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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공주
한소진 지음 / 해냄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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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조선시대 왕들에게는 '대왕'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그리 낯설지 않커늘, '세종대왕'은 그냥 '세종'이라고 하면 좀 뭔가가 낯설다. 특히나 '세종대왕'은 가장 칭송받는 조선의 왕이 아닌가! 인재를 등용하는 면에서도 탁월했고, 정치보복이란 것은 절대 볼수 없었으며 당대 최고 리더쉽을 가진 왕이였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대단했다. 그런분의 둘째 따님이 바로 '정의공주'이시다. 더군다나 역사 앞에 드러나지 못했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그녀의 활약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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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공주는 책표지에 보이는 저런 단아한 모습이였을까? 궁금해진다.
세종대왕은 딸과 아들을 차별하지 않고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우게 했다고 한다. 조선의 여성들의 위상이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혹여 더 길고 더 빛나지 않았을까? 세종대왕의 딸에 대한 배려덕분으로 정의공주가 훈민정음 창제에 뛰어난 활약을 할수 있었다 할수 있겠다. '이두공주'라고 불뤼울 정도로 이두에도 탁월한 능력을 지닌 그녀는 '구구구' 우는 비둘기 소리마저 어려운 한자로 표기해야 하는지, 혹은 더 어려운 이두로 표현해야 하는건지에 불만이 많았다. 이두라는 말은 백성들이 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 많았고 우리말의 많은 어미활용을 따라올수조차 없었다. 당시 강한 사대주의사상때문에 우리말을 창제하려던 세종대왕의 의지가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히지만 왕자와 공주의 도움을 받아 서서히 우리말을 만들어가게 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가림토문자'를 바탕으로 한글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 먼 옛날부터 우리는 우리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알면 알수록 우리의 역사는 대단하지 않을수 없다.
백성들 사이에 공공연히 사용되어지던 가림토 문자의 흔적을 찾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는 왕자들의 노고와 함께 그렇게 한글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세종께서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음을 다 끝내지 못하여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셨다. 하지만 모두 풀어내지 못하였다. 결국은 공주에게 부탁하자 공주가 곧 풀어 바쳤다.(죽산안씨대동보 中)
우리나라 언서(한글)는 세종 조에 연창공주(정의공주)가 지은 것이다.(몽유야담 中)
비록 이렇게 여러 문헌들에서 정의공주의 활약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본인의 이름을 빼달라고 세종대왕에게 간청했다. 이는 지금은 한글이 과학적 우수성이 뛰어난 것임을 알고는 있지만 당시에는 여자를 천시하는 이들에 의해, '암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천대받는 것을 마음 아파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한글을 펌하했던 그들이 과연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 생각했다면 어찌 이런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할수 있었을까?
'전하, 아들은 과업을 이을 산천초목과도 같지만 딸은 그 산천초목에 영롱하게 내려진 이슬이라 할 것입니다. 이슬은 산천초목을 적셔 푸르고 거대하게 가꾸어주는 법. 딸은 부모의 가슴에서 부모의 눈물을 먹고 자라니 이 어찌 애처롭고 귀하지 않겠습니까?'(p.326)
과연 그녀의 활약으로 인해 더욱더 세종대왕의 업적이 빛나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소설에서는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공주의 활약뿐만이 아니라 한나라의 공주로 살아간다는 것, 공주도 여느 여자와 다를바 없다는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찍 어미를 잃은 어린 조카(단종)에게 젖을 물리며 고모가 지켜줄터이니 아무 염려 말라는 그녀의 따뜻한 모습까지 볼수 있었다. 그런 단종이 왕위를 물러나게 될때 또 그녀는 어떠했을까? 계유정난의 이야기는 그리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삶속에서 그 사건이 얼마나 마음아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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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사이에는 정소, 정의공주 두분의 따님이 있었다고 한다. 정소공주는 13살의 나이로 마마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마도 정소공주가 살아있었다면 정의공주와 함께 많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리라는 것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