요. 나는 당신을 위한 연극을 쓸 거예요. - 11

- 어느 순간에 배우가 대사를 잊어버렸고, 그러자 프롬프터가 속삭였습니다. "파멸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 프롬프터가 속삭일 때, "파멸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라는 문장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건 문장이 아니라 그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길게 속삭이는 말일 뿐이었어요. "파멸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 하지만 헨리 왕을 연기하는 배우가 "파멸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라는 대사를 말했을 때, 그 문장은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파멸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손가락 끝에서 무대가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 18

- 죽지 않기. 무엇보다 죽지 않기. 살아가기. 비극의 도입부에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처럼 신중하고 상냥하게 진단을 내리는 의사 앞에서 흐트러지지 않기. 삶의 근간이 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주장하는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알기.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을 의심했을 때조차도 옳았다. 우리는 늘 우리가 말하는 것들을 의심하고, 또 말 사이에 둔 침묵을 침묵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그것에 의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의심 속에서도 살아가기. 죽음에 대한 생각에 직면할 때, 우리가 삶에 속해야 하는 이유인 미래의 신비를 다시 확인하기.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합류할 것이라고 희망하며 주저앉아 있을 곳을 알려주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따지지 말고 무력한 패배자가 되어 임종의 시간을 기다리라고 말하는 죽음의 상냥한 초대장을 거절할 줄 알기. 죽음을 밀어내고 세상을 보러 떠나기. 방랑자가 되어 산 너머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밤의 끝을 향해 여행하기. 어쩌면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을 변화시킬 때까지, 아니 절대 해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삶에 의해 패배자가 되기. 무엇보다 죽지 않을 것. 좁은 진료실에서 테이레시아스가 공포를 예언할 때, 죽음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죽음의 팔꿈치가 우리의 팔꿈치를 스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살아 있기. 살아 있는 자만이 죽음의 배회를 상상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로 옮길 수 있으니까. 그렇다. 우리의 적에 대해 쓰고 읽는 일, 우리를 사로잡는 죽음의 형태를 다루는 연극을 만들고 보는 일이 그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치명적인 순응주의의 대열을 늘려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게 양심을 달래거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막연히 시적이고 위대한 생각들의 나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살아남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어느 여름날 매미가 우는 소리만큼이나 구체적이라는 것을 안다. 무엇보다 죽지 않기. 늘 그래왔듯이 힘든 시간 속에서 살아남는 일의 달콤한 괴로움을 음미하기. 그러나 편안한 시간에는 절대 그럴 수 없다, 편안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까. 누군가 우리에게 오직 이 세계만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죽음이고, 우리는 죽음과 싸우는 타자들임을 알기.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공공장소들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은밀한 장소를 지켜나가야 한다. 우리는 신비한 것에 자신을 바치는 순간을, 우리가 우리를 만나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쩌면 소수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살아남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을 지켜내야만 한다. 고함을 치는 대신 속삭이기. 세상의 소란을 거부하기. 우리가 듣고 싶지 않을 때도 늘 그곳에 있었던, 침묵 사이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를 듣기. 바람의 소리를, 생각의 호흡을 장소의 정신을, 우리가 처음으로 자신을 마주한, 하나뿐인 그 짤은 순간을 지켜내기. 무엇보다 죽지 않을 것. - 84

2024. oct.

#소프루 #티아구호드리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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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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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세헤라자데의 천일 간 이야기처럼 이야기에서 비롯되는 이야기, 어디엔가 모티브가 있을 법한 이야기들.

9개의 이야기들이 전하는 각양각색의 원석들 같은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 중 <다크 레이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만 독서 컨디션에 조금 좌우되는 집중도. 그것만 극복하면...

- "아, 어쩌죠. 갑자기 다 나가 버렸어요. 다들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 말은 콘스턴스 당신은 대비하지 못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데 사실이 그렇기는 했다. 평생에 걸쳐 반복된 실패. 콘스턴스는 결코 대비라는 걸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매사에 대비하고 산다고 치면 대체 어떻게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지? 일몰에 대비하다니. 월출에 대비하다니. 얼음 폭풍에 대비하다니. 그래 버리면 너무 밋밋한 삶이 되지 않겠나. - 21, 알핀랜드 중

2024. nov.

#스톤매트리스 #마거릿애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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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6 - 4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6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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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실이라는 강인한 여성의 삶이 좀 평온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발자취를 찾아 읽게 된다.
올곧기 어려운 시절에 정의롭고 올곧은 여성으로, 적국의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안중근, 윤봉길 독립운동가들의 시기.
안중근 의사가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는 이야길 들었다.
평화주의자, 박애주의자였다니... 그 시대가 얼마나 괴롭고 외로웠을까 싶다.

