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폴링 인 폴. Falling in Paul. 폴에게 빠지다. Fall이 아니었다. 한글로 된 제목을 들으며 상상했던 이야기는 없었다.

오랜 추억을 더듬는다거나, 혹은 애틋하기만 한 연인들의 이야기려니 했던 기대는 무너진다.

표제작인 폴링 인 폴은 교포 청년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이야기다.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일까.

 

뒷 표지에 쓰인 이 문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이 관계의 시작점이다.

"도대체" 폴과 나의 모호한 관계에서 바라고 원했던 것이 사랑이었던 것인가에 대한 모호함이다.

"어쩌다가"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시작된 관계의 방향과 운동성에 대한 의심인 것이다.

"폴에게"  미국인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나 한국적인(p78) 폴에게

"빠져" 버린 것이다. <한국말도 사랑에 빠지다. 이렇게 말하는 거라면서요. 영어도 falling in love 인데.(p73)>

 

#2.

사랑이 가능하게 하는, 즉 사랑에 빠지게 하는 싱크홀은 무엇일까? 도대체 어쩌다가 빠져버렸는지 알 수 없는 추락은 무엇이 붕괴되어야 시작되는 것일까?

빠진다는 건 떨어진다는 것이다.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단단한 바닥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한 빠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리적으로 말이다. 폴에게 빠진 '나'는 무엇을 붕괴시켜버린 것일까? 폴과 나 사이에 있어야 했던 무엇을 부쉈던 것일까.

 

백수린의 글들이 차곡차곡 꼬리를 물고 나온다. 아홉개의 글이 뿜어내는 향은 매캐하다. 잊고 있던 것들을 깨우기 좋은 그래서 눈물을 뚝뚝 흘려도 적당한 변명을 제공할 만큼 친절하다.

 

서로의 언어로 서로를 설명하며 다가선 만큼 되돌아 걷는 글들이 아프다. 어째서 나의 언어와 너의 언어는 이렇게 달라야 하는지..내가 기억하는 의미와 평가되는  서로 다른 말들의 오해는 얼마나 날카로운 상처를 내는지 자꾸만 입술을 축이게 된다. 저절로 앙다물어지는 입술. 말이 말을 삼키게 하는 글을 읽다 놓쳐버린다. 다시 한 글자씩 손끝으로 그 모양을 잡아가며 읽어본다.

해체되어도 살아나는 표독스런 생명력을 어떻게 감당해 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감자의 실종)

 

망가뜨리는 것보다 좋은 건 묶어버리는 거야. 동질감을 갖고 있던 사람에게 어느날 문득 느껴지는 이질감은 질투로 발화된다. 내게 없는 그것이 왜 안나에게만 있는 것인지. 어쩌면 처음부터 내 몫이었을지도 모를 것들에 끼어든 존재를 좋아할 수는 없다.  추론은 상상과 추측과 집착으로 점점 더 견고해지고 단단한 이론이 된다. 단단해 진 논리는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투는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공범이 있다면 더더욱 힘이 나지 않겠는가. 겨우 셋이 한 지붕을 이고 살면서도 다른 시선으로 서로를 본다. 서로를 사랑하고 질투하고 믿고 의심한다. 자전거 탓이라고 핑계를 대보지만..그래서 자전거를 망가뜨려버리려 하지만..쉽지 않다.

내것이 될 수 없다면 망가뜨려버리겠다는 치기는 차라리 묶어두는 것으로 가닥을 잡는다.

깨버릴 수 없는 것들은 때때로 묶어버리면 되겠다. 거기서 한 발자욱도 나오지 못하게 말이다.

가끔 무언가 용서를 하고 잊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 내용을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고 다만 어딘가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묶어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자전거 도둑)

 

모든 이야기들은 관계의 이야기다. 뻔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저마다의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파장을 일으킨다는 건 신선하다.

작가의 색이 있다. 황정은에게 기대하는 색, 김사과에게 기대하는 색, 기준영에게 기대하는 색..그런 모종의 틀이 있다.

작가의 창의성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독창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떤 질감 같은..황정은의 날것같지만 곰삭은 묘한 이야기. 김사과의 입체적이야기..기준영의 디테일한 숨결, 이런 것들은 이 젊은 작가들의 '결'이다.

