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우실하 지음 / 소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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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으로 고민하고, 연구하고, 길게보고 움직이는 국가가 있다. 

반면 다른 나라 국가전략의 종속변수 역할을 국제적으로 자청하며 권력층은 자기 나라와 역사에 대한 열등감만 있고 스스로 비하하기를 공공연히 일삼고 민족 자체를 끌어안기 보다 자기 집단의 이익과 정략에만 앞장서 헌신하고 대대로 매국과 매판으로 태연충실히 처신하는 그런 나라가 있다. 

이 두 나라의 근본적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32p. 우리에게 '민족주의'라는 단어는 전체 국민을 단합시키고 하나로 묶는 의미를 지니지만,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에서 '민족주의'는 56개 민족으로 뿔뿔이 흩어지자는 '분리주의' 혹은 '분열주의'를 상징하는 말로 아주 금기시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우리의 '민족주의'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와 유사하게 사용하는 것은 '애국주의'라는 단어입니다. 56개 민족의 단합은 각각의 민족끼리 뭉치자는 '민족주의'로는 안되고, '애국주의'라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42p. 중국 최고 지도자를 밤낮없이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고 통치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경서야 하는 아킬레스건은, (1)홍수로부터 국가를 보호해야 하는 '치수治水의 문제'와. (2)광대한 중국 땅덩어리의 분열을 방지하고 안정적인 통일국가를 유지해야 하는 '분열방지의 문제'였습니다.


92p. 이런 모든 것은 1980년대부터 요하 지역에서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어마어마한 신석기유적들이 대대적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황하문명의 중심지인 앙소문화보다 1000년 이상 앞선 이른 신석기유적들 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모든 역사에서 이 요하遼河 지역은 중화민족과는 상관없는 만리장성 밖의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의 활동 영역이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야만인 취급하던 이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중국은 '중화문명의 기원지'를 황하에서 요하 일대로 옮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중화문명=황하문명'이라는 것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106p. 황하 유역의 앙소문화와 장강(양자강) 하류의 하모도문화보다 2000년 이상 앞서는 신석기문화가 요하 일대에서 계속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123p. (요하문명) 흥륭와유적에서는 중원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됩니다. 흥륭와문화를 포함한 대부분의 요하 일대 신석기유적에서도 이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런 빗살무늬토기는 '시베리아 남단→만주 지역→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문화 계통이라는 점입니다.

126p.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됩니다.


259p. 이런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바탕으로, (1)'중화민족과 사방의 야만인인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는 전통적인 화이관은 무너지고, (2)사방의 야만인들을 모두 중화민족의 개념 안에 넣어버린 '새로운 중화민족 개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실 '중화민족' 이라는 개념 자체기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에 속한 사람을 '중국인' 이라고 합니다. 이 '중국인'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56개 민족'을 하나로 묶어서 또 다시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인'은 있을 수 있어도, 56개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중화민족'은 없습니다.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된 '미국인'은 있어도 이들 민족들을 모두 합쳐서 '미국민족'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268p.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바탕으로 중화문명의 시발지를 요하遼河 유역으로 옮기고 있는 중국은 요하문명을 새롭게 설정하고, 이 요하문명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는 논리를 세우고 있습니다.


275p. 요하 유역의 신석기문화 특히 홍산문화가 발견되면서 이제 야만인 취급받던 '동이'와 '북적'이, (1) 가장 이른 시기에 문명사회에 진입한 중화민족의 시조로, (2) 이들이 거주하던 요하 일대가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재정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277p. 전설과 신화의 시대에 '3황5제'가 도대체 누구인지도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각종 사서에서도 '3황5제'는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분명한 '3황5제'를역사에 끼워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주로 <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 이 부분은 이덕일 의 <사기, 2천년의 비밀>을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사서의 기록을 통해 '3황5제'의 민족귀속성을 추적한 책이다.


301p. 이제까지 중국학자들이 보아온 것처럼, 이 지역(요하 지역)은 동이東夷의 강역이었고 예.맥의 선조들이 주도하던 새로운 문명권인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용龍.봉鳳문화'와 '옥기 문화' 등이 남하하여 중원 지역으로 전파된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보이는 많은 문화적 요소들은 한반도 쪽으로만 연결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 까닭에 중원문화권에서는 보이지 않는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요하 일대 만주 지역과 한반도 일대에서 보이는 것입니다.

