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믈렛 문학동네 시인선 203
임유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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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안도감이 드는 시.
이해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전해져오는 위로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시가 죽음을 이야기 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인지.

- 나는 붓을 들어 이 이야기를 종이에 옮겨 적었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벽에 붙여두었다. 후에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어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았다. - 시인의 말

- 어린이는 새가 없는 다리 한쪽이 그리워 운다고 생각해보았어. 헤어진 어미, 아비, 형제, 자매 새들이 그리워 운다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새에게는 인간의 생각이 없다. 새는 새의 생각을 할 뿐이다. - 생일기분 중

- 너는 고통 없이 고통 없음의 일부가 되고 싶다. 너는 지구보다 늙어서도 순순히 죽고 싶지 않지. 너는 부패 없이 분해되길 원할 뿐인데. 너는 원하는데. 네가 모르는 바다의 일부가 되기를. 나는 바다 앞에서 너를 향해 외치네. 너를 돌아오게 하려고. 듣게 하려고. 네가 들어오게 하려고. 나는 보는데. 너는 뒤돌아보지 않고. 한때 젊은 당신은 결코 머뭇거리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가네. - 유형성숙 중

- 그러나 그건 중요한 일이 모두 시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탓이다. - 기계장치강아지 중

2023. dec.

#오믈렛 #임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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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지음, 양윤옥 옮김 / 청미래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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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것은 좀더 에세이같은 글이었으나, 연대기같은 책이다.

연말에 류이치 사카모트의 음악들을 자주 듣다보니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 면이 있어 읽게 되었다.
생각했던것 보다도 훨씬 더 반골기질의 음악가였고, 사상적 격동의 시대를 거쳐온 사람인데,
유명했던 곡 말고 다른 실험적인 곡들도 많이 찾아 들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스스로도 언급했듯, 건방지고 힘이 넘쳤던 청년인 류이치 사카모토를 볼 수 있어서 신선.

- 개인적인 체험과의 박리를 통해서 음악이라는 세계의 실존을 얻는 것으로써,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을 뛰어넘어 모두와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음악은 그런 힘을 가졌다. - 21

2023. dec.

#음악으로자유로워지다 #류이치사카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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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이름 붙이기 -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할 때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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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게 읽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저자 룰루 밀러가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과학자인 캐럴 계숙 윤의 저서.
그때도 이름을 보고 한국계구나 하는 호기심이 있었는데, 그게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던 건지, 번역이 되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룰루 밀러의 책이 드라마틱한 서사가 존재해서 재미의 측면도 충분히 만족시켜줬기에, 약간은 그런 기대를 했지만, 사실 이 책은 상당히 분류학, 특히 분기학에 대해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는 글이다.

생명의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학문인 분류학은, 생태계를 쉽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고도로 발달하는 학문이 되어갈수록, 오히려 생물의 분류를 초월해 직관적으로 이해해오던 생물의 이름을 지워나가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분류학의 붕괴를 혼돈스러워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에 집중하고 이해해야 된다는 이야기 인가... 싶다.
솔직히 집중하며 읽지는 못한 책.

- 분기학자들은 엄청나고 자극적인 혁신으로 가장 탁월한 단계의 현대 과학을 눈부시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따를 수 있으니, 이 혁명으로 초반에 희생된 존재 중 하나가 바로 물고기였다. - 25

- 여러 박물학자가 '종'이라는 말을 쓸 때, 그들의 머릿속에 각자 들어 있는 개념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를 보면 정말 우습다. 나는 그게 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 113

2023. dec.

#자연에이름붙이기 #캐럴계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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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미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478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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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시들이다.
가만히 책장에 다시 꽂았다.

-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 시인의 말

-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 오십 미터 중

- 생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삼키는지
똑똑히 지켜보라
욕망이 욕망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
(...)
계시는 언제나
천만 년 전으로부터 왔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생은 나를 삼키고 있었다
위대한 것들은
위대해서 아득하다. 남아 있는 생이여. - 행성의 노래 중

- 냉정한 햇살이 담장 넘어 사라질 때 눈을 감으면 우등열차가 머릿속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이명을 앓듯 아프게 그해의 꽃들이 지고 있었다. 그는 비극을 주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세상에 떠나보내도 괜찮은 건 없었다. 세월도 사랑도. - Midnight Special 3 아버지의 날들 중

- 아시는지요. 늦은 밤 쓸쓸한 밥상을 차렸을 불빛들이 꺼져갈 때 당신을 저주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 목련이 목숨처럼 떨어져 나갈 때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 목련이 죽는 밤 중

- 사람의 일에도 눈물이 나지 않는데 강물의 일에는 눈물이 난다. - 강물의 일 중

- 나는 아직도 생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상처에 대해서 알 뿐
안부를 물어줄 그 무엇도 만들어놓지 못했다 - 외전 2 중

2023. nov.

#오십미터 #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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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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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이라고 보이는 개인의 삶 속에 무한한 우주와 같은 여러 개의 자아들이 혼재하고 그 자아들이 서로 갈등하고 화해하는 것이 인간임을 말하고 있다.

평범한 철도 공무원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쓰게 되고, 사후에 그의 원고를 읽게 되는 오랜 지인.

