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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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잘 사귀어야 한다는 생각이 딱 드는 책이다.

공황 발작이 있는 케이트의 이야기를 시작을 해서 계속 케이트가 이끌어가는 그녀의 이야기인줄 알았다. 헌데, 중간중간 화자가 바뀌어 가고, 약간의 시차가 생겨서 퍼즐을 맞추면서 앞서의 사건에서의 의문점이 뒤에서 해결이 되며 읽혀나가는 참 재미있고, 참신한 이야기이다. 제목은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마치 312호에서 303호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것인마냥 느껴지지만, 서서히 옥죄어오는 공포라든지, 단지 훔쳐보는 것 외에 나 혼자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다른이가 있다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들이 벌어진다. 문단속을 소홀히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케이트는 집착하던 남자친구 조지에게 이별을 고했다. 요즘 빈번히 발생하는 사건처럼 조지는 케이트 주변에서 떠나지 않고, 그녀가 떠난 별장까지 찾아가 벽장에 가두고 자살한다. 이틀동안 벽장에 갇혀있다 구조되었다. 그리고 조지의 환영과 함께한다. 6개월간 사촌과 집을 바꿔 살게 되면서 케이트에겐 도전이었지만 안좋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이 참으로 아쉽다. 그래도 그대로 주저앉지 않는 케이트가 행복하길 기대하게 된다.


케이트의 친척인 코빈이 우연찮게 말려든 사건 때문에 인간관계까지 포기하게 되면서 헨리에게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끝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불행의 시작은 어디였는지, 왜 일찌감치 불행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아쉽기만 하다.


가독성이 참 좋은 책이기도 했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감에 문밖을 한번더 쳐다보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나의 인간관계도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것만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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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의 레퀴엠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3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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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3편.

우선 이 글귀부터 맘에 든다. 한편으로 끝내기엔 너무나도 아쉬운 캐릭터들이 많다. 그래서 여러편이 나오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다. 사건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이야기도 마치 또 다른 한편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시리즈가 될수록 주인공에게 애착이 더 진해지게 된다고나 할까. 아쉽게도 '나카야마 시치리'라는 작가의 책은 처음 접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저자의 전작을 눈여겨 보고 읽을참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후에는 미코시바레이지 변호사 시리즈의 앞선 두권을 모두 빌려왔다. 그의 매력에 빠지기는 참 충분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초반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이야기의 시작이 한국적 블루오션호의 사고라는 것이다. 세월호 생각이 나서 그리고 우리나라 작가의 책이 아니라 다른나라의 작가가 잠시 그 소재를 사용했다는 것이 약간은 불편했다. 어찌되었든 이 이야기의 피해자인 사람은 침몰하던 블루오션호에서 한 여성에게 구명조끼를 빼앗아 생존했고, 우연찮게 공개되었던 동영상때문에 기소되었지만 '긴급피난'이 적용되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가 미코시바 변호사의 어린시절 교관이었던 이나미에게 살해당한다. 그런데 이게 3편이다 보니 왜 미코시바가 악덕변호사인지, 왜 '시체배달부'인지, 그리고 이나미와의 관계가 앞선 이야기에서 언급이 되는지가 매우 궁금했다.


미코시바 자신도 죄를 지었었지만 현재는 변호사가 되었고, 악던변호사라 하지만 이번이야기에서는 은인과도 같았던 이나미 교관의 누명을 벗기려 애를 쓰고 있다. 또 피해자인 도치노 마모루는 과거 죄를 지었지만 무죄를 인정받아 뉘우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또 한사람 이나미 다케오는 도치노를 죽이고, 어떤 상황이었든 사람을 죽인것은 맞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겠다고 자신의 변호사인 미코시바의 변론에 반기를 든다.


영원히 이어지는 죄(罪), 한순간에 끝나버린 벌(罰). 심판 받지 않은 죄인, 속죄의 의미를 되묻다


어쩌면 한순간의 죄는 마치 꼬리표처럼 자신을 쫓아온다. 미코시바 변호사의 과거는 전편에 자세하게 나왔는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의뢰가 끊이지 않았던 그의 과거가 밝혀지고, 한순간에 개점휴업하다시피한 변호사가 되어버렸다. 솔직히 나도 살인을 저지른 미코시바를 벌을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평범하게 대하지는 못할것이다. 또 한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벌을 받지 않았다. 위급상황이었다고 해도 엄연한 살인인데도 불구하고 벌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무용담이 되어 버렸다. 그리 큰 죄가 아니어도 한번쯤은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것 같다. 죄를 짓고 그 후의 삶.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느냐, 여전히 무용담을 풀어놓으며 남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이 되느냐. 지은죄가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닌이상 전자의 삶을 살아가야되지 않겠는가. 물론 피해자의 용서를 받을 길이 없어도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로 뉘우치지 않는것이니 말이다. 이나미 교관도 범죄의 배경에 대해서도 공감은 가지만 그래도 그는 벌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정상참작은 받을수는 있겠지만 완전한 무죄를 받을수는 없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엄벌에 처해야 마땅한 일에 가벼운 형벌이 주어지기도 하고, 별것 아닌것 같은데 너무 무거운 벌이 내려지기도 하는 요지경 같은 세상에서 한번쯤은 깊이 고뇌를 해봐야하는 사항같다. 언제 배심원의 기회가 올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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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의 퍼즐
최실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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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난감스럽다. 분명히 예전에 읽은 이야기가 있는데, 제목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책이 떠올랐는데, 정리한 목록을 찾아봤지만 도무지 찾을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 책하고 비교하면서 읽으면 참 좋을 것을.. 이 기억력의 한계가 이리도 아쉬울수가...