 

#3.

 

백수린의 결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린"이라는 말 때문일지 나는 가지런한 잉어의 비늘들을 떠올린다.

그래, 가지런하게 놓여진 질서 정연한 이야기의 씨앗을 잘 품어 내놓은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나의 말과 너의 말이 얽히는 지점을 잡아내어 서로의 말을 찾아준다.

가지런한 이야기여야 가능하다. 얽혀버린 관계와 말들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잡다한 장치들과 과한 치장을 내려놓는다.

 

"나는 말을 마쳤다. 오랜만에 내 가슴에서 빠져나간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나는 천천히 관찰했다. 내 말이 가 닿았는지 부인은 다 알아들었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아들었을리가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p191)

"당신이 귀를 닫고 소란한 침묵 속으로 숨어들 때까지도 아무런 기미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 온전히 다 내탓인 것만 같았다. 기억 속에서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하는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뻐끔거리는 입 모양만 보일 뿐 당신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조차 텅 비어 있었다."(p235)

 

말들은 늘 길을 잃는다. 처음 의도한 방향을 찾아 제대로 가서 꽂히는 일이 거의 없다. 대충 비슷한 곳에 떨어져 내려는 것만 해도 안도할 만큼, 그렇게 말들은 방향을 잡지 못한다. 혀과 입술이 만들어 준 소리가 되는 순간 말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내 의지와 무관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위험하다면 차라리 입을 닫아버려야 하는가?

백수린의 글은 그런 것을 그대로 놓아두라고 한다. 굳이 파헤치지 말고 길을 잃은 말들의 처음을 찾아주라고, 그 처음에 가려던 곳의 좌표가 놓여있을거라고 말한다.

상대의 입술을 떠난 말의 길을 내 뜻대로 조종하는 일도 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이 낯설고 무례함 없이 단호한 글들이 좋았다.

백수린의 결은 차분하게 누운 빛나는 비늘이다. 그 곁에 따라 누워 이야기가 되어주지 못해도, 이야기에 반사되는 영롱한 다른 빛을 감상할 수 있다면 참 멋진 일이겠다 싶어졌다.

깊이 감추지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지도 않고 적당히 꺼내어 조용히 빛나는 이야기들이 여기 있었다.

 

이 책을 먼저 읽은 사람들은..설렌다고도 했고, 아리다고도 했다.

나는 사뭇 덤덤하게 읽어낸다. 이입이 된건지,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었던건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렇게 신선하고 가지런한 신인작가가 있다는 것에 한껏 기대가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이야기의 폭이 넓었으면 좋았을까?

조금 더 깊이 찔러도 좋을뻔 했어.

조금 더 절망적이었어도 괜찮았을거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이제 갓 기지개를 켠, 작가라는 사실이 아쉬움을 대체할 기대를 그 자리에 놓아둔다.

백수린의 결로 빛나게 될 다음 작품들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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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엘레지 -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이언 샌섬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1. 종이의 이야기

 

종이의 이야기다. 그 종이의 탄생과 발전과 소멸이라 하기엔 아직도 너무 많은 곳에 퍼져있는 과소평가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종이 비행기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색종이를 오리는 것도 좋아했다. 달력의 뒷면이나 신문지에 크레파스로 황칠을 하는 것도 좋아했던 일이다. 재미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비행기가 좋았던 것이고, 알록달록 색이 좋았던 것이고, 크레파스가 좋았던 것이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꼬마 아이를 위해 어머니는 깨끗한 면이 있는 종이를 잔뜩 모아주셨고, 철부지 꼬맹이는 정체불명의 그림을 그려댔다. 아무도 조용히 쓰임당하는(?) 종이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그런 것이었을까?

인간의 역사는 기록의 역사로부터 출발한다고 배웠다. 오래된 동굴의 벽화나 너른 들판에 그려진 그림, 왕의 무덤 벽화..그 모든 기록들이 지구 곳곳에 산재해있다. 그곳에서부터 인간의 기원과 삶의 역사를 부지런히들 찾아냈다. 그렇지만, 종이가 없었다면 그 모든 기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고 훼손된것을 복원하느라 우리는 아직도 서로의 역사를 궁금해하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종이의 발명과 전파는 인류가 인류로서의 품격을 지니게 만든 가장 큰 사건인 것이다.

