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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평점 :
도스토예프스키의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다 읽었을 때, 매우 뿌듯했었다. 고전에 대한 익숙치 못한 생각도 있었고, 분량도 부담이 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은 매일 조금씩 읽었었드랬다. 고전들을 읽을 때는 다소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뭣해서 한권 두권씩 구입해서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 불을 지른 건 장강명 작가의 < 재수사 >였다. "나는 아픈 인간이다(p.9)"라고 시작된다는 첫문장이 꽤 마음 속에 남았던 듯하다. 실상 < 재수사 >를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은 < 백치 >였지만, 이 책 < 지하로부터의 수기 >는 갖고 있는 책이었고, 분량도 작아서, 때마침 기회도 있어서 붙잡게 되었다. 하지만 얇은 책이라 만만히 봤던 나는 뒷통수를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아직도 얼얼할 지경이다.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세계에서 전환점이 된 소설이며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이라 일컬어진다. 그런데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 같다. 학생시절처럼 밑줄 치면서 정해진 틀로만 읽고는 싶지 않았지만, 다 읽고 난 후 작품해설이 좀 필요했던 이야기이다. 과연 나의 느낌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었다. 이 소설은 1부 「지하」로 마흔살의 남자가 주절주절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요즘은 미디어가 발달을 해서 그에 노출된 아이들이 점점 문해력이 저하되면서 문장을 읽고도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들 이야기 하곤 했는데, 어쩌면 당시 사람들이 나를 보면 똑같은 말을 반복할 것만 같다. 그래도 나름 책을 읽을 땐 책 속에 동화되어 간다고 생각했었는데, 「지하」 부분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책이 나를 밀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한마디로 머리가 지끈지근 아플정도로 이 사람이 어떤 말을 늘어놓는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저 기억나는 것이라곤 주인공은 관리로 일했으나, 좀처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먼 친척에게 거액의 유산을 받아 '지하'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은둔형 외톨이 같았다. 생각은 많으나 그것은 생각으로만 끝나고 실제로는 겉으로 표현조차 못하는 참으로 고약해 보였다.
2부 「진눈깨비에 관하여」에서는 1부보다는 좀 나은편이었다. 혼자만의 독백이 아니여서 읽기도 훨신 수훨했다. 주인공이 20대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관리 생활을 하고 있던 남자는 당구장에서 우연히 한 장교와 마주친다. 그에게서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화자는 꼭 결투를 해서라도 이 치욕을 만회하겠다고 하지만 그건 머리속에서만 흥분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표현도 못한다. 또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가 다른 친구의 환송회 소식을 접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오리라 생각하지 않는 것에 오기로 가겠다고 했고, 하인에게 월급으로 주어야 할 돈을 회비로 내면서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시간이 한시간 미뤄졌지만 아무도 그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환송회에서도 주목받지 못하다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고 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불쾌감은 모두 그의 생각뿐이었고,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그저 술에 도움뿐이었다. 친구들은 주인공을 제외하고 '그곳'으로 가자고 했으며 거기까지 쫓아갔다가 유곽에서 일하는 리자를 만난다. 주인공은 그야말로 강한 사람에는 약하고, 약한 사람에겐 강한 전형적인 인물인 것 같다. 리자와 자신의 하인인 아폴론에게는 거침없이 비하하고 막말을 쏟아낸다. 정말 찌질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문득 누군가가 떠올라서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씁쓸해질 뿐이다.
이 사람이 40대즈음에 스스로를 '지하'에 가두게 된 것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가뜩이나 나도 요즘엔 동적인 것보다 정적인 것으로 행동이 바뀌어 가고 있는데 주인공도 더군다나 타인에게 이렇게 행동을 하니 누가 좋아하겠나라는 생각이 든다. 때론 자신의 고립되는 상황을 타인 탓으로 돌리는 이들도 있는데 주의깊게 살펴보면 자신의 상황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주목받고 있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누구나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원래 작가의 말이나 작품해설들은 절대 보지 않는 편이지만, 이 책은 필히 '작품해설'이 필요했다. '지하'에서는 낭만주의와 이상주의를 양식으로 한껏 고양되었던 화자였지만 '지상'에서는 볼품없는 외모와 사회적, 경제적 지위로 인한 콤플렉스, 괴상한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우스꽝스러운 낙오자고 전락한다.(p.207)라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인 것 같다. 당시 시대상은 잘 모르겠지만(이래서 배경지식이 중요한가보다.) 어쩌면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이 팽배했기에 당시 시대상을 반영했던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