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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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곡예사

 

곡예사의 삶이라면 그 세세한 사연을 굳이 꼽지 않아도 뭔가 아릿하다. 사는것 자체가 곡예일지도 모를 아슬한 삶의 줄을 걷는다는 다소 감상적인 공감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상승은 그런 곡예사의 이야기다. 실제로 쌍둥이 빌딩 사이를 줄 하나에 의지해 건넜던 실존인물에게 영감을 얻어서 쓰여진 글이라고 한다.

 


 

이런 모습이었을까? 걸어야 할 길은 정해져 있고, 건너지 못하면 추락이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성공적으로 줄을 건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완벽하지 못한 채 비상의 꿈을 품는 것도 꼭 날아야 한다는 당위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 위에서, 땅이 아닌 곳에 놓여진 꿈을 꾸며 아름다운 하강을, 혹은 완벽한 추락을 이루어 내는 것이 그 목적일지도 모를 일이다. 떨어진다는건, 참혹한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발이 처음 힘을 주었던 가장 건강한 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일게다.

 

#2. 집시

 

곡예사..그 단어만으로도 아릿할진대..집시다.

늘 떠도는 외로운 별들의 노래처럼 그렇게 살며 사랑하며 집시로서 집시답게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다.

가장 천대받는 그들이지만, 그들의 눈동자가 빛나는 건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물결같은 이야기들 때문일게다. 그들의 영혼을 이어주는 이야기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다.

글 사이마다  나는 문득 헝가리 집시 아티스트 <Muzsikas>를 떠올린다.

완만한 구릉이 시작되는 곳에 작은 모닥불, 누군가의 바이올린이 연주되고, 모닥불의 빛을 온 얼굴로 받아낸 표정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낮고 천천히 시작된 노래는 어느 결에 물결이 되고 파도가 되어 구릉을 뒤덮는다.

이런 꿈을 꾸는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상승>

 

 

http://youtu.be/Gc-4Fb780Is

 

그들의 노래를 엿들어본다. 작년엔 내가 사는 곳에 온 적도 있는 팀이다.

 

# 3. 문득

 

먼 곳의 별을 보며 떠나고 싶어하던 때가 있었다. Annie Haslam의  Ocean gypsy를 귀에 꽂고 집시처럼 바람을 느끼고 별을 세던 시간말이다. 그 때, 아마 나는 내 자리의 위기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균형을 잃고 흔들리며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저 건너에 반드시 도착해야 하는 당위를 자신에게 설득하면서 말이다

단 한번도 아름다운 추락을 생각해본 적 없었던 시절,

떨어져 내리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지 못할것이라는 것이 더 두려운 나이가 되어서야 이 아슬한 줄의 건너편에 반드시 가닿을 당위를 내려놓는다. 물론 내려놓은 것들만큼 균형은 더 흐뜨러졌지만..괜찮다.

어차피 저 아래서부터 올라온 것이고, 저 아래에 내가 두고 온 이야기와 노래가 있으니 말이다.

태양의 자리와 나의 자리는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

딱, 내 노래가 닿을만큼의 자리일 뿐..

 

 

상승

p.415

 

  셜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멈춘 자세에서 목에 건 음료 병을 꺼내 아래로 떨어뜨리고 그것이 나비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는 균형장대를 내려 줄에 대고 두 다리를 공중으로 차올렸다. 얼굴에 피가 몰려 화끈거릴 때까지 물고나무 서기를 했다. 그러곤 다시 줄에 발을 내려놓고 똑바로 섰다.

  셜보는 사방에 펼쳐진 사막을 보았다. 간간이 초록과 빨강이 섞인 백만 가지 색조의 갈색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사막을 보며 아래서 따뜻한 공기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거기선 자신과 탁 트인 공간의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그의 뼈대는 튼튼하고 입은 촉촉하고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은퇴라는 단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물러났다. 그는 줄 위에 서 있었고 그렇게 서 있는 한 영원히 살 것이었다.