일본의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긴 했지만 자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들은 북한에 적을 둔 재일교포라는 정도, 그래서 친분을 가져서는 안되는 뭐 그런정도. 어릴때 듣던 조총련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직도 잘은 모르겠지만 친북적 성향임에는 틀림은 없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책의 이야기는 조총련계 재일조선인들이 귀국선을 타고 북한으로 귀국하여 갖은 차별과 빈곤을 겪게 되는 이야기인 반면, 이 <지니의 퍼즐>에서는 지니의 외할아버지가 북한으로 귀국을 했고, 지니의 가족은 일본에 남은, 그리고 지니는 조선힉교로 진학하면서 겪게되는 정체성의 혼란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친구에게 거절당하고, 조선학교에 입학해서도 그들사이에 제대로 흡수되지 못하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날 북한에서는 미사일이 발사되고, 지니는 치마저고리차림으로 등교하다가 일본인들에게 해코지를 당하게 된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한 지니는 그녀가 할수 있는 최대한의 작은 혁명을 일으킨다.


재일교포 3세인 지니는 선택권이 없다. 아니 그 당시 재일교포들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었을까. 1세대들은 일제 강점기때 일본으로 강제 징용되었던, 나라 잃은 민초들이었을테고, 사상에 관계없이 고향에 따라 북한 국적이냐 남한 국적이냐가 결정되었을텐데 말이다. 조선인이란 이유하나로 일본인들에게 멸시를 당했을, 그리고 한민족이지만 분단된 조국을 갖고 있기에 보이지 않는 38선으로 그들을 갈라놓고 한없는 고통을 3세대인 지니가 감내해야만 하는 것일까.


종전선언을 하겠네, 핵포기를 하겠네 하는 현재의 상황에서도 어쩐지 내 귀에는 주판알 튕기는 소리밖에는 안들린다. 비단 이념사이에서 갈등하며 제 설곳을 찾지 못하는 지니나, 다른 여타 상황에서도 방황하는 지니들도 자신들의 위치를 잘 찾아가는 여행을 하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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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보낸 하루 라임 틴틴 스쿨 11
김향금 지음 / 라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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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의문이 들었다. 한성, 한양, 경성.. 언제부터 서울을 경성으로 불렀나라는 의문... 서울을 한자로 표현하면 경()이다. 중국의 북경(), 일본의 동경()은 각각 해당국의 서울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한자 문화권의 공통점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이렇게 보면 경성이란 이름은 자연스런 수도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되는것 같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면 경성이란 이름에 포함된 의미를 알수 있다. '한성부'는 조선 시대 서울의 공식적인 행정 명칭이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수도를 한성이라고 불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한성부는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한성은 경기도 소속으로 지위가 낮아져서 '경성부'로 불리게 된다.(생략) 경성에도 수도라는 뜻이 있어서, 조선 시대에 순 우리말인 '서울'의 한자 표기로서 경성이 사용되긴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사용된 경성은 오로지 일제의 식민 도시를 가리키는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p.233) 본문 내용을 살펴보면, 검색한 내용이 맞기도 하지만 또한 틀리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때의 경성은 지위가 격하된 명칭일 뿐이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라는 작품을 읽어보면 '게이죠'라고 서울을 부른다. 소설 자체가 우리가 해방을 맞지 않았다는 가정을 배경으로 삼기 때문에 서울을 그렇게 낯선 '게이죠'라고 불러서 참 거부감이 들었었는데, 이 책을 읽고보니 너무나도 당연한 거부감이었다.


누가보면 애국자처럼 보이겠지만 내가 일제강점기에 관심이 갖게 된건 아이가 커가면서 여러 박물관을 다니면서이다. 안중근 의사의 짧은 손가락도 고문에 의한 것으로 알정도로 나 또한 많이 무식했던 터였다. 그리고 당시 그 배경을 하고 있던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아리랑>, 한수산의 <군함도>등을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경성"이란 이름은 그래서 서울이라는 의미보다 아픈역사를 더 내포하고 있는것만 같다.


