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눈앞을 가로막는 어둠을 막막하게 바라보고 있었을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집을 팔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건당연한 일이었어요. 당신과 나는 무엇이든 팔아야 먹고살 수 있는 시간 속에서 떠밀려가는 존재들이었으니까요. (2017) 

 무엇인가를 파는 곳에는 무엇인가를 사려는 사람들만 오기 마련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돈을 내고 사는 것은 대개는 자기에게 없는 것들이죠. 충분히 있는 것들을 굳이 돈을 내고 사려 하지는 않더라고요.

너무 많은 말과 너무 많은 얼굴에 휘둘리다 보면 머무를자리 없이 허우적거리게 된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올 수없는 진창 속으로 떠내려갈 것만 같다. 다가오는 호의도 힘들고보여줘야 할 호의도 힘들고 떠나보내야 할 호의도 힘들다. 

추한 것을, 무례한 것을, 염치없는 것을 매력으로 삼는일들이 너무 많아졌거든요. 매력은 작은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대놓고 욕을 퍼붓고, 눈앞에서 혐오를 드러내고, 뻔뻔스럽게 욕심을 부리는 것으로 차이를 만들려고 애써요.
그러다 보니 잘 드러나지 않는 곱고 순한 것들이 자꾸 사라져요.
자극적인 매력 하나가 나타날 때마다 보이지 않는 매력 하나가사라지고, 반짝이는 예쁨 하나를 얻을 때마다 묻혀 있는 예쁨 하나를 잃어요. 매력은 발굴하는 사람의 몫이어야 하거든요. 강요하고 발산하는 매력은 오염되고 말아요. 대가를 요구하고 대가를 지불해야 해요. 아니, 그런 대가가 아니고요, 모두 망가져 버리는 거 말이에요.

그 순간 너는 아름다움의 비밀을 풀었다. 천국에는 왜
‘만지지 마시오‘ ‘눈으로만 보시오‘ 같은 푯말들이 군데군데 붙어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름다움은 손에 닿지 않아야 완성되는 것이었다. 너는 천국을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두기로 했다. 손으로 만지고 혀로 맛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싶어요동치는 마음을 싼값으로 달래는 법을 배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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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은 말 - 시인의 일상어사전
권혁웅 지음, 김수옥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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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아직 언어를 배우지 않았다. 이것은 아기가 세사이분절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기 자신이 언어에 의해분절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기는 언어 이전의 살肉)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지만 거기에 어떤 설명도 덧붙일 수 없는 그런 살이다. 우리가 예쁘다, 매끄럽다, 부드럽다.
와 같은 말로 설명하려고 했던 원래의 그 살결 그대로 아기는있다. 하지만 어떤 언어도 아기의 그 예쁘고 매끄럽고 부드러운 살결을 형용할 수가 없다.

법이 허용하는 어른의 한도는 19세다. ‘17대1‘이 그 자신이 허물을 벗는 경계를 표현하는 말이라면 19금‘은 외부에서 부과한 사춘기의경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왜? 19도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는 18이 있다. 온갖 수가 합성된 수다. 이미 17을 넘었는데 다시 19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저 말이 욕이 될밖에 특툭 튀어나올밖에.

 이모는 정반대다. 삼촌이 부계라면 이모는 모계다. 삼촌이아버지나 장자와 권력 승계를 두고 다툰다면 이모는 어머니와 함께 소외된 이들의 연합을 이룬다. 어머니가 시어머니가되면 이모는 소외된 이들에게서도 다시 한 번 소외된다. 이모에게는 어떤 권력도 주어지지 않으며, 다만 자애로운 어머니의 역할만이 주어진다. 그녀는 그림자 어머니‘가 된다. 우리가 식당에서 이것 좀 치워달라고, 주문 좀 받으라고, 계산서가져오라고 이모를 부를 때마다, 우리는 칭얼대는 것이다. 엄마, 밥 줘. 엄마, 방 좀 치워줘.

