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신조는 혼자서 말라가지 않는 거예요.
슬픔도 지그시 누르는 거예요.
부어오른 뺨처럼 누르는 거예요.

인간이 건설한 자연이 천박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 천박함에 목이 메면 그럴수록 당신의 손을 생각한다. 그 위대한손, 이 문명의 절망은 시인만이 이끌고 간다.

마당에 모란이 너무나 찬란하게 피었다. 찬란한 모란 앞에서말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시적인 진술들은 극적인 사실 앞에서 침묵당한다. 그때 일어나야 한다. 모든 시적인 것의 비밀은 그 침묵 뒤에 발생한다. 

- 시간을 정확하게 해체할 수 없는 순간에 시는 온다. 어떤시간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그 망설임의 순간에 시는오는 것이다.

분열이 글에서 보이지 않으니 나도 늙어가나봐. 그런데 분열이 보여서 어떡하겠니, 분열이 아니라 분열의 뒤가 보여야지. 분열과 갈망의 뒤가 보이는 글을 써야 한다. 너의 모습이 아니라 너의 뒷모습이 보이는 시를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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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반소는 여성이 스스로를 위해 복종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충고하며 표면적으로는 여성에게 순종의 미덕을 가르치는 듯하지만, 최근에 《여계》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기도 했다.
즉 《여계가 시집온 여성들이 시댁에서 겪는 난관을 이겨내고,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음모를 극복하고 살아남게 하며, 궁정의 여성 역시 오래 버텨서마침내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는 데까지 이끄는 극히 세련된 전략을 지도층여성에게 가르치는 책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드 피장은 여성의 지적 잠재력을공식적으로 옹호했던 최초의 발언자이자, 여권을 주장한 최초의 십자군‘
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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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여성의 몇 안 되는 공식 활동‘ 중 하나는 시를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우 가부장적인 로마 사회에서 여성의 시는 작품의 질과 관계없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림 속 여인의 자세가 묘사된 방식으로 미루어보아 프로쿨루스의 아내는 시인이다. 이른바 사포로 불리는 여인의 벽화.처럼 시인을 상징하는 사물인 철침과 왁스로 만든 명판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녀가 시를 썼다고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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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든 남성이든, 중세 유럽에서 글을 읽고 쓰는 일은 오로지 종교적인문헌에 관련해서만 사용되었다. 

중세 여성들이 책을 접할 방법은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시에 귀족 가문에서 딸을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수녀원에 보내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중세에 많은 여성 저술가들이 수녀원장을 맡긴 했지만, 힐데가르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유럽 최초로 대중을 직접 가르치고 설교한 수녀였다. 그녀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가 합쳐진 총체적 존재로 파악했다. 때문에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가 삶의 여러 측면을 파악할 수 있는 권위자로 비쳤다. 힐데가르트는 독일 전역을 돌며 평생 대중 곁에서 다가가고자했다. 

 책은 희귀하고 손에 넣기 어려운 물건이었으므로, 책 읽기란 여전히 귀족의 특권에 가까웠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1454년에 인쇄기가 발명되며 상황이 바뀌었다. 물론 활자로 인쇄하는 기술은 중국에서 문화가 발전했던송宋 왕조(960~1279년) 때 이미 발명되었다. 또한 고려 시대의 문인 이규보(1168~1241년)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보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성경을 인쇄하기 200년 전인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 詳定古今禮文》이라는 책이 뽕나무 종이 (상백지)에 금속 활자로 인쇄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독자적인 발명품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기록물 출판이 점차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이론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도 책을 소유하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성경과 몇몇 교훈집, 시집을 제외한 책 대부분은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평민 남성들도 손에넣기 힘들었다. 그 당시 그려진 그림들은 신앙과 기도라는 맥락 안에서 책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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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와 진보 세력은 여성의 교육 기회 확대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맞섰다.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이끈 이들은 지적으로 뛰어난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지닌 지성의 능력을 확신하며 여성에게 불리한 환경에 반발하고 용감하고 당당하게, 결연히 떨쳐 일어났다. 이들 여성은 평판이 나빠졌고, 사회에서 소외 당하거나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으나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기존 질서는 여성의 지적 해방과 기록된 글의 잠재적 전복 효과를 두려워했다. 

세계 문학에서 최초로 이름을 알린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에 놀랄 이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엔헤두안나 Eulheduanna(기원전 2285~2250년) 공주 이전에도 글자를 적었던 서기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엔헤두안나는 처음으로 설형 문자판에 자기 이름을 적었으므로, 4300년 전에 생존했던 최초의 작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녀는 수메르 세게를 통일했던 아카드 제국의 정복왕 사르곤의 딸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 귀족 혈통의 여인들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춤과 음악, 노래를 비롯한 예술 교육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시는 특히 중요했고,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여사제, 선지자, 시인으로 종교 제의에 활발히 참여했다. 

절세미인이었으며 기이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진 히파티아는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885년에 영국의 라파엘 전파 화가 찰스윌리엄 미첼 charles, William Mitchel(1854~1903년)은 극적인 자세를 취한 히파티아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 속에서 히파티아는 벌거벗고 제단 앞에 서 있다.
(제단은 히파티아가 사원에서 살해되었음을 의미한다). 길게 흘러내리는 금발은그녀의 몸을 감싸며, 그녀의 시선은 지식과 과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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