이 책은 모던보이를 쫓아가며 경성을 소개한다. 제일 눈의 띄는 것은 조선총독부 건물과 광화문이다. 경복궁의 정문이였던 광화문은 뜯겨져 자리를 이동했었고, 조선총독부는 정궁인 경복궁을 막고 있다. 어린시절 조선총독부 건물이 박물관이였었는데, 참 견고했던 건물이라 생각했었는데, 참으로 어리석었다. 다행이 조선총독부는 1995년 철거되었고, 광화문도 제자리를 찾아와 있다. 또한 현재도 일부 모습을 갖고 있는 서대문형무소는 당시 독립투사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딸아이가 초등학생시절 간적이 있었는데, 매우 무서워 했다. 왜 저런 흉물스러운 건물을 아직도 보존하는거냐고 물었다. 아픈 역사도 우리의 일부이니 잊지말라는 뜻이 아니었겠냐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저자도 말했듯이 청소년과 함께 하는 여행기이듯, 청소년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물건들도 있지만 그 시대 나라를 잃어버려서 겪었던 수모나 나라를 찾으려는 이들의 노력이 곳곳에 숨어있는 곳도 잊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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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밑의 개
나하이 지음 / 좋은땅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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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만큼 작은개, 엄지는 이제 열 살, 미소의 눈밑에서 자기만을 고집하는 개입니다.

엄지는 떼를 쓰고 심술을 부리면서도 늘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런 엄지의 투정에도 사랑해주며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는 미소는 엄마들의 모습입니다.(p.4, 작가의 말 中)


작가의 말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모습이나 엄마의 모습은 생각치 않았다. 솔직히 읽을때는 그냥 강아지 엄지 그대로, 미소 그대로 보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엄지와 미소의 관계가 그런 관계이더라. 비록 어리긴 하지만 열살 미소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손가락만큼 작은개 엄지는 커다란 개 메롱이의 꼬임에 빠져 험난한 커다란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자신과 같은 작은 나라를 찾아서.. 하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다. 먹는것에서부터 자는것 까지 참으로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때론 주어진 환경에 나이를 막론하고 나름의 적응을 하지 않는가 싶기도 하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나서, 혼자서 잘 다녀올까, 찻길은 잘 건널지, 도서관은 혼자서 찾아갈지 모든것이 불안했고, 또한 아이만 같았다. 당시 mbc에서 방영되던 휴먼다큐에 나온 "붕어빵 엄마"에 나온 사연을 본적이 있는데, 엄마는 위의 투병중이었고, 또 생계를 위해 붕어빵을 팔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딸이 더 어린 동생을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찾아가는것이나 동생을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내 딸아이보다 더 어린 아이가 대견스럽기도 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더라. 우리딸도 저런 상황이었다면 더 의젓하고 혼자서 할수 있는 일이 더 많았겠지 하면서도 그 아이들이 너무 일찍 어른이 되버린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길고양이들을 밥을 주다보면 아주 어린 아이가 독립을 했는지 혼자서 초록잎이 신기해 구경을 하면서 다니기도 하고 그보다 더 큰 아이를 아직도 데리고 다니는 녀석들도 마주하게 된다. 잘모르는 어린 엄마 고양이가 아이를 너무 일찍 세상에 내놓았는지, 아니면 아직도 독립시키기는 이르다며 과잉보호하며 여직 끼고 다니는 엄마 고양이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적응을 해 나가는것 같다고 본다. 너무 과하지도 않고 너무 덜하지도 않은 그 시점을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부모의 미숙함이 문제라고 할까.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어린이들이 엄마의 깊은 사랑을 막연하게나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어른인 나는 역시 집나가면 고생이라는 생각과 엄지가 본인에게 닥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며 스스로 단단해지길 빌었다. 비록 약간은 단단해진것 같지만 언제나 미소의 보호아래에 있을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무릇 인간이란 동물은 가장 오래 자식들을 끼고 사는것 같다. 주어진 환경에선 나름 적응하기 마련이지만 엄지가 자신을 도와준 개 나나가 무지개 다리를 건넌후 고양이 고등어에게 맞서는 것처럼, 무작정인 보호보다 그들이 스스로 자립할수 있도록의 도움이면 충분하리라 본다. 하지만 나도 아직 내년이면 성인이 될 아이를, 딸아이의 표현을 빌어 물고빨고 하는걸 보면, 나도 어쩔수 없는 미숙한 엄마일뿐이다.


<어릴적 그책(곽아름)>이란 책을 읽고 문득 학생시절 읽었던 책이 생각나 다시 읽은적이 있었다. 똑같은 책이지만 중학생 시절의 내가 읽었던 느낌과 어른이 되서 지금 읽는 느낌은 너무나도 다른것에 나 자신도 놀랐었다. 이런 동화 한편도 지금의 내가 읽게 되니 참 다르게 해석이 되는듯 하다. 아무래도 세상살기는 내게도 녹록치 않아서일까. 그래서 가끔 동화를 읽는것도 좋은듯 싶다. 이 책은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이 읽어도 좋을 동화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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