목차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종이의 위대함? 혹은 다변성?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다

 

1. 종이의 제작  2. 종이와 나무  3.종이와 지도  4.종이와 책  5. 종이와 돈  6. 종이와 광고  7. 종이와 건축  8. 종이와 예술  9. 종이와 장난감  10. 종이와 종이접기 11. 종이와 정치  12. 종이와 영화 그리고 그 밖의 것들.

 

목차의 12번..그리고 그 밖의 것들..이라는 말이 가장 정확한 종이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퍼져 있는 종이들의 수고와 업적, 그리고 누명에 가까운 경멸을 우리는 수시로 보고 있지 않은가.

종이가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IT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편지지와의 이별을 예감했고, 종이책과의 결별을 예감했으나, 종이의 활용은 더없이 많아져 버렸다. 어느 곳에서든 누구든 출력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어쨌든 책의 내용들은 너무나 다채롭다. 인류학적 고찰과 발명의 역사, 정치사에 이르기까지 종이가 끼어들었던 모든 틈새에 대한 이야기를 내어놓는다.

 

아주 친밀한 친구의 비밀을 뒤늦게 전해 듣는 기분? 그런 기분이라면 맞을까?

 

 

#2. 에미넴과 종이

 

힙합 악동 에미넴이 우리 나라에 공연을 왔었다. 음악성보다는 무례함으로 더욱 유명한 가수의 공연. 분출하지 못하는 응어리를 가슴에 담아둔 사람들은 그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무례함은 팬에 대한 감사따윈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모두 다 숙지할 만큼 대단하고 유명했다. 그의 노래 중 airplane 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그의 랩이 시작되기 전 불려지는 사비부분의 서정성은 그의 랩을 극대화 시키기에 적절하다. 팬들은 그의 노래가 시작되고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공중으로 무수히 날아오른 종이비행기..무대 위로도 떨어지고 사람들의 머리 위에도 떨어졌다. 장관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종이에 실려 공간을 가득채운 순간이었다. 그의 노래와 퍼포먼스보다 압도적이었던 종이의 위용!

무례함의 대명사였던 그가 머리 위로 커다란 하트를 만들어보인다. 유례없던 일이다. 물론 모든 것을 떼창으로 화답해준 놀라운 팬심에 그가 감동했을지도 모르겠지만..그의 공연 중 압권은 종이비행기였다.

"비행기" 가 아니라 "종이" 비행기였다는 것.

 

# 3. 연인과 종이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사람들은 댓글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거나 좀 더 친밀하게는 쪽지를 보내거나 좀 더 진지하게는 이메일을 쓴다. 동영상이 편집되기도 하고, 사진이 들어가기도 하고, 그래픽이 첨가되기도 하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것들을 서로 교환한다.

어느 날, 문득 고지서로 넘쳐나던 우체통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꼭꼭 눌러 쓴 흔적이 역력한 글을 읽으며 울컥해졌다. 종이에서 그 사람의 목소리와 체온이 느껴지는 것이다.

서툴게 그린 그림과 색색으로 덧칠한 시 한 편까지..

나는 그에게 편지를 받았다고 편지 봉투를 사진으로 찍어 전송했다.

그리고 나서 화들짝 놀라 다시 미안하다는 사과의 문자를 보냈다.

그 날 오후 나는 그에게 답장을 썼다. 답장을 쓰면서 온마음이 들어가는 걸 확인 할 수 있었다. 명필이 아니어도 좋을, 솜씨좋은 화공이 아니어서 더더욱 좋을 그런 어눌하고 서툰 편지에 오롯이 마음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우체국까지 한참을 걸어가 옆에 놓인 물풀 대신 침을 발라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편지를 담고 콩콩 거리면서 뛰어가 전할 것도 아닌데 한참 동안 우체통을 쓰다듬었다.

돌아오는 길에 몇가지 단상이 떠올라 주었다. 서툰 글씨로 적어 내 가방에 넣어주었던 어떤 이의 쪽지, 매일처럼 우체통을 살피게 했던 사랑하는 이의 편지, 죽어도 헤어지지 말자던 친구와 함께 쓰던 일기장..