 그런데 사실 본다는것은 보는 사람에게 속한 능력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에게 속한 능력이다. 내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아니라 대상이 내 시선을 갈취해 가는 것이다. 그이가 나를끌고 간 게 아닌데도 나는 그이에게 끌린다. 누군가 그립다고할 때 쓰는 말 ‘눈에 밟힌다‘가 수동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별을 통보받은 연인이 그래도 수긍하지 않으면 이런 말이 이어진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 더 좋은 사람 만나.‘ 자기와 상대를 저울에 올려놓고 쟀다는 얘기다. 그는 근수로 상대를 평가했다. "널 구속하고 싶지 않아. 욕심 부리지 않고 널놓아줄게." 그동안 상대를 우리에 가둬놓고 키웠다는 말이다.
이제는 방목하겠다는 거다. 만에 하나,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는 보험까지 들어두고, "널 오래 기억할게." 상대를 내 컬렉년에 추가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3차원의 사람이 2차원의 감옥에 갇힌다. 상대는 비교되고 추방되고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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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유사성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즉, 유사성이란 단지 차이의 한 가지 특수한 경우, 차이가 0으로 수렴하는 경우일 뿐이다" (Levi-Strauss 1971, 32). 물론 "수렴하다" 라는 동사에모든 것이 있다. 왜냐하면 저자가 지적하듯이, 차이는 "결코 완전히무효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식하는 것은 "객관화하기"다. 이것은 대상 내에서 대상에 내속된 것과 인식하는 주체에 속하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다. 주체에 속하는 그것은 그 자체로 부당하게 혹은 불가피하게 대상에 투사되어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인식하기는 탈주체화하기다. 

 다음 두 가지 세계 사이에 "세계의모든 차이" (Wagner 1981, 51)가 있다. 첫 번째 세계에서는, 원초적인것이 벌거벗은 초월성, 순수한 반인류적 타자성(구성되지 않은 것, 수립되지 않은 것, 풍습과 담론에 대립하는 것 )으로 경험된다. 두 번째는내재적 인간성의 세계인데, 여기서 원초적인 것은 인간의 형식을두르고 있다. 원주민 세계의 이러한 전제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끈질긴 인간중심적 노력에 급진적으로 대립한다. 그런 노력은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서의 인간, 주어지지 않은 것의 존재 그 자체로서의 인간을 "구축하려고 한다. 

이러한 자칭 존재론적 일원론은 결국 인식론적 이원론의 폭발저증식이라는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즉, 이믹emic과 이틱etic, 은유적인 것과 문자적인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재현과 실재, 가상과 진리 등, 계속해서 나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원론들이의심스러운 이유는 모든 개념적 이분법이 원칙상 유해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원론들이 특히 두 세계의 주민을 차별하는것을 두 세계의 통일을 위한 조건으로 요구한다는 데에 있다. 모든 ‘거대 분할자‘는 단자연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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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근대의 "다문화주의적" 우주론들과 비교해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사유가 가지는 변별적 특징 가운데 하나를 지시하기 위해 "다자연주이"라는 표현의 사용을 제안하게 되었다. 즉, 다문화주의적 우주론들은 자연의 유일성unicité과 문화들의 다양체multiplicité 사이의 상호함축에 의지하는 반면(신체와 실체의 객관적 보편성이 자연의 유일성을보장하고, 정신들과 기의들의 주관적 특수성이 문화들의 다양체를 낳는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개념화는 정신의 단일성unité과 신체들의 다양성diversité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 또는 주체가 보편적인것의 형식을, "자연" 또는 대상이 특수한 것의 형식을 재현할 것이다

 즉, 그들은 자기 집이나 마을에있을 때 자신들을 인간의 형상을 한 존재자처럼 지각하며(또는 그런지자가 되며), 자신의 행동 방식과 특징들을 문화적 외양을 가진것으로 파악한다. 자기 음식을 인간의 음식처럼 지각하고(재규어는피를 옥수수 맥주처럼 보고, 콘도르는 썩은 고기의 구더기를 구운 생선처럼 보는 등), 자신의 신체적 특성들(털, 깃털, 발톱, 부리 등)을 문화적 도구나 장신구처럼 본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회 체계는 인간 제도의 방식(지도자, 샤먼, 족외혼의 한쪽 집단, 제례 ……)으로 조직되어 있다. 