 요하 일대의 여러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중원문화권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한반도에서 보이는 것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곧, (1)빗살무늬토기, (2)세석기, (3)적석총, (4)석관묘, (5)치雉를 갖춘 석성石城, (6)비파형동검, (7)고인돌 등이 대량으로 발견됩니다. 이것은 모두 중원문화권에서는 보이지 않는 북방문화 계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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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2천 년의 비밀 롯데학술총서 3
이덕일 지음 / 만권당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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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기史記를 포함한 중국 역사책의 기록을 통해 삼황오제로부터 하은주 삼대에 걸친 고대 왕조의 민족귀속성을 추적한 책이다.

전한시대 태사공 사마천의 기전체 역사서 <사기史記>에 대한 악평은 익히 들어서 알고있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악평은 내용 짜집기, 끼워맞추기와 선후가 전혀 맞지않는 정합성의 오류를 주로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전 악평들에 더해 이번엔 "하화夏華역사 창작"이라는 내용을 하나 더해야겠다. 특히 동이東夷의 역사를 이용해 하화夏華를 창조해냈다는 것인데 예전에 없던 하화를 새로 만들면서 동이를 애써 지우고 가감과 윤색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기史記가 현재 중국의 역사공정에서 주재료로 이용되고 있다는 르뽀이다.


35p. 양계초는 사마천을 "사학계의 조물주"라고 불렀다. ...... 사마천이 '조물주'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이유는 ...... 그야말로 실체가 없었던 한족族을 만들고 그 한족들의 중국사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든 한족들의 천하사가 바로 <사기>다.


73p. 현재 중국은 중국공산당이 직접 주도하는 국가 차원의 여러 역사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그 핵심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내에서 발생했던 모든 역사는 하화족의 역사'라는 것이다.


80p. 중국은 최근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중원의 고고유적들이 대부분 동이문화임을 인정하는 추세이다. 그러나 동이문화는 후대에 하화문화로 편입되어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화문화가 언제 시작하는지 즉, 하화족夏華族이 언제 시작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 역사공정의 가장 큰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164p. 사마천은 황제도 신농도 치우도 모두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보다 유명한 동이족은 신농과 치우였고, 특히 치우는 유명한 동이족 군주였다. 그래서 사마천은 동이족 군주임이 명백한 신농, 특히 치우와 싸운 황제를 하화족의 시조로 설정해 중국사의 계통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사마천이 중국과 만이蠻夷를 구분하는 '화이관華夷觀'을 갖고 있었음은 앞서 인용한 "효무본기"의 중국과 만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유학자들은 화이관을 하화족의 중요한 사상의 하나로 만드는데, 사마천은 제후가 아니었던 공자를 제후들의 사적인 <세가>에 편입시킬 정도로 유학에 깊이 경도되었던 인물이었다. 공자와 사마천에 의해서 '화이관華夷觀'이 동아시아 유학 사회의 기본 관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마천은 비록 때로는 유학의 틀에서 벗어난 <화식열전>이나 <유협열전> 등도 서술해 비판도 받았지만 그 근본은 유학적 화이관을 갖고 있었다.


166p. 사마천은 그래서 황제부터 시작하는 중국사의 계통을 만들어 유방이 만든 한漢나라를 화이관 계승자로 만들 수 있었고, 이후 중원을 차지한 여러 왕조들이 이 화이관을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다른 이夷들을 방위개념의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비칭卑稱하면서 화이관은 중국인의 세계관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하화족 자체가 만들어진 민족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화이관 자체가 공상의 개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72p. 중국은 현재 자신들을 한족漢族, 또는 하화족夏華族 이라고 부르는데 누구도 그 뿌리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무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현재 중국에서 전해지는 고대 사료를 통해 하화족의 실체를 밝혀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이족族의 역사가 드러날 뿐 하화족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227p. 하화夏華와 사이四夷 개념은 사마천의 <사기> 이후에 뚜렷해지는데, 후대에 만들어진 이런 개념을 앞 시대에 적용해서 상고시대부터 하화와 사이의 개념이 있었던 것처럼 호도된 것이다. 고사변학파가 말한 것처럼 중국상고사는 뒤로 갈수록 시대는 올라가며, 뒤로 갈수록 상고시대의 내용이 풍부해지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사이四夷의 개념 역시 후대에 만든 것을 앞 시대로 소급시켜 마치 옛날부터 그랬던 것처럼 '만든역사'이다.