그것들이 아직도 오롯이 남아있는 건 종이 위에 적힌 약속들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간직하고 보관할 수 있던건..추억과 기억과 사랑을 보관하는 종이의 역할은 참으로 지대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그렇게 종이 위에 조금씩 그림을 그려가곤 했다.

 

#4.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책의 부제일 것이다. "페이퍼 엘레지" 왜 하필 엘레지 일까? 블루스도 발라드도 재즈도 아닌 엘레지여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종이의 쓰임은 여전히 다양하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다양화 다각화 되어질 것이 분명하다.

종이로 집을 짓기도 하고, 옷을 짓기도 하니 말이다. 그럼에 따라 종이도 다양하게 변신하고 있다. 젖지 않는 종이, 불타지 않는 종이..기타 등등..

문제는 이 많은 종이들이 나무들의 목숨과 맞바꿈되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대체제들이 개발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상당량이 나무들에게서 나온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나무들이 이렇게 소모되어도 좋은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절박해지는 지점이다. 나무들이 지켜내야 할 지구의 생명들이 있으니 말이다.

종이의 발달이 인간의 문명과 문화와 역사에 엄청난 기여를 했지만 그와 더불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는지도 모를일이다.

숨통을 내어놓고 편리를 맞바꾼 것은 아니었을까?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비밀을 엿본 댓가를 지불하라는 준엄한 요구를 들은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설움에 겨운 엘레지여야 했던 것일까?

소중하고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이대로 이어질 수 만은 없을 수도 있다는 설운 노래인 것 처럼..?

 

#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종이를 쓸 것이고, 종이와 살아갈 것이다.

종이에 쓸 것이고, 종이에 쓰인 것을 읽으면서 말이다.

대체제의 개발이 소비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종이 비행기를 접어 바다에 날리는 사치스러운(?) 내 놀이를 당분간은 계속할 것 같다.

종이의 문화사.

요즘은 쉽게 쓰는 것이 대세인가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렵지 않게 읽혀지는 것인 좋았다. 종이의 일생(?)을 담은 대하소설을 읽어낸 느낌이다.

 

문득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문득 노란 종이배도 만들고 싶어졌다.

문득 종이가 애틋해졌다.

 

 

 

겉표지를 벗겨보니 우표의 뒷면같은 표지가 나온다. 편지를 써야겠다.

종이가 종이를 종이에게 종이를 이용해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종이의 시대가 정점에 달한 것이다. (p43)

종이는 모든 것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궁극의 맥거핀이다.

"인쇄공, 디자이너, 비서, 식자공, 평론가, 작가, 사환, 잉크와 제책 장인, 삽화가, 서문 저자, 비평가들의 덕분에 인쇄된 단어가 강렬하고 집요한 희망을 지닐지라도, 종이는 유기적 물건이라서 길가의 소나무처럼 언젠가는 소리 없이, 파멸을 일으키는 붕괴 속에서 바다의 아귀에 잠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
조각조각 파편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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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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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자기계발이 주제가 되는 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슷한 논조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에게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는 전개되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변화하고 (이는 체제에 순응하고로 읽히기도 한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체제의 문제나 사회정치적인 해결책은 없다. 사회정치적 모순과 체제의 불합리함을 뒤흔들거나 무엇이 개인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가에 대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개인의 의지의 문제로 귀결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계발서에 집중하고 환호한다. 어쩌면 아무리해도 안되는 것에 대한 위로를 받고 싶거나, 글쓴이의 때때로 무례한 지적에 마조히스트적인 대리쾌감을 느끼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일까? 요즈음 대다수 청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절박함과 결핍으로 점철되어있다.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자격증과 시험을 통과하며 그것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켜줄 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노력들을 보아주지 않는다. 더 노력하라고, 잘못된 선택이었노라고 야멸차게 밀어내고 있다.

선택,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얼마나 더 있을까?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것을 얻어야만 하겠지만, 그 역시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청춘으로 당연히 아파야할 것들이라고 낭만적으로 조언을 던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먼 훗날 뒤돌아보며 웃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함만으로 살아내라고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선택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권리일 수 있다. 자신이 한 선택에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하다. 그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아닌것이었는지는 선택한 주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맞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혹은 처음부터 “옮음”이 전제되지 않은 선택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건 하나를 사는데도 꼼꼼하게 리뷰를 읽어내리고 비교를 하며 가장 좋은 걸 선택하는 것이 요즈음의 추세다. 그렇게 해야만 세상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 문제가 되었던 가습기 사건이나, 요즘 세간의 문제가 되고 있는 sns 카카오톡의 문제도 그렇다. 그것을 선택하고 사용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것인가?

