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이영채.한홍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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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의 행태는 소름끼치게 놀랍다.

내로남불, 자가당착, 견강부회는 누구를 막론하고 공분의 대상이다.

제발 우리는 똑같이 그러지 말자. 적어도 욕하는 그들과는 다르게 해보자.


40p. 당시 도쿄재판에서 연합군이 식민지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이유는 영국이나 미국이 전후에도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려고 했기때문이다.


43p. (1951.9.8.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때 일본 정부는 미국과 일본의 청구권협상은 양국간의 재산권협정이며 개인의 피해 및 재산권에 대해서는 미국에 직접 청구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1955년 일본이 소련과 국교 정상화를 하며 평화협정을 맺을 때에는 소련의 수용소에 억류된 일본군인들의 사망, 강제동원, 임금 미지급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소련과 맺는 평화조약은 전쟁피해에 대한 국가간 협의이며 개인의 재산 및 피해에 대해서는 개별 청구가 가능하다고, 개인청구권까지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49p. 일본 극우세력은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 그리고 한반도 식민화 등을 겪으며 한반도가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있어야 일본의 안전이 보장되고 유지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만약에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한반도 분단 유지 정책이 실패한다면, 일본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극우 보수세력들은 38선이 쓰시마까지 내려왔다고 하면서 제2의 한국전쟁을 기획할 수 있는 정치 토양을 만들어 갈 것이다.


56p. 야스쿠니는 정확히 이야기하면 국가가 아닌 천황을 위해서 죽은 이들만이 합사될 수 있었습니다.


58p. 1989년에 죽은 히로히토(쇼와) 천황과 생전 퇴임을 한 현재의 상황 아키히토 천황은 (A급 전범의 합사 사실이 알려진) 1978년 이후 한번도 야스쿠니에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66p. 정치를 견제하는 (법원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일본 보수정치의 특성입니다.


72p. 국가가 개인의 죽음을 미화하고 영웅화하면서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추도 방식이 우리에게도 있었는데, 우리 역시 그 방식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면 야스쿠니 문제는 다른 방향에서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76p. 일본군 '위안부'나 한국인 노동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일본에 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걸까요? 아주 단순합니다. 군인이 와서 총칼로 끌고 갔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강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전 세계 학계에서는 '인신매매 특히 여성 및 아동의 인신매매, 예방, 억제, 처벌을 위한 의정서', 흔히들 말하는 팔레르모 의정서를 통해서 이미 강제성의 개념을 명확히 해두었습니다. 'trafficking'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불법 거래라는 말입니다. 착취를 목적으로 위협, 무력행사, 사기, 기만, 권력 남용 등을 동원해 사람을 보집하거나 운송, 인수하는 행위는 불법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반일 종족주의』를 쓴 사람들은 모집이었고 관알선이었으므로 '강제연행'이 아니다, 자기 발로 갔으니까 '강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갔다는 말은 국제법에 합의되어 있는 기초 상식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79p.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좁은 민족적인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103p. 여러 전쟁을 수행하면서 일본은 점차 군국주의로 향해 갔는데, 이 과정에서 2.26쿠데타(1936)와 쇼와유신이 일어났습니다. 2.26쿠데타는 황도파라고 불리는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었던 군부가 천황 친정을 주장하며 중앙정부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려고 했던 사건입니다. 2.26쿠데타의 정신적 지도자는 '기타 잇기'라는 독특한 사상가였습니다

...... 아무튼 기타는 단일하고 강력한 지도자 아래에서 전체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쿠데타는 불가피하다는 그의 생각이 2.26쿠데타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돼 사형당했습니다. 2.26쿠데타는 도쿄를 장악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천황을 추종하는 황도파가 일으킨 쿠데타인데 바로 그 천황이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지요.

황도파의 정신세계와 박정희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06p. 요시다 시게루는 일본 전후 정치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요시다가 일본은 이제 살았다며 실제로 만세 삼창을 했다고 하죠.