229p.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들 지역들은 모두 동이족들이 살던 지역이고, 각지에 봉해진 나라들은 모두 동이족 국가들이다. 중원 고대 국가들의 민족귀속성을 살펴보면 이른바 하화족의 국가는 찾을 수 없다. 중국상고사의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공자가 이상사회로 높인 하은주夏殷周 삼대도 모두 동이족 국가이다. 은나라가 동이족 국가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에서 하화족의 나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주나라도 다름 아닌 사마천이 작성한 계보를 보면 동이족 국가이다. 주나라 시조 후직이 동이족 소호의 손자인 제곡의 아들이자 후직의 어머니 강원이 동이족 유태씨니 부계로 보나 모계로 보나 주나라는 동이족 국가이다. 하화족이라고 볼 수 있는 사료적 근거가 없다. 


331p. 이족의 실체는 중원에 널려 있지만 하족의 실체는 모호하다. 즉 하화족의 중국사는 사마천을 비롯한 여러 역사가들이 만든 개념인데, 이제 그런 만들어진 역사의 실체를 찾는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P.S. 요하와 패수 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중국과 한국의 상고사, 고대사 논쟁에 대해 이덕일님의 <사기, 2천 년의 비밀>은 역사책, 사료를 재료로 민족귀속성 추적(결국 모두 동이東夷족)을 얘기해 나갔다면 , 우실하님의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은 요하遼河 주변 최근 고고학 발굴 결과와 유물, 유적을 중심으로 사료 이전 한국, 중국 두 나라의 상고사 얘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중국의 역사공정 및 동북공정 관련으로 함께 본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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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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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몇몇 대학들에서 벌어진 어떤 유력인 학위논문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발표를 보는 참담한 기분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반복된다.

똑같지 않는 분야에서, 그동안 고명과 권위로 군림해온 그들의 민낯이 드러나는 참담한 상황의 무한반복이다.


23p.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고 말했다"라고 언급했다.


25p. 그런데 (식민사학자나 한국 주류사학계의 주장처럼) 어떻게 평양 일대의 소국에 불과한 고조선이 한나라에 불안감을 야기한다는 말인가? 고조선이 평양 일대의 소국이었다면 두 나라가 왜 전쟁을 치렀는지 설명조차 할 수 없다.


60p. 역사학은 사료에 의거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 주요 기능이며, 이렇게 재구성한 내용이 타당한지 비평하는 학문이다.


63p. 한국 주류 사학계가 해방 60년이 지난 현재도 일제 식민사학의 왜곡된 논리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주된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스승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학문풍토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에 쓴 1차 사료를 직접 검토해가며 자신의 이론을 확립한 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제자들의 눈으로 바라본 고대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기 때문이다. 고조선과 한나라 시대로 직접 들어가 그 시대의 사료로 분석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81p. 그뿐만 아니라 만리장성은 벽돌성이고 석성은 돌로 쌓은 우리 전통의 돌성이다. 재료와 축조 방식도 모두 다르다. (이병도처럼) 이 석성을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본다면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석성도 만리장성의 일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86p. 거짓말은 하나만 들어보면 진짜 같지만 여러 말을 종합해보면 논리의 모순이 생기게 마련이다.


147p. 일제 발굴조사보다 26배나 많다는 북한의 발굴 결과는 무조건 부정하면서 일제의 발굴 결과는 경전처럼 떠받드는 것을 학문적 태도라고 볼 수는 없다.


172p. 역사란 일정한 사관으로 서술되어 그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데 한 문단 안에 서로 다른 사관이 충돌하고 있으니 그저 외우는 수밖에 없다. 이해과목이어야 할 국사가 암기과목으로 전락한 근본원인이 여기에 있은 것이다.


