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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녀 ㅣ 창비세계문학 37
쿠라하시 유미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4년 10월
평점 :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들 속에 독을 품은 가시처럼 무기력과 타락이 숨겨져 있다.
어째서 이런 글일까. 무려 1965년 작품. 35년생 작가의 작품. 어마어마하다. 그시대 이런 작품이라니.
모던하다는 것 이외에도 고풍스럽고 우아하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경제적 궁핍에다 절망스러움을 베이스로 깔고가야하는 요즘의 퇴폐와는 비교할만한, 여유로움의 퇴폐미가 있다.
세상은 더럽고 기성세대는 개똥같지만 아무렇게나 막 살고 있는 나, 그 ˝나˝의 미래는 순탄하리라는 안도감 같은 것이 존재하는 퇴폐.
그리고 미키는 악녀인가 성녀인가라는 판에박힌 성녀 창녀론으로 소화할 이야기는 아닌듯 하다.
또 하나, 과연 ˝나˝가 미키를 사랑하는가? 했는가?의 문제. 집착, 질투를 보이는 듯하지만 확신없이 끌려 다니기로 정해버리는 모습. 비슷한 인간끼리의 동지의식같기도하고, 무심하게 식물을 키우는 정원사같기도하고. 둘 사이엔 꽤나 논쟁적인 근친 키워드가 존재하지만 그로 인한 전개는 없다는 점. 의식하지 않는다고 할까.
그런 점들이 모호한 인상을 주고 있어 왠지 이 소설의 테마가 모호함인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전위인가.
˝이게 도대체 소설이긴 한가?˝라는 작가의 말인지 작중 ˝나˝의 말인지 모를 말에는, 작가가 단지 퇴폐와 근친이라는 것에만 경도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로 작용한다.
미키는 더없이 순진하게 이 사기꾼의 접근을 허락했다. 괜찮아요, 얼마든지 내 안으로 들어오셔도 좋아요, 어짜피 내 안은 텅 비어있으니까요. 그것은 미키가 퇴원 며칠 전에 한 말이었는데 나는 그 말의 매력 탓에 정말로 미키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 p. 71
˝미안해요, 이렇게 수다를 떨어서. 다음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거 아냐?˝ 하고 미키는 너무나 정상적이고 평범한 소리를 했다. ˝미치광이면 미치광이답게 그런 걱정 같은 건 하지마!˝하고 나는 고함을 질렀고 밖에 서 얼쩡거리고 있던 못생긴 주부를 증오에 찬 손짓으로 쫓아 보냈다. 그러고선 나는 협박하듯 말했다. ˝알겠어? 이것만 잘 들어둬. 멍청하게도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그러니 나는 네가 어디로 도망가든 어디까지라도 쫓아가서 널 이해 할거야. 널 노에마의 핵으로 삼아 버릴게. 너를 생각하니까 나는 존재해. 너는 도망 칠 수 없어. 이런 말이야.˝ ˝그래서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거군요˝ 하고 미키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 p. 234
나는 미키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고 미키로부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마치 괴저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미키 안에서 녹아 없어졌다. 이것이 우리의 결혼을 의미했다. 질 나쁜 농담처럼 말하자면, 정신병원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대신 미키는 결혼 속에 자신의 주검을 유기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요컨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밤이 끝나고, 해가 떠오르겠지. 나는 차가운 여신같은 엉덩이를 어루만져보았다. - p. 238
2015. F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