108p. 기시 노부스케는 사실상 만주국을 설계한 사람입니다. 이런 만주 경험은 만주군 장교로 근무한 박정희와 잘 맞아떨어졌어요. 사실 유신 시대의 국방국가 한국은 만주국 모델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생겨난 한일 간의 유착관계에는 기시와 박정희가 얽힌 만주국 인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155p. 이제 우리는 서구형 근대만을 표준으로 놓고 모든 사회를 거기에 끼워 맞추려는 시각에 대해 반박할 줄 압니다. 다른 발전의 길도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발전을 통해 입증해서 콤플렉스가 없어진 편인데, 1960~70년대 우리가 아직 후진국 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그런 반박을 쉽게 하지 못했습니다. 발전경로가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맥락에서 우리도 봉건이 있었고 스스로 자본주의를 반전시킬 가능성도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나온 게 자본주의 맹아론입니다.

   맹아는 싹이지요. 자본주의 맹아론의 핵심은 우리의 자본주의 맹아도 발전할 수 있었는데, 이 싹이 자라질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었는데 일본이 와서 짓밟아서 실현할 수 없었고, 이식 자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물론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맹아론은 말하자면 죽은 자식 나이 세는 격이지 싶습니다.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요?


208p. 기가 막힌 것은 (일본에서 북한으로 재일조선인을 보내는) 북송저지사업의 책임자가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였다는 사실이지요. 


211p. 일본사회가 재일조선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지만, 한국사회가 재일조선인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편견을 지닌 체 대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불합리합니다.


214p. 우리가 재일조선인에 대해 고려할 때 가장 먼저 전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일본이 그 어느 나라보다 외국인과 피가 섞이길 원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25p.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당시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가 격렬하게 반대운동을 벌였습니다. 일본의 야당과 진보세력이 반대운동을 주도했지요. 하지만 두 나라에서 일어난 반대운동의 맥락은 전혀 달랐습니다. 한국은 식민지배 역사를 어떻게 많지도 않은 돈과 바꿔 팔아버릴 수 있느냐며 굴욕적인 협정을 접고 제대로 된 식민지배 청산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에 비해 일본에서 벌어진 반대운동은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에는 1960년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했던 투쟁, 이른바 '안보투쟁'이 여운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일본이 재무장하여 전쟁을 벌이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지요. 그래서 한미일의 군사동맹 강화로 이어질지 모르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한 것입니다. 반대운동의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투입되어 일본의 저임금 구조가 고착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등장한 구호가 바로 "박정의에게 줄 돈이 있으면 나에게 달라" 였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에 경제 지원을 하지 말라는 주장인데, 이 대목에서 당시 일본 진보세력이 한국을 바라보는 관점의 한계가 엿보입니다. 바로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이나 한국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를 반대하는 것에도 분명 의미가 있었겠지만, 한일관계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고려가 보수세력뿐 아니라 진보세력에도 전혀 없었습니다.

   1970년대 한국에서는 인권을 탄압하는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고, 일본사회에서는 그런 사건들을 중심으로 한국사회를 바라보았습니다. 특히 전태일의 분신 항거와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지요. 일본인 중에는 전태일을 접하고 비로소 인권 문제에 눈을 떴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이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의 진보세력은 한국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납치사건을 대했지만, 그러지 못한 일본의 일반 대중에게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국도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을 주었습니다. 한국이 강제징용 등을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데 알고 보니 한국도 일본의 주권을 침해하며 납치를 한 것입니다. 김대중 납치사건 탓에 한국은 정당성을 잃었고 일본은 자신들을 합리화했습니다.


270p. '일본은 한국의 통일을 이루어주지 못하지만, 우리의 통일을 방해할 힘이 있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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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열강의 식민지 통치와 국민통합 동북아역사재단 기획연구 38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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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문제에 대한 관심 확장에서 열강들의 식민지 통치를 비교하는 책이 궁금했다.

이 책에서는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마그레브지역과 인도차이나 식민 지배,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지역 식민 지배, 그리고 일제의 홋가이도와 사힐린 선주민 아이누인에 대한 식민 지배, 일제의 타이완에 대한 식민 지배 중 교육문제, 조선에 대한 식민지 교육 문제, 마지막으로 조선-만주 경계의 압록강 수력발전소를 둘러싼 일제의 만주지역 식민 지배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1. 2022.09.08.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이 죽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아직 (영국 여왕의) 장례식 참석 여부를 확정하지 않았다.