323p. 단적으로 말해 노론은 임금에 대한 충성이란 개념이 부족한 반면 개인과 집안, 당파의 이익에는 민감했다. 그러니 왕조 국가에서 나라가 망할 위기에 봉착했을 때 국가에 충성하기보다는 개인과 집안의 이익을 선택했고, 그 결과가 일제 수작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객관적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전체 76명 중 56명이 노론)


35p. 청동기시대가 되어야(만) 고대 국가가 시작된다는 <국사 교과서>의 공식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한국에만 있는 현대사 연구 금지 원칙 또한 독립운동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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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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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통해 둘이 살아온 만주국 - 전후 일본 - 해방후 한국의 연속성에 주목한다.

인간 박정희가 만들어진 배경, 그의 생각이 형성되는 전거와 사실들 그리고 기타 잇키, 기시 노부스케, 전전과 전후 일본과의 결탁 또는 박정희가 보배워 제조해낸 5.16쿠데타와 한국의 국가주도 경제건설 모습을 통해 둘의 인간적 한계와 국가통제 계획경제의 명암을 그린다.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생각하면 자꾸 선택을 강요받는 느낌이다.

"굶주린 민주주의냐? 밥먹는 독재냐?"가 그 물음이다.

"사흘 굶어서 남의 담 안 넘는 놈 없다"는 속말처럼 배고픔의 해결은 민주주의를 유보해야 할 만큼 급선무였고, 꼭 유보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제로섬 명제란 말인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말도 있다.

"사흘 굶어서 남의 담 안 넘는 놈 없다"가 통했다면, 같은 무게로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다" 또한 감당 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좋은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


187p. (제2차 세계) 전쟁 종결은 전쟁 자체의 종결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소 대립이라는 거대한 파워 시프트는 제국의 귀태들이 새로운 승리자’(미국) 아래에서 소생할 무대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욕으로 뒤범벅이 된 과거의 경력을 지워 없애고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기시 노부스케) 그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부여하는 하늘이 내린 선물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

구미에서 트루먼 독트린이나 마셜 플랜(유럽부흥계획)이 발표되자 이에 대항해서 코민포름(유럽공산당 정보국)의 설치가 결정된 1947, 기시 노부스케는 옥중에서 호기가 도래할 조짐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옥중일기에는 미소 양국의 냉전열전으로 바뀔지 어떨지, 시기 여하”(하라 요시히사,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감이 배어 있다. ......

이처럼 패전과 해방을 거쳐 도래한 새로운 전쟁 시대(냉전&열전, 중국국공내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소분쟁)는 기시와 박정희에게 재생을 향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이렇듯 기시와 박정희의 경우, 패전과 해방이라는 단절을 거치면서 그 사상적 핵심에 자리 잡은 것은 통주저음처럼 그 후로도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국을 왕도낙토를 실현하려 했던 미완의 프로젝트로 여기고 강한 반소반공의식 하에 군국주의적 국가개조와 계획적 통제경제를 단행하고 조국의 근대화를 완수한다는 강렬한 내셔널리즘의 고무 등에서, 기시와 박정희의 내면에 자리 잡은 사상의 핵은 전전과 전후에 걸쳐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두 사람은 국가라는 관제(官制)장치를 통한 강력한 정치력의 결집과 그것을 위한 지도() 원리의 도입이라는 점에서도 공통되었다.

다만 박정희와 기시는 그러한 사상적 핵심의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기회주의적인 전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변모를 거듭하면서 그때그때 권력의 원천의 차이에 부응하며 자신의 태도를 바꿔가게 된다. 그토록 재빠른 변신, 그리고 권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려내는 본능적 후가각의 예민함. 두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기어코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자질에 힘입은 것이었다. 박정희와 기시 모두 그러한 자질의 원형을 만주국이라는 아수라장을 거침으로써 획득했던 것이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그렇게 만난 뒤로 간담상조(肝膽相照,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인다는 뜻. 친구 사이의 眞正(진정)한 우정.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가까이 지냄.)하는 사이가 되엇던 것도 이러한 두 사람의 공통점을 서로가 인정했기 때문은 아닐까? 제국의 귀태는 패전과 해방 후의 누란의 위기에서 소생하여 장차 한국과 일본에 그런 각인을 남기에 되었던 것이다.