 

상승

작가
스티븐 갤러웨이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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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다행히도 모두 가지고 있다. 말 그대로 제안들..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의 제안. 작은 책자지만 야무지게 들어차있는 내용들을..살아가는 동안 한번쯤 그 제안들에 고개 끄덕여주는 시간을 만드는 여유가 있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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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권력 -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
사토 요시유키 지음, 김상운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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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그 내용이 어떤 악마적이거나 반인류적이며 비평등한 것인지는 정확히 인지되지 않으나, 어쩐지 그 어감만으로 무언가 억압과 굴레를 벗어내고 개개인이 주체가 되어 정치,사회,경제적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새로운 사조인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확한 개념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사고의 오류. 혹은 개념의 왜곡은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 이루어진다.

新자유주의. 그렇다면 자유주의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없을 수는 없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봉건적 공동체의 구속과 국가의 간섭을 배격하려고 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라고 사전적으로 정의된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봉건적 구속을 배격한다는 것이 얼핏 개개인이 주체화되고 스스로의 경제활동의 영역을 보장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어떤 경제적 기반도 갖지 못했던 기층민중들에게는 오히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사회적, 국가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한다.

지금에 이르러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어떠한가. 이 역시 사회체를 경쟁 원리로 가득 채우고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사회에서 배제해 가는(p10) 통치 기법에 다름아니다.

# 2. 신자유주의와 권력

작가는 이 책에서 목적으로 삼는 것은 신자유주의 권력에 대한 비판과 그 권력에 대한 저항 전략의 구축(p11)이라고 밝힌다.

1부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특성을 분명히 하고 그 비판을 시도한다.

-1장 :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일종의 국가에 의한 개입주의에 기초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개입은 경제 과정 자체에 대한 개입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법적 제도적 틀에 대한 개입이라는 점. 그런 개입주의는 사회의 모든 국면을 경쟁으로 에워싸고 빈부 차이의 확대를 통한 사회 양극화를 야기한다. 이렇게 형성된 권력은 시장원리의 내면화를 통해 자기-경영의 주체를 형성하고 그 모델에 적응할 수 없는 개인들을 가차없이 사회 밖으로 내친다.

-2장 : 신자유주의 권력이란 사회체 모든 국면을 시장화하고 리스크를 관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환경에 개입함으로써 통치를 행하는 권력이라는 것.

-3장 : 신자유주의의 이면을 이루는 정치에서의 신보수주의적 경향, 즉 주권 권력의 강화에 대한 고찰

-4장 : 권력이란 자본의 흐름, 즉 경제이며 그것은 욕망의 배치를 형성함으로써 주체를 복종화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5장 : 소수자-되기 라는 개념속에서의 탐구. 사회적 배제가 주체화 복종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또한 이런 통치에 저항해야 할 저항전략의 구성.

보론에서는 복종화/주체화가 단 한번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권력 장치들이 항상 주체에게 계속해서 행사하는 반복적 과정임을 분명히하며 저항전략으로서 권력의 ‘이타화’와 ‘재기입’개념에 주목한다. 이것은 권력의 내면화와 사회적 배제라는 권력의 두가지 작동원리에 대한 저항 전략이다.

# 3. 경쟁의 시대, 자유는 과연 존재할 것인가.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자유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좀 더 틀을 제시하자면, 복종하지 않을 자유와 경쟁에서 이겨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자유를 내어준다면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또한 어떤 선택이 더 유의미한 선택일까를 생각해보자.

일제강점기와 해방의 시기, 그리고 좌우 이데올로기의 충돌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봉건적 생산구조가 잔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맞게 되는 기형적 시장경제는 자본가와 노동계급사이에도 불평등한 관계, 기존의 계급관계를 떨쳐내지 못한 억압적 관계들이 유지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서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거나, 혹은 개인의 노력으로 사회적 신분상승을 이룬것을 “성공”사례로 일컬으며 시간은 왜곡된 경제관계를 숙성시켜왔다.

그 결과, 사회체 내부에서는 개인의 능력을 경쟁력으로 평가하기 시작했고, 부의 축적의 정도로 사회적인 성공을 판별하기 시작했고, 극단적인 사례로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자조적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한다.