_BBC news 코리아, 2022.09.14. "여왕의 장례식엔 누가 참석하고 불참하나?" 


202p. 근대 일본은 '천황제 절대군주국가'였다.

... 어떠한 체제라도 민중의 지지와 충성이 없으면 오래 지속되기 어려웠으므로, 이러한 지배 체제를 창출한 메이지 공신들은 제정일치와 국민교화라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적 조작 행위를 하여 작위적인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고 보급시켰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천황에게 종교적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서구적 근대화와 일본 국수의 보존 및 국민사상의 통일이라는 목표들을 동시에 이룩하기 위하여 창출된 정치 이데올로기임과 동시에 종교 이데올로기였다.


2. 프랑스 식민지 근대화 담론과 식민지 교육

75p. 게다가 '근대화'라는 생각은 매우 모호했다, 식민지주의를 정당화했던 근대화 활동은 '토착민'들이 계속해서 '야만인'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면 모든 토대를 상실했을 것이다. '근대화'에 대한 담론은 따라서 언제나 프랑스의 지배를 지지했고 피식민자들을 식민지 체제에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식민지주의가 문명(자연적 재앙의 감소, 땅에 대한 '가치부여' 등)을 확대할 것이라는, 그러나 결코 그 목표들을 달성하려고 하지 않는 생각이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


77p. 사실 (식민지 치하에서) 현지의 유력자들은 계급의 논리에 따라 그들의 '동포들'을 착취하기 위해 식민지 시스템을 활용했다. 

식민지 교육정책의 세 가지 목표를 여기서 되돌아보면 그것은 교육되는 지식을 통제하기, 최소한의 근대성을 침투시키기,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기능에 적응하는 토착 엘리트를 형성하기였다. 


204p. 병탄 직후인 1910년 9월에 식민지 교육정책 수립의 실무자였던 일본인 구마모토 시게키치는 "주로 조선 민족을 과연 동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논구하고 아울러 그것에 관련된 조선민족 교화의 방침에 대하여 사견을 진술한" 것이라는 "교화의견사"를 비밀문서로 제출하였다.

......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철저한 동화는 류큐나 타이완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우선 차선책으로 '조선민족의 순량화'를 주장하고 있다. 즉 "조선민족을 교화하여 제국의 순량한 신민으로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일본민족에 대하여 항상 종속적 지위"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범위도 초등교육과 직업교육에 한정할 것을 주장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금후 일본제국의 통치에 있어서 가장 장애되는 것은 아마 (조선인의) 민족적 자각심 일 것이다. 그렇다면 금후 교육 시설에서는 이 점에 가장 유의하여 (조선인) 이들로 하여금 민족적 자각심을 각성시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극히 간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점으로부터 고찰하더라도 초등학교 이외에 할 교육상의 시설은 이들 생업에 직접 관계되는 것에 한하고 ......"

 

...... 이러한 그의 견해는 이듬해 발포된 조선교육령에 그대로 반영도어 있으며, 총독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순량화'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3. "역사가 밥먹여 줍니까? 역사를 알아 어디에 쓰나요?" 라는 이가 있었다.

"그래요? 돈벌이 잘하고 잘먹고 잘~사슈. " 라고 하고 말았다.


205p.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던 세키야는 조선학제안이 마련되자 이를 일본 본토에 있던 법학박사 호즈미에게 보내 의견을 구하였다. 호즈미는 이에 대해 사신 형식의 의견서에서 식민지 교육의 목적과 한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조선에서 교육은 우선 우리 황실을 숭경하는 정신을 부식(도와서 뿌리박게)하고, 특히 질서를 중시하고 규율에 복종하는 관념을 기르고, 그리하여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지식과 기술을 교수함으로써 일신일가를 다스릴 수 있으면 족하다"


...... 호즈미는 이어서 "교육은 국가 통치권의 행동에 속하고 다른 행정과 다를 바 없는 국가의 일이며 혹은 국가가 사인에게 명하여 행하는 일"이라 하여 교육을 학문과 구별하고 철저히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입, 도구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교육 내용, 교사, 학교 경영에 강력히 국가가 간섭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4. 새로운 역사의 창조 혹은 가공

122p. 새로운 과거들이 급격한 변화의 시기 동안 출현할 수 있으며, 이 과거들은 그룹들, 특히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기억되고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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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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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김산의 삶에 비추어보며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경험을 여러번 갖게되었다.