잘못된 정보와 제품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문제는 없는 것인가?

“그러게 왜 그런걸 선택해가지고..”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읽으며 생각해본다.

개인적 행위가 될 ‘선택’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가.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면..

“선택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필수적인 능력이다. 개인이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곧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우리가 선택을 오로지 전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그래서 경제 이론과 소비자의 관점에서 선택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견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을 인간의 정신 및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파악하는 더 폭넓은 이해 방식이 필요하다. (...) 선택이란 관념을 강요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차이와 인종적.성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선택 이데올로기가 지금껏 승승장구해 온 원인이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p209~211)

선택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문화적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선택은 본질적으로 변화를 위한 행위인 것이다. 좀 더 나은, 혹은 좀 더 올바른 것에 대한 바람이 근저에 깔려있는 행위여야 한다. 좀 더 좋은 것을 위한 선택이라면 그것이 도외시되거나 거부되어서는 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택이 환영받지 못한다.

그 사회 전반을 꿰뚫고 있는 지배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 혹은 집단의 선택을 달가워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좀 더 나은 것을 위한 선택일것이나 이미 기득권을 쥐고 있는 그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반체제라는 딱지를 붙여 사회로부터 그들을 밀어내려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인 반공이데올로기가 선택을 강제하고 있는건 아닐까?

쉬운 예로 근로자의 복지와 권익을 향상하기 위한 노동조합의 결성과 가입조차 당연하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시와 우려의 눈총을 받아내야 한다. 어떤 개인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려 할 때, 주변의 반응이 다양하게 나오게 되는 것만 보아도 말이다.

 

어떤 것을 선택했을 때, 그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대부분 비슷한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이라면 대부분은 기피하게 될것이고, 또한 그것이 사회적 지위획득에 걸림돌이 되어질것이라는 불안이 가중되어지면 기득권세력이 아님에도 기득권세력인양 행세하며 보호받기를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선택은 개인의 욕구와 결정이라기 보다는 사회전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통제되고 제어되는 선택이 되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은 자신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명제이다. 그러나 그 주인이 진짜 주인이 아닌 권위자나 통념에 사로잡힌 존재라면 삶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것이다. 권력과 체제의 주입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행해지는 선택은 과연 “나”의 선택인 것인가? 반문해야만 한다. 다분히 개인적이어야 할 행위에 체제와 집단의 이익과 요구가 깔리게 된다면 그것을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또한 개인의 선택이 발전적 변화를 위한 작은 몸짓이 아니라 고착화된 부정과 부패를 지켜내는 단단한 산성의 벽돌로 자신도 모르게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선택은 합리성과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개인의 이익과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가차없이 버려도 좋다는 선택의 의지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기 시작했고, 더불어의 의미는 점점 퇴색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가당찮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어쩌면 우리가 하게 될 선택은 단순하게 설명될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함께” VS “소수의 성공” 혹은 “발전적 변화” VS “수동적 유지”.

단어의 호감도로 보아도 뻔하게 보이는 선택지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그것을 인정해도 좋을지 자신의 상황과 사회적 지위를 계산하고 있는 것 뿐일 것이다. 또는 지금까지 이루어 온 것들에 대한 보호욕구가 발동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루어낸 것인데..

얼마나 어려운 선택들을 하고 현재의 지위에 올라섰을까?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써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도 된다. 그러기에 연민이라는 감정을 갖게 되기도 하는 것일게다.

 

얼마전 어떤 연구결과를 보았다.

“최근 미시간주립대 연구팀은 노력과 선천적 재능관계를 조사한 85개 논문을 대상으로 이 분야 연구 중 가장 광범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 결과 학습 분야에서 노력한 시간이 실력의 차이를 결정짓는 비율은 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음악·스포츠 등에서는 실력의 차이에서 차지하는 노력 시간의 비중이 20~25%였다. 어떤 분야든 선천적 재능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대가가 될 수 있는 확률은 높지 않다는 결론이다. 또 선천적 재능과 함께 조기교육이 성공의 주요 요인이라고 했다.