그 어떤 경제기반도 갖지 못한 채 시작된 저소득층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또한 그들 사이의 경쟁을 통해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이익을 보게 되는 상황. 그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은 좀 더 구체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법적인 규제와 법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예를 들어, 나의 노동력을 100의 댓가로 제공하고 자본가는 나의 노동력을 정당하게 100만큼의 가치로 지불해주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그런 이상적인 계급간의 거래는 없었다. 임금이 필요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 혹은 주체화를 통해 경쟁을 하고 더 나은 경쟁조건을 노동력을 제공하는 측에서 제시해야한다. 더 많은 능력을 내어놓고, 더 낮은 조건을 요구하게 되는 것. 그것이 가능한 시장경제구조는 자본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국가와 권력은 자본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과도한 개인경쟁을 부추기며, 마치 그것이 정당한 기조인양 권력의 틀을 갖추어간다. 소수자로 대변되는 이민자나 외국인 소외계층은 그나마 최소한의 보호조치의 틀에서도 내쳐지게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경쟁을 강요받는 개인이 버텨낼 수 있는 방법은 “복종”이다. 언제라도 빼앗길 수 있는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부당한 요구와 경제외적인 굴종을 견뎌내야 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부조리를 이야기하거나 부당하게 해고당한다고 해도, 이것이 개인의 능력과 경쟁력 부족이라는 시선으로 비추어지고, 이는 무능한 사람으로 다시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을 개인의 무능과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권력과 경제의 결탁 속에서 강요받는 복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체제 속에 순응한 채 단지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한 굴종의 삶을 알량한 자유라 이름붙이고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책이다.

# 4. 어떻게 할 것인가.

신자유주의는 얼핏 경제적인 부분에만 국한된 사조인듯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체 전반을 관통하는 억압의 이데올로기이다. 경제기반 확보를 위한 권력의 유착, 권력의 강화를 위한 위임독재의 형태. 결국은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보수세력의 확장과 강고한 법의 힘을 발휘하려는 힘이 작용한다. 이것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평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써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개개인의 존재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의 구조는 개혁되어야하며, 그것이 권력에 의해 자행되어지는 폭정이라면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다각적인 목소리들로 “옳지 않음”을 주장해야한다.

막연한 “뭔가 잘못됐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요구해야 한다.

선의의 경쟁. 서로가 상승작용을 일으켜주는 경쟁, 발전으로 이어지는 경쟁이 아닌, 개인의 능력이 저평가되는, 혹은 그 능력에 과도한 책임과 결과를 안기는 경쟁이라면 단호한 거부가 가능한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

작은 실천에서부터 이어져야 할 것이며, 이것이 개인에서 공동체로, 작은 목소리의 엮음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책을 덮으며 들었다.

감정적인 억울함과 분노가 아니라 어디에서부터 이 모순이 시작되었는가를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많은 곳에 내 노동력을 선택받기 위해 싸게 내어 놓은 내 노동력의 가치를 제대로 획득해내기 위해서라도 이 시장의 모순과 권력의 횡포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발현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만한다.

“정당한 경쟁과, 정당한 보수와, 정당한 국가의 보호”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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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식탁 - 독성물질은 어떻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나
마리 모니크 로뱅 지음, 권지현 옮김 / 판미동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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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도서는 출판사의 지원을 받은 도서입니다


# 1. 먹을 거리를 믿을 수 없다.


색소를 넣은 고춧가루, 숙성이 아닌 썩은 젓갈, 향신료로 범벅이 된 불량식품,한동안 떠들썩했던 쓰레기 만두, 공업용우지를 넣었다던 라면..심하게는 다른 나라의 일이지만 멜라민 분유파동까지..

조금만 되짚어보면 참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식탁을 위협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대처방법은, 불매. 그것으로 마무리되곤한다. 하지만 늘상 식탁을 고정으로 차지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대체식품을 찾을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유기농으로, 혹은 국내산으로 친환경으로 그렇게 조금씩 주류를 벗어나보기도 한다. 조금 더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농약이 없는, 지렁이가 사는 밭의 것을 고르려고 애쓰게 되고, 그것이 마치 현명한 주부의 선택인양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러나..그 모든 노력들이 별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어떨까?

애써 평온을 찾아가는 식탁에 슬쩍 미소를 띤 채로 수류탄 하나를 던져넣는 손이 있다면 말이다.


# 2.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 할 진실


2004년부터 시작된 언론인 마리 모니크 로뱅의 추적(?)은 충격적인 실태를 보여준다.

이미 파괴되어진 토양이 생태계가 어떻게 그 죽음을 공유하고 있는지 그녀는 피해자들의 실례와 기업과 국가의 유착, 기업과 학자들과의 거래, 기업과 기타세력과의 야합등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그 어느것도 안전하지 않다는 결론 앞에 망연자실하게 만들지만, 결국 인간이 어떻게 건강하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반문이며 실천의 대안을 내놓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총 4부로 구성된 내용들의 제목만으로도 우리는 커다란 틀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1부 농약은 독이다.