실제로 관점주의적 전도의 기본적인 차원 가운데 하나는 포식자와 먹잇감의 상대적이고 관계적인 지위에 관련되어 있다. 포식에관한 아마존의 형이상학은 관점주의에 지극히 호의적인 실용주의적, 이론적 맥락이다. 

 하나는 가끔 너무나 유사해 보이는 동종집단들 간의 작은 차이들에서 비롯한 나르시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다른 종들 간의 커다란 유사성에서 비롯한 나르시시즘이다. 타자들이 승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알 수 있다. 즉, 자기 종족중심적 타자와 애니미즘적 타자 모두 부족함 때문이든 지나침 때문이든 항상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난 쪽에 서 있다

바로 여기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친족관계 형성과정 이 성립한다. 즉, 이것이 포식의 강도적 안정화, 포식의 의도적 미완성으로서의 "재생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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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나르시스」의 주요 목적은 (내 분야에서 "종족지학적" 현재 시제를 빌려 오자면) 다음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즉, 인류학은 자신이 연구하는 인간집단에게 무엇을 개념적으로 빚지고 있는가? 만일 정반대의 방향에서 문제를 다룬다면, 이 질문이 어떤 영향을 발휘하게 될지 아마도 더욱 명확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인류학 이론내부의 차이와 변동들은 [해당] 인류학자가 태어난 학술적 맥락, 지적 영역, 이데올로기적 논쟁, 사회구성체의 구조와 국면들에 의해서 주로 (그리고 오직 역사 비판적 시점에서만) 설명되는가? 과연 이것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가설인가? [이와 달리] 인류학 이론들이 도입한 개념, 문제, 개별체, 행위자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들은 그이론들이 설명하고자 하는 사회들 (또는 인간집단들이나 집단들)이 가진 풍부한 상상적 힘pouvoir에서 자기 원천을 찾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관점으로 이동할 수는 없을까? 

따라서 "인간‘ (에게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거부하며, "인간"의 본질이란 없고, 그의 실존은 그의 본질에 앞서며, ‘인간‘의 존재는 자유와 비규정성이라고 말할 필요는 결코 없다. 오히려 "인간‘ 이란 무엇인가"는 너무나 분명한 역사적 이유들 때문에시치미를 떼지 않고서는 대답하는 것이 불가능한 질문이 되어 버렸다고 말해야 한다. 다른 용어로 말하자면, 고유한 것을 전혀 갖지않음이 ‘인간‘의 고유함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지 않고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종 사이에 [성립하는 관점주의, 존재론적 다자연주의, 식인의 타자성은 원주민적 타인류학alter-anthr-pologie의 세 가지 측면을 형성한다. 이런 타인류학은 서구 인류학의대칭적이고 전도된 변형인데, 이때 대칭이란 라투르가 사용하는 의미의 대칭을 말하고, 전도란 와그너가 말하는 전도된 인류학reverseanthropology의 의미와 같다. 

간략히 말하자면유럽적 프락시스는 주어진 물질 신체적 바탕(자연)에서 출발해
"영혼들을 만드는" 데에서(그리고 문화들을 차이 나게 하는 데에서)성립한다. 원주민적 프락시스는 주어진 사회 정신적 연속체에서출발해 "신체를 만드는" 데에서(그리고 종들을 차이 나게 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신세계의 수많은 인간집단이 (아마도 모든 인간집단이) 다음과 같은 개념화를 공유한다. 즉, 세계는 시점들의 다양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자들이 지향성의 중심들이며, 각자의 특징과 역량에 따라 다른 존재자들을 파악한다.
이러한 관념의 전제와 결론은 얼핏 연상되는 상대주의라는 통상적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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