김산이 살아가던 세상과 당시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와 판단능력, 그리고 배움에 대한 열정과 배움으로 그치지 않는 실천가로서의 결단과 추진력 그리고 끈기와 인내에 여러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의 체포와 일경의 고문 과정에도 의연히 버텨내는 김산의 모습과 다시 이전 혁명가로서 삶을 계속 이어나가는 결의에 깊은 존경심이 우러나오게 된다.

나라 잃은 민족의 한없는 설움과 수많은 외세가 다투어 억압하고 우리 민족을 이용하려들고 세계 정세 틈바구니에 끼여 처절히 희생당하고 약소국에서 다시 일제 식민의 처지로 떨어져 무시와 살육을 당하는 모습에서는 독립된 조국의 소중함과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난 해방과 자유의 절실함을 다시 느끼게 된다.

이 책 속 김산의 체험과 시야를 통해 한일합방 전후의 모습과 3.1운동의 전개와 그 세계적 진행, 20세기 초반 한반도, 중국, 만주의 모습 그리고 여러 독립운동 세력의 알려지지 않은 내면과 활동을 깊게 들여다보게 해준다.



더불어 김산(장지락1905~1938)을 지구 반대편 남아메리카의 체 게베라(1928~1967)와 비교해본다. 

20여년 터울의 두 사람 김산과 체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억압에 깊게 공감하는 양심과 정치, 경제,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분석할 줄 아는 양식을 지녔으며, 끊임없이 독서했고 글을 쓰고 몸으로 앞장서 활동했으며 다른 사람과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깨어있으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둘 모두는 죽음을 맞이했다.


66p. 혁명가에게 있어서 나라를 넷이나 가진 인간은 나라를 하나도 갖지 못한 인간보다도 훨씬 비참하다. 각국에서 받는 것이라고는 오직 천국행 차표 한 장이다. 우리 조선인들은 일본인, 중국인, 상하이의 영국인과 프랑스인, 조선 경찰 등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체포된다. 아무데서도 보호를 받지 못한다.


104p. (3.1운동 이후) 극동 여러 나라의 열성적인 국민들 사이에서-조선 이상으로 일본과 중국, 인도에서-얼마나 커다란 환멸이 일어났던가! 식민지 문제의 해결방식은 완전히 사람을 농락한 것이었다. '자결권'은 오로지 열강들이 자기네 제국을 굳히기 위한 구호였을 뿐이었다. 미국은 국제연맹을 저버렸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에 유리한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 국제연맹을 이용하였다.


117p. 일본에서는 30전 하는 쌀을 조선농가에서는 강제적으로 7전에 매입했던 것이다.


217p. 장제스가 좌익 우한정권에 대항하여 반동적인 난징정권을 세우자 모든 조선인들은 즉시 우파세력을 떠나서 좌익을 지원하기 위해 우한으로 달려갔다.


331p. 그 당시 재만 조선인들은 중국 국적을 얻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왜놈들은 모든 조선인들을 일본 국적 하에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중국에 귀화하려고 애쓰는 조선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왜놈들은 왜놈들대로 그들을 아직도 조선인이라 하여 체포하고 또한 중국인은 중국인대로 그들은 자기 나라 국민이라 하여 처형한다는 식이었다. 나는 1922년 상하이에서 중국시민이 되었지만 나중에 이 시민증을 없애버렸다.


365p. 모든 일본인들은 용기 있는 삶을 찬미하며, 겉으로는 혁명가를 미워한다 할지라도 속으로는 존경한다. 중국인이라면 혁명가를 바보 아니면 돈을 가져다주는 대리인 쯤으로 여길 것이다.