미시간주립대의 연구결과는 선천적 재능보다 꾸준한 노력이 대가를 만든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완전히 뒤집게 됐다. (2014.7.24다양한 일간지)“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고, 노력의 선택을 강요했던 사회는 재능에 의한 성공을 폄하해왔다. 예를 들면 재능있는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식으로 말이다. 과연 그랬는가?

노력하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끝없이 노력하라고, 노력이 부족하다고 강조하던 이들의 말은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과연 노력이 부족해서였는가?

선택이란, 이렇게 비합리적인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선택은 인간이 갖는 가장 숭고한 행위일 수 있다.

하루를 살아내는데도 수천,수만의 선택을 하며 살아낸다. 그 속에 과연 자신의 의지가 온전히 발휘된 선택이 몇 개나 있는지 의문이 된다. 통념과 지배이데올로기에 익숙해진 복종의 선택은 아니었는지, 나의 선택으로 고통을 이어가야했을 이웃은 없었는지 말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은 자신이듯, 선택의 주도권도 자신이 갖아야 한다.

또한 선택의 근저에는 “더불어 함께 변화 발전하는”이라는 대전제를 작용시켜야한다.

그런 선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수 있다. 그 후회 역시 건강한 선택의 동력이 되어지도록 하는 것 역시 스스로 선택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쉬운 언어와 예시로 농도 짙은 질문과 이야기가 전개되는 책의 구성이 좋다. 레타나 살레츨의 필력과 사상적 기반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만, 역자의 시각과 힘 또한 만만치 않았던 책이라고 생각된다.

적당한 분량으로 어렵지 않게 읽히지만 그 무게감만큼은 가볍지 않다.

수없이 반문하고 되짚으며 읽게 되는 책이다.

 

내 선택의 주인은 “나”였는가? 자꾸 되묻게 된다.

"선택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필수적인 능력이다. 개인이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곧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우리가 선택을 오로지 전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그래서 경제 이론과 소비자의 관점에서 선택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견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을 인간의 정신 및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파악하는 더 폭넓은 이해 방식이 필요하다. (...) 선택이란 관념을 강요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차이와 인종적.성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선택 이데올로기가 지금껏 승승장구해 온 원인이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p209~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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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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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공통분모

 

어릴 때 그랬다. 방학식을 하는 날이면 방학숙제가 빼곡히 적힌 가정통신문을 보며 방학때는 시간이 천천히 갔으면..하는 바람을 품기도 했다.

일단 학교를 안가도 된다는 여유로움과 아침부터 놀아도 된다는 즐거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숙제의 부담은 즐거운 시간을 하나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과 이어졌고 포기할 수 없다면 시간을 늘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36시간이나 40시간쯤 되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랑 더 오래 놀 수 있고, TV도 더 많이 볼 수 있고, 늦잠을 오래오래 잘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철없던 바람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살아오면서 누구나 한 두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음직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을 때,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가는 사람을 배웅할 때, 어른이 될 준비가 안되었을 때...등등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적어낸 서평들을 보면서 낮은 탄성을 질렀던 것은, 이런 생각이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미래로 향하는 타임머신이 나오는 글이나, 자고 일어났더니 미래에 와있다거나, 혹은 시간이 멈추어버린 순간의 이야기들은 때때로 접해보긴 했지만 시간이 조금씩 늦어진다는 건..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시간이 느려지면 좋겠어. 라고 생각한 것이 "나" 뿐만이 아니었으며 "나쁜"마음도 아니었다는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책을 펼쳐본다.

 

#2.

어느 날부터인가 시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한다. 해가 뜨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한낮이나 되야 해가 떠오른다. 지구의 자전이 조금씩 느려진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슬로잉'이라고 불렀다.

특별한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열한살의 소녀 줄리아와 그의 가족들 역시 지구라는 공간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슬로잉으로부터 비껴갈 수 없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한시간은 60분, 하루는 24시간, 일주일은 7일, 한달은 30일, 일년은 12달의 의미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조금씩 느려지는 시간들은 며칠씩 낮이 이어지고 며칠씩 밤이 이어지는 상황에 이르른다. 

