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 가정 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사람의집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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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가정 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 최현정 옮김 | 사람의 집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한가.... 책 표지에 서린 트라우마라는 낱말이 빨간 핏줄처럼 내겐 보였다. 그 줄이 얽히고 섥혀서 알게 모르게 이어내려오는 것... 그것이 바로 피의 힘이다. 절대 잊혀지지않는다. 잊혀지기는 커녕 그 트라우마는 유전자에 박혀서 되물림되는 것이다. 흔히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이 얼마나 헛소리인지... 또 아픔은 가시지만 상처는 남는다는 말도 한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가면 사라진다. 하지만 폭력의 흉터는 내내 그 자리에 남아 그 속에 상처가 있음을 알려준다. 트라우마는 일종의 방어 기제로 인간을 보호하는 작용 역시 하는 것이다. 이는 흡사 스릴러 영화의 표제작과도 같다. 끝날 때 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 여운이 긴 영상을 보는 것만 같다.

책을 읽는 내내 [어린 의뢰인]이라는 한국 영화가 생각났다. 칠곡 계모 사망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그 영화는 동생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한 소녀를 통해 탐구해 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시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그 기억들... 아동에게는 살기위해서 기억을 해리하고, 다시 조립해내는 능력이 있다. 일종의 그것은 뇌의 방어기제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자신의 두뇌를 어딘가에 보관해놓는다고 생각하고 잠시 최면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통스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 일명 가상세계의 일이 되는 것이며, 끔찍했던 기억은 영화나 소설 속 한 장면으로 귀속된다. 일어났는데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고통스러운데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온 몸에 철갑을 두른듯...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먼 훗날 그 자신이 가정을 꾸리거나, 그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을때 어떤 트리거가 되어서 그 자신을 공격한다. 절대 잊혀질수도 없다.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만큼 폭력의 상흔은 무섭다. 그리고 그것이 아동기에 벌어지는 학대라면 너무도 끔찍하다.

얼마전 영화 [세자매]를 보았다. 어린 시절에 한 공간에서 아버지의 폭력을 온 몸으로 당해가면서 어른으로 성장해 온 그들은 겉보기에는 멀쩡해보인다. 하지만 자매들은 나름대로 그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큰 언니는 항상 주눅이 들어있고, 생활력이 없는 남편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외적인 폭력은 아니지만 언어적인 폭력을 당한다. 둘째는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잘 사는 듯 보이나 바람 피는 남편에 외적인 면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지만 정작 그녀는 빈 껍데기로 남아있다. 셋째는 그 중 스스로가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알콜 중독자로 술 없이는 생활하지 못한다. 막내 아들도 등장하는데 그는 아버지의 학대로 정신적으로 이상해졌으며 병원 생활을 지속중이다. 이처럼 학대의 기억은 세자매의 삶을 밟아놓았고, 커서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멍에로 남는다. 후에 바닷가에서 세 자매가 서로 엉기어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은 결국 헤쳐나갈 힘은 자기 자신 밖에, 그리고 그 자신을 이해해주는 가족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슬프다. 학대의 트라우마, 강간의 트라우마, 가정 폭력의 트라우마, 테러의 트라우마, 자연재해의 트라우마... 각종 트라우마가 넘쳐나는 이때 우리는 안다. 절대 그 굴레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도망칠 구멍이 없다면 맞서야한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직시해야한다. 구덩이에 빠졌을때는 왜 빠졌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덩이에서 빨리 나와야하는 것처럼 말이다.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워질 힘 역시 그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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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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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에쿠니 가오리 지음 | 신유희 옮김

청아하다. 에쿠니 가오리하면 떠오르는 단어이다. 이제 그녀도 흐르는 세월을 비켜가지는 못하겠지만 글은 나이를 먹지를 않으니...여전히 청아하다는 말은 유효한 단어이다.

이 책은 그녀의 책 [반짝반짝 빛나는] 이후의 뒷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등장인물들 모두가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아마 그 연장선에 있는 거라서 그런 것일까... 저자는 말한다. 책 마다, 글 마다 자신의 지문이 들어있다고... 그리고 내 생각에 에쿠니 가오리의 지문은 그 누구도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챕터, 어느 단락을 읽어도 그녀임을 알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다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아내를 위해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기꺼이 되어주는 남편이 등장하는 가 하면 신문의 부고란을 탐색하면서 듣도 보도 못한 이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부부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 존재하고, 그 사랑을 확신하면서도 한 여자는 여러 남성들과 동시에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떠난 동성의 애인이 남긴 나무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여성도 등장한다. 하나 같이 평범한 감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일상적이다. 자신들의 삶에 조용히 녹아들어가 있다. 앞으로 가는 자전거처럼, 느리지만 천천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자동차처럼 속도는 낼 수 없지만 어찌됐든 한 방향으로는 가고 있는 것이다. 왠지 가오리가 그린 이곳에는 나쁜 사람들은 없는 것같다. 적어도 그녀가 그리는 최소 이 세계의 사람들은 말이다. 다소 이해가 안가는, 이상한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여름에 꼭 보는 영화가 있다. 고레에다 감독의 [폭풍이 지나간 후에] 와 [ 바닷마을 다이어리]이다. 왠지 보고나면 마음이 한결 가볍고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한여름날 사우나를 하고 나온 듯... 여름이지만 방금 담근 뜨거운 물의 기운이 식어가면서 시원해지는 느낌... 그리고 여름에 읽기 딱인 소설들...내겐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들이 그러하다. 그녀의 책의 주인공들이 사는 세상은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세상과 닮아있다. 왠지 두 세계가 통하는 느낌이다. 일상의 진한 향기, 그 여운... 모든 억울함, 혹은 불공평을 감수하고서도 스스로 개척하고 살아내야하는 것...

