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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몰리고 고립된 아이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이루는 내용이라는 측면에선 파리대왕이 생각나기도 한다.
겐자부로의 책은 처음인데 서늘하게 관조하는 관찰자의 느낌이면서도, 자신이 세운 선악의 기준은 명확한 글이다.
4.5장 즈음부터 남겨진 아이들의 생존이 시작되고, 또 다른 의미로 남겨진 자들과의 협력이 이루어진다.
어쩔 수 없는 디스토피아적 풍경 속의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시원을 발견하는 기분이 된다.
완성되지 않았을 어린 자아들이 본능으로 일궈내는 인간애.
새 사냥으로 기세가 오른 시점에서는 그들 나름의 축제를 열어 스스로의 문명을 만드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이 축제는 앞으로 닥칠 그들이 패배의 예고이고, 인생의 황금기 단 맛이며, 추락 직전의 클라이막스처럼 작용한다.
정작 인면수심의 인간들인 그들을 버리고 떠난 마을 사람들은 끝끝내 스스로를 용서할 기회를 저버린다.
전쟁통의 감화원생들에게 악담을 퍼붓길 망설이지 않고, 그들의 불행-전쟁과 전염병-의 이유과 결과를 소년들에게 전가하는데,
그것은 이 시대의 어른(또는 그것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자들)의 모습과 얼마나 다를지 모를 일이다.
이 혼돈 속에 저항과 비판의식을 키워낸 주인공 ˝나˝는 결국 등 떠밀려 검고 어두운 숲 속으로......
자유의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또 다른 의미로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에 겐자부로는 언제나 읽어 봐야겠다고 여기던작가. 그러나 왜인지 쉽게 첫걸음을 내딛기가 망설여졌었다.
이제 그 망설인 시간이 오히려 다행이다. 이제 겨우 첫 책을 읽었으니.
단호하게 추천한다. :)
2015. February
살인의 시대였다. 지루한 홍수처럼 전쟁이 집단적인 광기를 인간의 정념 구석구석에, 몸의 빈틈없는 구석구석에, 숲이며 도로, 하늘에 범람시키고 있었다. -p. 14
나는 미나미의 섬세하고 병적인 난폭함과 천진난만함이 신기하게 뒤섞인 새끼 짐승같은 얼굴이 온통 경련하고, 벌어진 입술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았다. 미나미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나는," 미나미는 간신히 목구멍에서 새어나오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에게 알려줄꺼야. 우리가 달랑 남겨졌다는 걸 알려줄거야." -p. 74
그리고 나는 지칠대로 지치고 짓눌린 채 완전히 혼자였다. 나는 동생한테서 손을 떼고 무릎을 그러안고 이마를 숙였다. 동생이 몸을 덮은 웃옷은 역시 알게 모르게 두둥실 떠도는 듯 시신의 악취를 지니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웃옷을 빨아 마파람에 말려야지, 하고 나는 힘껏 생각했다. 무엇이건, 힘껏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버림받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p. 75
광차의 궤도가 가로막혀 있다는건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갇힌 골짜기 마을을 겹겹이 중첩해 둘러싼 여러 마을 농민들의 결집된 적의, 그들의 완강하고 두꺼운, 결코 빠져나갈수 없는 벽을 가리켰다. 우리에겐 그것에 맞서, 그곳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가는 것이 분명히 절망적으로 불가능했다.-p. 86
우리는 숲을 빠져나와 달빛에 환한 돌길을 내려와서는 동료들이 잠들어 있는 집들 사이를 지나 소녀의 흙광 앞으로 나왔다. 소녀가 멈춰서자 나도 멈춰섰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서로를 응시했다. 충혈되고 퉁퉁부은 소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달빛을 반짝반짝 반사시켰다. 지금 소녀의 얇은 입술은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불현듯 그 입술이 되풀이하는 말의 의미가 내게 전해졌다. 네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하고 입술은 되풀이하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하고 입술은 씰룩씰룩하는 무의미한 경련도 섞어가며 그 말을 부르짖고 있다. -p. 140
리가 자신의 어머니 나라의 말로 노래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곧장 그 단조로우면서 와락 마음을 사로잡는 노래를 익혀 리의 노래를 합창 했다. "이게 축제의 노래야?" 나는 모두의 노랫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소리쳤다. "아니야, 장례식 노래야." 리가 움찔움찔 움직이는 혀를 훤히 드러내고 웃으면서 되받아 소리쳤다.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배운거야." "축제의 노래야." 하고 나는 만족해서 말했다. "뭐든지 축제의 노래야."-p. 171
나는 갇혀 있던 막다른 구렁텅이에서 밖으로 추방당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바깥에서도 나는 여전히 갇혀 있을테지. 끝까지 탈출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 안쪽에서도 바깥쪽에서도 나를 짓이기고 목을 조르기 위한 단단한 손가락, 우람한 팔은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다. -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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