시간이 느려짐과 동시에 중력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더 강력한 중력이 작용한다. 일조량을 맞추지 못하니 식물들이 말라가고 식물을 먹이로 삼는 작은 동물들이 죽어가고, ..

연쇄적인 생태계의 파괴가 이어진다.

수천년,혹은 수만년 익숙해진 "하루"라는 싸이클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변화에 맞게 진화해 온 인류,혹은 인류를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맞게 되는 파괴의 시간인 것이다.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공포'이다. 지구의 종말이 찾아올까?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저마다 이 공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종교적인 대안을 따라 움직이거나 생필품을 쌓아두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지구 밖의 어디쯤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느려진 지구 위의 생물체들이 아주 빠르게 집단 이동하거나 집단 페사하고 있지 않았을까?

전쟁 중에도 꽃은 피어났다.

슬로잉의 재앙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라기 시작했다. 이전의 시간들 속에서 익숙하게 지냈던 시간이 아닌, 폭력적이기까지 한 시간을 살아내기 시작한다.

성장을 하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며 위로를 하고 상처를 주고 보통의 아이들이 자라듯 그렇게 성장한다.

물리적 환경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의 정서적인 부분도 침해되고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끌어안으며 살아낸다.

그 삶의 질이 어떠했는가보다 그 삶의 가치가 어떠했는지를 물으며 말이다.

"존재함"

온전히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던 사람들과 줄리아의 이야기가 조근조근하게 그려진다.

 

 

#3. 표지


 

표지가 독특하다. 파란 표지 위에 송송 구멍이 뚫려있다. 커버를 벗기면 여자아이의 옆모습이 그 밑에 있다.

마치 행성들의 군집처럼 노랑과 오렌지색으로 점점이 찍힌 제목과 구멍들을 손끝으로 문질러보면 그 느낌이 좋다.

우주를 표현하고 싶었던걸까?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저 여자아이는 아마 줄리아일지도 모르고, 나와 내가 아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환경의 무자비한 변화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낼 가치가 있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건지도 모르겠다.

책상위에 던져놓고 슥슥 표지를 문지르는 것이 재미있다. 오톨도톨한 느낌..밋밋하지 않은 시간들이 그 사이에 끼여있는것 같다.

 

#4. 그래서.

어쩌면 황당한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고, 뭔가 공포에 휩싸여 어쩔줄 몰라하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파란 표지가 보여주는 것처럼 단지 '절망'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시간을 늘이거나 줄여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며, 사소하게 생각되는 작은 변화가 가지고 오는 파괴적인 상황에 대한 우려까지 하고 있는가 되묻게 되는 것이다.

여름 장마철..

한 사나흘 비가 내리면 우울감에 몸서리를 치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렇게 변화한 환경에 휘둘리는 여린 존재이지만, 어쨌든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 때, 그 곳에 있었음을 자랑스러워해도 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악한 상황에서 만나는 소중함의 의미. 간절함의 의미. 그 의미들이 어떻게 사람을 키우는지도..

 

  



"그 말을 잊지마, 알았지? 인생에는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 것도 있어." (p360)



이윽고 두 아이는 젖은 시멘트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지극히 단순한 진실, 그러니까 이름과 날짜 그리고 이 글을 새겼다. 우리는 이곳에 있었다.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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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도를 사랑한다 - 경주 걸어본다 2
강석경 지음, 김성호 그림 / 난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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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경주

마음만 먹으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의 고도.

주말에 산책을 가자고 철썩같이 약속을 해놓고, 앓아 눕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늘 거기 있어서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임에도 큰 맘을 내야 가게 되는 곳.

천년의 비밀을 품고 있는 곳이라 그런걸까?

경주를 걸으면 골목마다 숨겨진 이야기들이 흘러나올 것 같다. 보도블럭 사이에도 담장 밑에도 누군가 꽁꿍 묻어둔 신비한 설화 하나쯤은 있을것만 같다.

고등학교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왔었다.

그 때는 수학여행 = 경주. 그 외의 것은 상상도 계획도 안했던것 같다.

첨성대를 돌아보고, 왕릉을 보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고, 사진을 찍고..깊은 밤 선생님들 몰래 압수 당하지 않은 불순한 음료를 마시며 놀았던 기억이 더 오래 더 많이 떠오르는 곳이 경주다.