367p. 해외에 파견되는 일본인 관리는 말단 직원까지도 교육이 잘 되어 있다. 이들은 일본제국의 전위인 것이다. 조선 국내의 경찰은 이들과는 질이 다르다. 그놈들은 이만큼 정중하지가 못하다. 조선에서는 이미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2류 행정관리들이 파견되는 것이리라. 


414p. 당의 노선은 변경될 수 없다고 고집하던 관료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바로 그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배반하였다. 


431p. (두 번째 체포 후 일제 경찰주임이 전향을 회유하며 말하길) "중국놈들은 비가 오면 모여들고 비가 그치면 다시 흩어져 버리지. 그 비란 바로 돈이야. 공산당원들도 다른 어느 중국놈 못지않게 돈을 좋아하지. 난징정부가 돈을 많이 뿌리기만 한다면 공산당 간부들도 다른 자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모두가 배신하고 말거야. 하하하!"


467p. 자기의 신념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471p. 비극은 인생의 한 부분이다, 억압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한 인간의 영광이요, 굴복하는 것은 한 인간의 수치이다.


503p. 1949년 마오쩌뚱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함과 동시에, 미국이 중국을 '잃어버린' 원인에 대해 속죄양을 찾으려는 캠페인이 확산되었다, 이것이 부분적으로는 이름바 매카시즘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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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제국 당대총서 14
하워드 진 지음, 이아정 옮김 / 당대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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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공부는 하는가?

우리가 할 일은 위대한 사상가들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 전문가에 대한 흔한 오해 두가지 

- 이른바 전문가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잘못된 가정이 존재한다.

하나는 전문가는 일반 시민보다 문제를 더 명확하게 보고 더 현명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또 하나는, 전문가들이 일반 시민들과 똑같은 이해관계(interests)를 가지고 있으며 똑같은 것을 원하고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 모두를 대변해 결정할 수 있도록 맡겨두어도 좋다는 생각이다.


3. 중립적 처신과 무관심에 대하여

- 실제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부와 권력이 특정한 방법으로 분배되고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현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전쟁 대 평화, 국수주의 대 국제주의, 평등 대 탐욕, 민주주의 대 엘리트주의 등 여러 이해관계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중립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못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4. 폭력과 인간 본성에 대하여

영국의 소설가이자 과학자인 스노우(C. P. Snow 1905~1980)1961년 이렇게 썼다.

"인간의 길고 어두운 역사를 돌이켜보면, 반란이라는 이름보다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끔찍한 죄악이 훨씬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엄격한 복종률 속에서 훈련된 독일 장교단(German Officer Corps)...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역사상 가장 사악하고 대규모였던 전쟁행위에 동조하고 참가했던 것이다.”


5. 끊임없이 판단에 내몰리는 피로감과 무거운 책임의 혼란에 대한 조언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이다."


6. 혁명의 배신

일단 권력을 잡은 혁명가들은 혁명에 대해 취미를 잃는 모양이다.

혁명에는 제약이 있는 것 같다. 혁명은 그 열렬한 추종자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과거의 잔재를 더 많이 존속시킨다.


7. 언론의 자유가 주어져도 남는 두 가지 문제

언론의 자유가 주어진다 해도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그 첫째는 언론의 자유란 단순히 , 아니오의 문제가 아니며 그것은 또한 얼마나 많이의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자유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돈을 갖고 있는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가, 또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어떤 물질적 자원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무도 우리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만약 우리가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이 나라에서 또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또 우리 정부가 국내나 해외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런 정보가 없으면, 우리 자신을 표현할 자유를 가진다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이 책에서 뽑아본 하워드 진(1922~2010)교수의 말이다.

훌륭한 책이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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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이야기 3 - 중원을 장악한 남방의 군주 춘추전국이야기 3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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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산둥반도 임치를 수도로 삼고 제나라는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있어 그들의 관심은 중원이 위치한 나머지 서쪽에 있었다. 그만큼 신경과 걱정의 국력 소모를 줄인다. 중원 한가운데 위치해 네방향 모두 대응과 경영을 떠안은 진晉나라는 싸움닭과 같은 모습이다. 이들은 각종 전쟁을 수단시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 태행산맥과 황하 사이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 위치해 땅이 부족한 진나라는 유력 씨족 간의 논공행상과 내부의 권력분점 문제로 벌어지는 국내의 시끄러움에도 항상 안과 밖을 엮어 유리하게 처리하는 일에 능란하며 지속적으로 패자국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낸다. 秦은 관중에서 동쪽 晉을 바라보며 사세를 분석하고 언제건 晉을 뛰어넘어 중원이 있는 동으로 튀어나오려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 남방의 초가 장왕의 성세를 누리는 상황에도 이들 제,晉,秦 3국은 대국의 면모를 지닌 전체적으로 4강체제였다.