- 사회 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라는 말은 맞는 말이네. 전폭적인 긍정으로 감상주의에 흐르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더더구나 민족주의를 휘두르고 나가는 사람들에겐...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야. 민중에게 절망하는 것도 그러하나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어리석어. 실체를 뚫어보지 않고 하는 일은 결국 붕괴된다. - 38

- 한말, 일본이 조선을 먹어들어올 무렵, 의병 봉기에 이어 오늘 현재까지 괴히 민족의 대이동이라 할 만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을 버리고 남부여대, 이주해갔고 항쟁의 터전으로 부상된 곳, 조선민족에게는 서사시적 무대이며 아득한 예적부터 민족의 혈흔이 점철된 그곳 간도의 땅을 선우일이 말한 대로 중국에게 결정적으로 넘겨준 것은 일본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사살했던 그해, 1909년 청일간의 간도협약을 맺음으로써 그 땅은 청국으로 넘어갔다. 말하자면 일본은 두 걸음 전진하기 위하여 한 걸음 후퇴한 것이다. 간도를 중국 땅으로 확정 지으면서 일본이 얻어낸 것은 일본 영사관 내지 영사관 분관을 설치하는 일이었고 장차 청국의 길장철도를 연길 남쪽까지 연장하여 회력의 조선 철도와 연락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영사관 설치는 조선 독립군을 색출 탄압하는 합법적 본거지가 될 것이며 철도의 연결은 병력과 군수품의 신속한 이송을 위한 장차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 50

2024. nov.

#토지 #4부4권 #박경리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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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인간 위픽
김성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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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에 사무친 인간의 연속되는 최악의 선택.

한 사람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자원인 가족에서 경험하지 못한 안정감을 사회에서 찾으려면 종교라는 대체재가 거의 유일한 것일까?
직장이든 친구든 결국 인간은 홀로 서야 하는 존재이니, 심리적인 공허함을 종교에서 찾는 게 어쩌면 당연한 과정일지도.

종교에 딱히 흥미를 느껴본 적이 없어서 완벽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부분이기는 하다.

그리고 위안이 되는 애착을 결국 찾지 못하고,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결국 타인에게도 줄 수 없는 인간으로 드러날 수 없다는 점이 비극.

김성중의 이야기는 기묘한 불유쾌함을 환기시키는 경우가 많고, 그게 특유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불편한 느낌이 무척 시각적이라는 부분까지.

- 그러나 죄에 비해 벌을 적게 받으면 다른 값을 치러야 하는 법이다. 무신론자들의 신, 양심이란 벌 떼가 귓가에서 윙윙대기 때문이다. - 9

- 어떤 아이가 사랑이 없는 곳에서 자라야 한다면, 그 아이에게 아무도 모르는 내면이 있고 거기에 자신이 통과한 세계를 옮겨 놓는다면 10대의 내 일기장과 비슷하지 않을까? 모든 문장에 날이 서 있었다. 분노와 서글픔, 자기 영역을 갖지 못한 야생동물의 조심스러운 보폭과 경계심이 느껴졌다. '자기영역'이란 한 존재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소와도 같은 것이다. - 12

- 환상적인 사람들, 정확히는 '환상 속에 고립되는 사람들'은 언제나 제가 매혹되는 타입인데요. 이들은 '환상을 발명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가난이나 폭력처럼 메울 수 없는 결여뿐만 아니라 부족한 애정이나 인정을 자기 힘으로 채울 수 없을 때, 어떤 이들은 자기만의 환상을 만들어 몰두하는 것 같아요. 제가 인간에게 경이를 느끼는 지점이 이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텅 비어 있지 않아요. 빈자리를 폭력이든 중독이든 뭐로든 채워 넣습니다. 메울 수 없는 공허함을 가진 사람에게 '캠프'의 '교수'같은 사람들이 나와서 어떤 '환상'을 제시해 주면 채택하기가 쉬워지는 거지요. 사이비 종교를 소재로 삼았지만 제가 정말 들여다보고 싶던 것은 그런 사람 안에 뚫려 있는 터널 같은 마음이에요. - 작가 인터뷰 중

2025. jan.

#두더지인간 #김성중 #위픽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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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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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단편들.

음험한 인간상들이 펼쳐지는데, 이 사람은 나쁘다라는 감각보다는 뭐 이런 기분 나쁜 인간이 있나... 싶은 감각이다.

오래전에 사둔 책이고(어느 책이 안 그럴까 싶....) 단편집인지 몰랐다.

첫 편의 경찰 이야기가 그래서인지(장편은 초반 설정을 세밀하게 봐둬야 하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그런데 단편이었네? 흠... 하면서 다음 편, 다음 편으로 넘어간 점이 좀 김빠지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전반적인 일본 무드랄까. 그런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는데, 그건 이야기 자체도, 캐릭터들도 음울하기 때문인 듯 하다.

어쨌거나 책표지의 미스터리 단편집에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정점...이라는 광고 문구는 너무 과장이다.

2025. jan.

#야경 #요네자와호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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