(※ 트루먼 독트린(영어: Truman Doctrine)19473월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의회에서 선언한 미국 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으로서 그 내용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이 원칙에 따라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 정부에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원조를 했다.)


(※ 한일협정(1965) 체결 과정에는 정일권의 드러나지 않은 숨은 공로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일본측 최대의 연결점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1.13. ~ 1987.08.07.) 전수상 이었다. 그는 만주국 시절 산업부 차장과 총무처 차장을 거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2.30. ~ 1948.12.23.) 내각의 군수차관과 상공대신을 지낸 사실상 만주국의 실권자였으며, 명실공히 한일 인맥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종전 후 A급 전범자로 복역하다가 석방된 뒤 그는 자민당 전신인 자유당의 창당에 참여, 자민당 간사장, 고문, 총재를 거쳐 1957년에 수상이 되었다. 이복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佐藤榮作, 1901.03.27.~1975.06.03.) 에게 수상직을 물려 준 후로는 만주 관련단체의 총본산인 국제선린협회 회장직을 맡아 왔고, 한일협력위원회의 일본측 회장도 겸임하였다. 이러한 기시와 정일권과의 뜻하지 않은만남이 1965130일 처칠(Churchill, W. 1874.11.30. ~ 1965.01.24.) 장례식에서 우연히 옆 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정일권은 한일문제 타개에 대한 박정희의 결심을 기시에게 분명히 전달, 기시의 주선으로 그의 이복동생인 사토 수상과 19652월 초 동경회담이 성사되었다. 이 일로 그동안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박정희의 의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사토의 불만은 회담 직후 말끔히 사라졌으며, 넉 달 뒤인 622일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 국회의 동의 절차는) 그해 814일 야당 의원의 불참 속에서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14년 동안 끌던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_청산하지 못한 역사1, 정일권, 1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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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 - 야마가타 아리토모-아베 신조
서승원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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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라는 나라를 생각할 때 항상 궁금한 부분이 있다. 

왜 일본은 끊임없이 주변 나라를 넘보고, 쳐들어가고 쳐들어오는 것도 부족해 아예 눌러앉아 살려드는 걸까? 이젠 예전처럼 드러내놓고 침략이 안통하니 멀리서 지배와 음험한 막후조종을 하고 그것을 일본의 은덕이나 도움으로 주장, 가장하려 드는 걸까? (은혜를 베푼다고 일본은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도 같다. '오마사케' 방식이라고 해야할까?그런 생각의 뿌리엔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일본은 팽창주의를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주장하는 걸까?

더하여 이 책을 읽어가며 다른 의문이 더해진다.

일본은 자기 땅 덩어리와 자기들의 왕이 몹시 훌륭하고 신神의 나라여서 좋다고 자부하면서도, 그러니까 부족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왜 자꾸 남의 땅과 남의 인민을 그리도 탐하고 욕심내는 것일까? 그렇게 남의 것을 탐한다면 자기들이 자부하는 자기 것들은 결국 한낱 치장하는 수사요, 헛말이였다는 반증인가? 

솔직한 그들의 속마음 고백은 일본인의 아래 말이 되는거고, 그런 무서움이 원인이 되어 또는 경쟁심에서 결국 일본은 전쟁과 침략을 일삼아왔다는 것인가? 


41p. 또한 국토의 형상이 남북으로 꿈틀거리는 것으로 되어있어서 수비가 필요한 지점이 너무 많아 국방에 매우 불리하다.

42p. (열강 러시아가 조선을 먹으면) 이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유일한 보장지를 잃게 되어 서해의 문호가 파괴될 것이다. 그리하여 탐욕스런 강대국과 지근거리를 두고 마주하게 되어, 그들의 칼날이 우리의 옆구리를 겨냥하게 될 것이다. 우리 제국신민의 안위가 크게 우려되는 바이다.

(1903.6월 오야마 이와오의 ,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 中)


상당히 심도 있는 내용이다. 길게 설명하기 보다는 사실 자료 제시로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그것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엮어나가는 내용이다.