초장왕을 노자와 대비시키는 내용이 흥미롭다.


247. (초)장왕이 대답한다.

'이 못난 이가 내는 계책이 들어맞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보다 못하니 근심하는 중이오. 중훼가 한 말이 있소이다. '제후가 스스로 스승 될 사람을 얻으면 그는 왕자가 되고, 벗 될 사람을 얻으면 패자가 되며, 의심을 해보는 사람을 얻으면 나라를 잃지는 않으며, 혼자 계획을 세우는데 주위에 자기만도 못한 사람들만 있으면 망한다' 라고요.

지금 과인은 재능도 한심한데, 여러 신하들이 과인보다 못하니 나라가 망하지 않겠소이까? 그래서 근심하는 것이오.


248. 세상에 잘난 사람들은 수도 없다. 군주가 신하들보다 잘났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군주는 '쓸모없는' 통나무나 빈 그릇과 같은 사람이다. 자신은 질박하고 비어 있어서 '쓸모 있는' 신하들이 모여야 나라가 풍성해지는데, 그 자신이 '쓸모 있는' 것이 자랑할 일인가? 장왕은 부끄러워했다. 이렇게 장왕과 "노자"는 쌍둥이다.


한수와 장강 사이에 자리잡은 남쪽 초楚나라는 제나라 환공-관중, 진나라 문공-호언에 이은 초나라 장왕-손숙오 시기에 중원의 패자가 된다.

제나라는 상대적으로 서쪽만 상대하며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여 계속 대국의 면모를 보전한다. 진晉나라는 복잡한 나라 내부 사정은 물론 동서남북으로 모든 적들을 상대해야 할 지정학적 위치여서 군사력 부분이 최강이다. 이런 초, 진, 제, 秦  4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낀 정나라, 송나라, 노나라, 위나라, 등 중견국과 그외 너무 작은 소국들은 그야말로 이눈치 저눈치를 살피며 매순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험한 상황의 연속이다.


남방 초나라는 황하와 중원의 화하족과는 다른 변화무쌍한 성격을 가진다.

화하족은 전쟁을 통해 얻은 점령지의 인민과 포로를 노예화하는 것이 그들의 오랜 전통이였는데, 남방 초나라는 점령지의 인민과 포로를 노예로 부리지 않았고 그 관대함으로 통합을 거듭했다. 332


333. 중원과 오랑캐의 제도 중에 무엇이 더 야만적인가? 중국에 속하지 않는 나라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그 사람들을 노예로 쓰는 사회가 야만적인가, 아니면 자신과 다른 종족들을 포용하고 장점을 흡수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회가 야만적인가? 낡은 중원의 사상으로는 팽창하는 세계를 담지할 수 없었다. 아마도 초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팽창은 거기에서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

남방의 여러 민족을 통합하고 아울러 전국시대, 나아가 통일기에 중국의 영토를 회하는 물론 장강 이남까지 확장시킨 나라는 제나라도 아니고 진나라도 아닌 바로 초나라였다. ......

"노자"에 "골짜기는 낮은 곳에 처하기에 물을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초는 화하가 아닌 2류 민족이었기에 그 많은 민족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초가 없었으면 화하는 황하를 벗어나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억척스럽고 강인한 진晉나라는 춘추시기 다른 어느 나라도 쉽게 넘어설 수 없는 면모를 계속 보여준다. 저자는 초나라의 문화 중 노자의 도가사상과 전국말기 굴원, 삼국지의 관우를 말한다. 그러나 영웅 호걸은 꼭 큰나라에서만 나오라는 법은 없으리라. 

4권은 중간에 낀 약소국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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