그렇게 밤을 새워 놀고, 길고 긴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걸려서 되돌아온 곳.

어린 눈에, 친구들과 놀 궁리로 가득한 눈 속에 남아있는 경주의 이미지는 흐릿하고 빈약하다.

다만 뭔가 빛나는 이야기가 있겠구나 하는 기대는 있었다는 것이 빈약한 기억 속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경주의 지도..사실은 책의 표지다. 표지를 펼치면 이렇게 지도가 나온다. 나름 참신하다. 정혜윤의 '여행,혹은 여행처럼'도 그랬다.

책을 읽다 불현듯 경주에 가고 싶어진다면 요긴하게 쓰일것 같다.

 

#2. 주소록.

 

작가님의 경주 이야기는 구석구석 살갑다. 맛있는 빵가게와 갈비집, 산방등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앙증맞게 같이 쓰여있다. 꽤 유용하겠다.

핸드폰을 들고 '경주 맛집'을 검색해서 유명하다는 어느 곳을 가보는 것 보다, 이야기를 따라 이야기의 맛을 찾아간다면 나 역시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작은 따옴표 하나쯤 받아도 좋지 않을까?

그래서 주소록이라는 작은 제목을 붙여본다.

경주에 오래 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따라 읽다보면 구석구석 찬찬히 안내하는 살가운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여행기가 아닌 산책기가 적당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조용히 걷는 것 만으로 숨을 쉬듯 이야기가 전개되고 따라가게 되는 ..

 

감은사지.

한 때 그랬다.

울적해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으면 훌쩍 차를 몰아 감은사지터에 가곤 했다.

흔적만 남은 그 터의 한 쪽에 쪼그려 앉아 저 위에 있던 것들은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했다. 왜 그자리에서 버티지 못했냐고 노려보며 분풀이를 하기도 했다.

세월이, 시간이 지나며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불안은 그렇게 질 낮은 분노로 자책의 우울로 감은사지 터를 귀신처럼 걷게 했었다.

처음보다 깔끔하게 정리되고 연꽃이 무성하게 핀 연못도 보기 좋아졌지만, 나는 스산하기 이를데 없는 그 감은사지의 터가 좋았다.

넋을 놓고 앉아 꺽꺽 울어도 나무라거나 뭐랄 것 없던 텅 빈 자리..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서 구석에 쪼그려 앉으면 어둑해질 때까지 사람들과 부딪힐 일이 없던 그곳이

좋았다.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책속에서 만난 감은사터 이야기는 내 비밀을 아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 처럼 설랬다.

이젠 조금 밝은 표정으로 감은사터에 가볼 수 있겠다.

 

#3.책 속 볼 거리.

경주에서 태어난 경주의 화가(?) 김성호님의 그림들이 볼만했다.

주로 경주의 새벽풍경들이었는데..

 

<새벽- 동네 슈퍼.>


<새벽-골목길>

 

두페이지에 걸친 그림들도 선선하고 좋다. 자꾸 "동네 점방"이라 부르고 "가로등"이라고 부르게 되는 저 두 그림은 제목을 혼용했던 미안함에 꺼내본다.

그림만 넘겨보는 재미도 쏠쏠하겠다.

 

 

#4. 걸어본다.

 

걷는다는 건 시간을 딛는 일이라고 늘 생각했다.

흘려보내는 시간, 겪어내는 시간이 아닌 시간을 딛고 이야기를 심는 일이라고 말이다.

굳이 경주가 아니어도, 굳이 오래된 도시가 아니어도 걷는 일은 생각을 널어 말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발로 딛어 생각을 널어 말리는 것.

그것이 산책이리라. 걷기 운동이 아닌 산책이라면..

지도를 펼쳐 몇군데 길을 정하고 끄적끄적 낙서를 해가며 걷는 것도 좋겠다.

 

조만간 경주로 나들이를 가야겠다. 내 우울의 본부 역할을 충실히 해준 감은사터에 말이다.

 

 

월성에 봄이 무르익으면 맨발로 걸으리라. 초승달 같은 궁궐 땅을 휘돌아 문천이 완만하게 흐르는데 저 느림이 고도 경주의 속도다.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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