168p. 소에야 요시히데(添谷芳秀)미들파워 외교라는 용어로 요시다 시게루(1878.9~ 1967.10) 이래 일본의 외교기조를 설명한다. 일정한 힘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강대국처럼 군사력을 수단으로 한 권력정치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다국 간 협력과 같은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말한다. 부연하면 소에야는 일본외교에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왔다고 말한다. 그는 요시다 노선을 전후 평화헌법과 미일안보조약을 하나의 세트로 묶는 것으로 정의한다. 1946년에 제정된 헌법은 전후 처리의 문맥에서 9조에 전쟁포기를 규정하고 있는데 비해, 1951년에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은 냉전의 산물로서 일본의 안전보장을 미국에게 의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기본적으로 모순되는 관계이다. 좌파들은 평화헌법을 옹호하면서 미일안보조약 해체를 주장하고, 보수파들은 미일안보조약을 옹호하면서 개헌을 주장해 왔다. 그리고 ‘1955년 체제라는 좌우 대립축 안에서 이러한 모순관계는 최근까지 줄곧 이어져 왔다. 소에야의 주장은 일본의 거의 모든 외교행태가 이 두 가지가 전제된 틀 안에서 움직이며 누구도 이 틀의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 근본 우너인을 과거 군국주의의 역사에서 찾는다. 과거의 권력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반군국주의 정서, 염전주의 등)이 여전히 팽배하기 때문에 일본국민들은 국력이 신장된 이후에고 헌법과 미일안보의 모순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188p. 미군정의 비군사화 및 민주화 방침은 미국의 적이 되지 않도록 일본을 철저히 약체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약체화는 사실 국민당 정부를 동맹국으로 육성하려는 구상(이른바 아시아판 티토주의’)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엇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을 대체하는 동맹국이 필요했고 그 자리에 구 적국 일본을 앉혔다. 미국이 일본을 극동에서의 반공의 방벽으로 육성하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초였다.

일본의 재군비는 거의 전적으로 총사령부의 지시하에 추진되었다.

189p. 극동위원회의 뉴빌랜드, 중국, 영구, 호주, 소련 대표 등이 일본 재무장 금지를 주장했지만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하며 이를 강행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7월에는 경찰예바대 창설 및 해상보안청 증원이 추진되었다. 주일 미 점령군 주력부대인 제8군이 대부분 한국전선에 투입되면서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의 재군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미군의 반영구적인 일본 주둔, 즉 일본의 미국 군사기지화였다. 이가 19519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 날 오후 미국이 일본과 안보조약(‘일본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한 이유였다. 이 조약은 19601월에 개정된 일본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 조약과 구별하여 구 안보조약으로 불린다. 한국전쟁 직후 일본에는 약 600개의 미군기지와 약 20만 명의 미군병력이 주둔했다. 특히, 류큐제도의 가장 큰 섬인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영토의 0.6%에 불과하지만 미군의 약 75%가 집중되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오키나와가 미일안보조약의 핵심인 셈이다.

 

205p. 또한 장제스는 대만을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받는 대신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을 포기했다. 대만과 수교 후 일본은 필리핀, 버마, 인도네시아 등 비공산주의동남아 국가들과 일련의 배상교섭 및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일본 측의 배상 의도는 전쟁피해에 대한 보상이기보다는 일본의 경제부흥, 그에 덧붙여 상대국의 경제발전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데 놓여졌다.

 

206p. 그리고 이러한 (1960년대 일본의) 고도성장은 요시다노선, 즉 헌법9조와 미일안보를 두 축으로 하는 경무장노선이 그 배경이었다는 인식이 등장했다.

 

216p. 미국 측은 베트남전쟁의 본격화로 일본은 물론 한국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본에 대해서는 극동의 안보 문제에 더욱 관여시키고, 한국에 대해서는 파병을 요청하는 방식을 취했다.