2부 의구심을 생산하는 공장

3부 기업을 섬기는 규제

4부 내분비계 교란물질 스캔들


어쩌면 우리가 이미 알고있는 문제제기들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매체들이 이야기를 했었고 적당한 결론없이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지방 작은 동네의 아주머니들도 '무농약 사과'를 이야기하고 '환경호르몬의 피해'를 이야기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나 그런 피해들이 생겨나는 이유를 몰라도 말이다. 이렇게 많이 퍼져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피해들에는 어떤 이유들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주 쉽다. 

농약의 피해가 생겼을 때, 그 피해의 근원이 '농약'임을 밝혀내는 것은 피해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합적으로 사용된 여러 농약들 중 어떤 것에서 기인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업은 '농약'이라는 표현대신 '식물약제'라는 표현을 쓴다.

<농약이라고도 불리는 식물약제>, <식물약제라고도 불리는 농약>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쓰는 기업과 속절없이 당하고 마는 피해자들..

자, 이제 이 피해자들이 농부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움찔하게 해보자.

농약을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이들은 농부가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농약을 쓴 식물을 초식동물들의 먹고, 초식동물을 육식동물이 먹고, 그렇게 생태계 상위자리까지 오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초식동물들이 먹는 식물의 양은 얼만큼인지, 육식동물이 먹는 초식동물의 양은 얼만큼인지, 내게로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농약들이 희석되거나 배출되지 않은 채 그들의 지방에 고스란히 축적되어 전달되는지를 깨닫는다면 오금이 저리지 않을 수 없다. 



# 3. 수많은 화학물질의 위협속에서 살아남기.


화학물질이 우리들의 삶에 끼어들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2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연구되고 시행되었다. 인류의 역사를 놓고보면 이는 매우 짧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대량생산과 개발을 위해 제초제가 보편화되고,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 살충제가 개발되었다. 대표적으로 DDT같은 것들이 얼마나 쉽게 사람에게 사용되었는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휴전이후 우리나라에서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머릿니를 없애기 위해, 혹은 장티푸스등의 병원균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에게 직접 DDT를 뿌리곤 했었다.



심지어..전쟁과 가난으로 힘겨운 이들은 이렇게라도 병균을 없앨 수 있게 해준 사람들을 고마워하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이미 교란이 시작된 생태계와 그 결과로 환경호르몬들이 중세의 흑사병보다 참혹하게 번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방법은 찾아질 것이다.

더 이상 피해갈 곳이 없는 식탁의 안전을 개인의 노력과 방비로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는 매일매일 독을 먹고 있다>는 사실과, 그 독들이 해소되거나 희석되지 않고 몸 속에 쌓이며 다음 세대에게 태중에서부터 전달되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4. 빨리 온 만큼 천천히

해충을 빨리 박멸하고 순식간에 대량생산을 해내고, 빠른 농지를 개발한 댓가는 죽음의 식탁이라는 결과를 내어놓았다.

다른 종들을 죽이고 올라온 생태계의 끝자리에서 인간은 자신의 종이 변이를 일으키거나 단종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것이다.

그렇다면..이제 돌려놓아야 한다. 이익과 지배와 통제가 아닌 공유할 수 있는 자연으로 말이다.

국가가, 기업이, 과학이, 그리고 인간이 공동의 책임을 지고 이 과오를 수습해가야만 한다.

무너뜨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되돌리는 시간은 아주 오래걸릴 것이다.

1000조각 퍼즐을 흩어놓고 다시 맞추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동안, 다시 조급증과 탐욕이 편리성이 틈탈 수 없는 규제와 원칙, 견제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누가 해야할 것인가.

감히..

몸 속에 0.000001마이크로그램이라도 농약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해자이며 가해자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해본다.

이 틀에서 자유로울 인류는 아마 없을 것이다. 어딘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지에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바람을 타고 물을 타고 퍼져 온 지구에 속속들이 배어있는 화학물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막연히 조심해야지..이러면 안되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막연한 의지로 끝나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 도서다.

전문용어들이 가끔 나오긴 하지만, 그리 어렵지않게 읽어낼 수 있다. 시리즈물로 나온 다큐멘터리처럼말이다.