평범한 그의 일생을 뭐 딱히 기록할 것이 있으랴 생각하고 원고를 읽는 이의 당혹스러움을 독자도 같이 따라가게 된다.
평범하지만 조금 똑똑하고 조숙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며 모범생의 얼굴로 살아가던 그는 시라는 세계에 빠져들어 영혼의 자유로움을 경험하지만,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는 현실에 타협해 철도 공무원이 되는 길을 택하고, 어느 역장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순조로운 승진으로 고위 공무원이 되는데,
실은 출세하고자 하는 노림수로 역장의 딸과 결혼을 선택하고, 장인의 도움으로 이른 나이에 역장으로 승진하고, 모범적이고 정숙한 아내와의 관계를 지겨워하는 일면이 있다는 고백이 회고록의 중반 이후부터 서술된다.
노년의 어느 날 시인으로 존재하던 과거의 자신을 찾아온 젊은 친구의 방문에 시 따위가 뭐라고라는 태도로 시큰둥하고 불친절하게 대하지만, 사실 그 시절의 그의 시는 놀라운 발견이라 할 만큼 훌륭한 면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그 평범한 인생을 위해 어떤 잠재력을 등졌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회고록을 써나가면서 자신이 생의 변곡점에서 해왔던 선택들, 자신의 내면이 진실로 원했던 것들, 그런 하지 않았던 일들을 떠올리며 분열적인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하는 셈이었다.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생. 그 안의 우주를 보여주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다.

- 노신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친구가 죽었어. 그처럼 규칙적인 사람도 해내는 걸 보면 죽는다는 건 아주 평범한 일임이 틀림없겠군. 하지만 분명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겠지. 아마 삶에 애착이 있었으니까 자서전을 썼을 게야. 그렇게 평범해 보이던 사람도 어느 날엔가는 훌쩍 세상을 뜨게 된다는 걸 누가 알겠나. - 9

- 하지만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시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림이나 비통함이 없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삶일까?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일을 해냈고,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 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 20

- 모든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한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시간이다. - 117

- 나는 쓰는 일을 중지하고 가만히 누워 있으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다시 대화의 단편들이 떠오르고, 두 음성은 어리석은 일의 시비를 가리려고 싸움을 시작한다. 내가 재차 끼어들지 않을 수 없다. 조용히 해. 다투지 말란 말이야. 모두가 진실이다ㅏ. 하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이 평범한 인생 속에도 여러 가지 동기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은가? 아주 단순한 일이야. 인간은 이기적이고 태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생각하기 마련이지. 잠시 그걸 잊고, 자신마저 잊은 채 자기가 몰두하는 일만이 존재할 때가 있는 거야.
가만있어 봐. 그처럼 단순한 게 아니지. 그건 두 개의 전혀 다른 삶이야. 그게 문제라고!
뭐가 문제란 말인가?
둘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게. - 150

- 흠, 첫 번째는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이고, 두 번째는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이고, 이 우울증 환자가 세 번째 인물이지. 유감이지만 그것은 세 개의 삶이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야. 절대적으로, 극단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지.
그건 전체적으로 볼 때 한 개의 평범하고 단순한 삶이야. - 159

- 지금 너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어쩌면 그 시들은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바보 같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 그시에 대해 기쁨을 가질 수도, 약간은 우쭐해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보라. 이 시들을 내가 썼고, 그다지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너는 매우 슬퍼하고 있지. 심지어 그 호전적인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 짓이지. 그는 그게 패배의 시기였고, 네가 시인이기에는 재능도 인격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제 모든 건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이자 네 속에 있던 것으로 함몰하지 않기 위해 느꼈던 공포처럼 보인다. 불구덩이를 막아 버렸고, 괴물이 스스로 질식하도록 만든 것처럼 보인다. 아마 불길은 벌써 꺼졌을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손가락에 불이 붙지 않고 손이 뜨겁지 않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너는 일들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그 일을 네 직업이자 생활로 만들었다. 너는 성공했고, 너 자신에게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양심적이고 만족스럽게 평범한 인생을 살았어. 잘 살아온 삶인데 또 뭘 원하는 거지? 뭘 유감스러워하는 건가? - 174

- 보라고.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주 단순해야 했어. 그런데 온갖 유형의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잖나. 평범한 인간, 억척스러운 인간, 우울증 환자, 시인...... 그들 모두 자신이 나의 자아라고 그래.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그저 돌이켜 봄으로써 내 삶을 산산조각 낸 게 아니냔 말일세. - 180

- 대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인생이 있었던 건가. 넷, 다섯, 여덟?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삶이 있었다. 내게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고, 조금 더 맑은 정신이 든다면 일련의 또 다른 삶들을 발견하게 되겠지. 아마도 전혀 연관성이 없고, 단지 일회적으로 일어났거나 한순간 동안만 지속되었던 그런 삶들이 나타나리라. 어쩌면 한 번도 나타나지 못했던 삶들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 212

- '가엾은 친구.' 포펠 씨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원은 조용했지만, 울타리 너머 어디선가에서 어떤 아이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노신사는 생각에 잠긴 채 책의 접혀진 부분을 펴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난> 내 인생에 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내 인생은 그의 삶처럼 단순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았소. 의사 선생님은 아직 젊으시니까 인간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 모를 겁니다. 모든 걸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들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는지! 그래요. 그 삶을 살아온 건데, 말이 무슨 소용이겠소. 그리고 선생님도 필히......'
'전 자신의 내면을 뒤져 보는 일 따위에 쓸 시간이 없습니다. 말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추악함을 볼 만큼 봤습니다.' 의사가 대꾸했다.
'그러니까 카드점이나 치는 게 낫다는 거군요......' 포펠씨는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 243

2023. dec.

#평범한인생 #카렐차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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