 

221p. 한편 한국과의 수교 교섭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10월에 시작되었다. 미국 측이 공산권 봉쇄를 목적으로 일본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한일 양국에 대해 국교를 수립하여 지역협력 체제를 구축하도록 권고한 것이 직접적 배경이었다. 하지만 한일 양구 간 교섭은 196512월에 이르기까지 무려 14년이란 세월이 소요되었다. 재산청구권 및 어업 문제에 관한 의견 대립, 한국 측의 이승만 라인선포(1952.1.),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에게도 유익했다는 발언, 그리고 재일한국인 북송 문제 등으로 교섭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615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부의 등장이었다. 경제발전 목표를 내걸은 박정희 정부는 일본의 자금 지원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회담 재개에 적극 나섰다. 재개된 회담에서 청구권 금액, 이승만 라인,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지만 회담의 조기 타결을 위해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파견하여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과 담판을 짓게 했다, 이 담판에서 합의된 것이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이다.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품차관 3억 달러의 경제협력방식으로 해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이후 한일방식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224p.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한일 수교가 한일 안보협력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 한일 수교는 앞서 언급한 닉슨사토 공동성명의 한국조항과 연동되게 된다. 일본은 한국조항에서 한반도 유사시 주일 미군의 한반도 전개에 대해 사실상 사전협의 제도를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오키나와가 수행해 온 한국안보에 대한 역할을 받아들였다. 전시(戰時) 주일미군의 자유로운 한반도 전개를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밀약을 통해 오키나와 반환 이후에도 미국이 오키나와에 핵을 반입하는 것을 비핵 3원칙의 예외로 인정한다고 약속했다. 일본이 기존의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유사시 주일 미군의 극동 방위에 협조하게 되엇음을 의미한다.

최희식(2011)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69년 한일 협력체제의 냉전적 원형이 완성되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억지력을 제공하면서 동맹국들의 자조적 노력과 지역적 역할을 강조하고(이른바 닉슨의 괌독트린[Guam Doctrine]), 한국은 자주국방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진행하며, 일본은 주일미군의 전개에 협조하면서 아시아 우방국들에 대해 전략적으로 경제원조를 실시하는 구도를 말한다. 수동적이긴 하나 패전 이후 처음으로 미국에 의해 일본의 군사적 역할에 대한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277p. 1980년대에 한정해서 본다면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은 일본의 지원.협력을 전제로 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279p. 일본의 정책행동에는 중국의 경제발전이 내정의 안정을 가져오고 이가 온건한 대외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자유주의적 사고가 전제되어 있었다. ......

중국의 성장과 관련해 당시 일본경제연구센터가 흥미로운 전망을 내놓은 적이 있다. 무난하게 경제성장을 할 경우 대략 2050년 무렵에는 중국이 일본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예측은 한참 벗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1990년대 고속성장을 달성한 중국이 경제규모에서 일본을 역전시킨 것은 2010년이었다. 150년 만의 중일 역전이라 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중국의 군사력도 괄목할 만한 신장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성장한 중국은 과거사 문제나 영유권 문제로 대일 강경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냉전 해체로 소련위협론이 사라진 가운데 과거 청일전쟁 및 중일전쟁 당시에 보였던 중국위협론이 다시 등장했다. 역설적이지만 중국위협론을 만든 당사자는 중국이 성장하도록 전심전력으로 도와준 일본 자신이었다. 부상한 일본이 미래의 중국 부상을 도운 셈이었다. ......

예상을 뛰어넘어 지나치게 강력해진 중국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가 21세기 일본 대외정책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냉전 시기 소련을 대상으로 강화되어 온 미일안전보장체제는 그 바향을 전환하여 이번에는 중국을 대상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331p.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로 이어지는 보수우파 세력의 일관된 기조는 개헌 추진 및 미일안보 강화였다. 이들은 대미자주라는 자신들의 표어와는 상반되게 미일동맹을 절대화, 목적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377p. 우리의 대외전략 기조는 한미동맹 플러스 알파이다. 대미동맹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자신의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앞으로도 일정 기간 그러할 것이다. 문제는 전략적 사고의 유연성 여부다. 이러한 유연성늘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 요소는 다름 아닌 약소국 의식이다. 약소국 의식은 쉽게 사고정지를 야기한다. 강대국의 전략을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약소국 의식은 반도숙명론이라는 고전지정학적 사고와 깊은 친화성을 갖는다. 한반도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충돌 지점이자 세력 간 완충지대로 정의되며 강대국 간 패권경쟁의 희생양이라는 지리결정론적 사고를 말한다. ...... 이러한 틀에 박힌 인식론이나 고정관념은 전략적 사고를 경직시킨다. 각종 방안을 제시하기 이전에 선결되어야만 하는 우리들의 숙제이다. 역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지리가 아닌 인간의 의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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