식사는, 가장 존엄한 일이며, 식탁은 가장 고결한 장소여야 하지 않을까?

삶의 기초적인 것이 보장되어지지 않는다면..

무엇이 웰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길어진 평균수명..건강하게 살아남고 싶다는 건..과한 욕심인건가..책을 덮으며 고민이 시작된다.


결과가 없다는 사실이 위헙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위험을 분명히 밝힐 수 없다는 의미일 때가 많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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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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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맹가리..이 죽도록 예술적인 이름을 앞세운 글들은 얼마나 편파적 애정과 기대를 품게 하는가.

에밀 아자르..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 역시도.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p12)"

 

그렇다면 당신의 설명은?

이라는 호기심으로 새들이 날개를 접는 그곳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시도 언젠가는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단순한 생리적 분비 현상으로 연구되리라(p13)"는 그의 말에서 기대를 품는다.

 

그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여자의 대화는 참으로 묘했다.

 

"이 새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먼바다에 섬들이 있소. 조분석 섬들이오. 새들은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서 죽소."

"왜요?"

"모르겠소. 갖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왜 여기로 왔죠?"

"저 카페를 운영하고 있소. 여기 살아요." (p17~18)

 

어떤 대상에게는 죽음의 좌표가 되는 곳이 어떤 대상은 삶의 좌표가 되어지는 것.

희망은 절망의 밭에서 피어나거나, 혹은 절망의 변종으로 싹을 틔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희망이 고문이 되는 이유는 아마도 그 태생의 비밀때문이 아닐까?

 

 

# 2.

단지 "새"라는 소재 때문이었을까?

새들이 죽어가는 해변을 떠올리자 히치콕의 <새>가 자꾸만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새들이 잔뜩 내려앉은 공포의 해변..이 새들도 어쩌면 어두운 어느 밤을 선택해 자신이 날개를 접을 페루로 날아갈까?

하필이면 새였을까?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장소를 정하는 코끼리나 고래가 아닌 새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작품의 시작에서부터 되뇌이며 반복되는 말처럼 "이유가 있는" 일이었을까?

 

어쩌면 그 가녀린 날개를 접음으로 추락하는 순간의 마지막을 그려내고 싶었을지도 모를일이다. 추락이 곧 죽음임을..절망이 곧 죽음임을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 애처로운 날갯짓처럼 퍼덕이는 민망한 희망을 파도를 핑계삼아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새와 바닷가..그리고 세상이 끝인 리마의 어느 바닷가를 선택한 것이 설명되지 않을까?

세상의 마지막 지점까지 따라오는 희망이라는 것과 날개를 접는 순간까지 타협하고 거래를 해야하는 절망을 말이다.

 

 

#3

역시나 히치콕의 포스터 하나를 본다.

 



 

여자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새들.. 멋지다.

 

 

#4.

 

새들은 혼자 날아오르고 혼자 떨어져내린다. 무리를 지어 날더라도 다른 새의 날갯짓을 대신 해 줄 수는 없다.

태초의 생명이 올라왔을 바닷가 언저리 어딘가에서 삶의 끈을 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제가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고독의 끝에서 절망과 타협하며 희망을 지키는 것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댓가를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지독한 관계를 로맹가리는 눈물겹게 그려낸다. 열여섯개의 단편 중 첫번째 표제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시작을 서늘하게 해서인지..쉽게 다음작품으로 넘어가기 힘들기도 하다.

로맹가리와 히치콕과 새

남자, 그리고 여자..무표정하게 이 모든것을 지켜보며 흔적을 지우는 바다.

이 푸르고 시린 그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곧 바람이 불고 해일이 일어 모든 흔적을 지운 채 새로 배치한 캔버스처럼 새초롬한 표정을 지을것만 같다.

그리고, 새와 사람과 고독과 희망으로 그려지는 풍경이 채워질것 같다.

왜?

"모든 것엔 이유가 있으니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도 있는 법이니까.

중요한 건..<이유>가 있다는 것.

사람들 쓰러뜨리고 뒤엎고 바닥으로 내던졌ㄷ가, 두 팔을 뻗고 두 손을 들어올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가, 지푸라기가 눈에 띄는 순간 매달릴 시간만 남겨놓고 놓아버리는,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번째 파도에.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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