소설가 김중혁님은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풍경을 자신 옆에 두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작은 세상, 그 따뜻한 세상, 비록 주인공들은 상처투성이에 이해안되는 모습도 있지만...그래도 선하고, 따뜻한 뭔가가 풍기는 사람들... 가오리의 글 속 사람들도 그러하다. 모두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변함없이 살아간다.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밥상을 차리고, 모두가 둘러앉지만 서로 각자의 식사를 한다. 사는 것이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 저마다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쇼코와 무츠키, 곤의 일상이 그저 그렇게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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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어의 맛
구효서 지음 / 문학사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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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어의 맛

구효서 소설집 | 문학사상

소설을 읽는 내내 감각이 그려졌다. 특히 미각에 대한 감각은 총체적인 오감이라고 생각된다. 보고, 냄새를 맡고, 음미하는 모든 감각을 사용하게 되니까 말이다. 소설가 구효서님의 오감에 대한 소설집... 시도 자체가 색다르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집 소제목에서 느껴지는 감각의 이미지... 하지만 막상 그 감각에 의지하여 읽다보면 절대 하나의 감각만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은결-길편지]에서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의 시각적 감각이 요라는 남자에게 생의 마지막 기회를 줬다고 한다면 여기에 나오는 도다리 쑥국이나 무 등 등의 것 역시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오히려 난 [웅어의 맛]보다 [은결-길편지]에서 진한 쑥내음과 도다리의 맛을 느꼈으니까 말이다.

소설가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또 거기에 살을 붙이는 과정은 나에게는 참 낯선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렇게 실험적인 시도는 소설 읽기에 또 다른 재미를 부여한다. 한 작가는 의도적으로 특정 받침을 제거하는 글쓰기를 시도하기도 하고 말이다.

문득 소설을 읽다가 생각난 것은 구효서 작가의 결이 왠지 김승옥 작가와 닮아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노래하는 것,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 섬세한 묘사 등 등이 두 작가를 묶게 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중 계속해서 화면이 연상되는 것 또한 말이다. 자꾸 그 도다리 쑥국도 생각나고, 웅어도 생각나고, 윤슬 혹은 은결도 생각난다. 왠지 단편극장에 어울리는 하나의 시나리오로 탄생시켜도 꽤 훌륭할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말하지 못하는 무엇을 한가지씩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 때문에 살고 사람 때문에 죽는다. 사람만이 사람을 날카롭게 한다. 이 소설 속 주인공 모두는 저 마다 상처를 가지고 있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결코 마지막 선을 안넘는다는 것... 그 정도일까... 아마 모두들 바다의 교훈을 잘 깨닫고 있는 듯하다. 절대 건너오지 말고, 묻어두고 돌아가라는 것...

책을 덮어도 자꾸만 피맛이 올라온다. 요가 계속해서 칼로 잇몸에 상처내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그것 때문일까...아니면 삶에 대한 어떤 해답도 사는 동안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그것도 이제서야...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가? 인간을 살게하는 것은 상당히 단순한 것이라는 것... 누군가는 그것을 죽더라도 떡볶이는 먹고 싶다고 표현했으며, 다른 한 누군가는 손 밑의 거스름같은 뭔가 사소한 걸림으로 표현했다. 모든 것이 오감하고 맞닿아있다. 인간은 오감이 있으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삶의 재미이다. 어느 잇몸 약 광고처럼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고 하면서... 그런 감각에 바로 사는 맛, 사는 멋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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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의 말
이예은 지음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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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의 말

이예은 에세이 | 민음사

평생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전화를 받게 되고, 또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게된다. 요즘은 대뜸 모르는 전화를 받는 것도 무서운 세상이 되었지만(스팸 전화, 문자 등) 아무튼 벨소리가 울리는 전화라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하고, 또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증거일 것이다.

저자 이예은 작가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한국인이면서 일본에서 그것도 콜센터에 근무했다니... 일본어 능통자라서 가능한 일일터인데, 그녀의 이러한 독특한 콜센터 이력이 이렇듯 한권의 책으로 나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가 몰랐던 것에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가끔 직업에 대해 생각하지만 콜센터 근무는 절대 나의 적성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끊임없이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야하고, 스스로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를 반복해야한다. 하지만 콜센터 근무자가 있기에 우리는 생활 속 불편함을 호소하고, 그것을 처리할 창구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콜센터에 전화하는 대다수는 분명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는 자이고, 콜센터 근무자는 그것에 대한 열쇠를 쥔 자이다. 콜센터를 통해야지만 우리는 우리를 불만스럽게 한 거대한 기업의 촉수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에세이에서 밝힌 돈을 벌기 위해 숨쉬듯이 용서를 구한 인간이 됐다는 말은 마음에 와 닿는다. 저자가 말한 매듭지어지지 못한 인연들... 차마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어서 그저 흐지부지하게 되어버리는 순간과 사람들... 저자는 콜센터 근무를 하면서 맺고 끊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죄송합니다. 라는 한 마디 말의 힘이었다. 그러한 저자가 절대 안하는 말은 진심을 다한 거짓말이라는 것은 입가에 미소를 짓게한다. 아마 절대 건드릴 수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 일지도 모르겠다. 죄송하다고는 하지만 진심으로라는 수식어는 붙이지 않는것... 사실 모든 직업이 그러하지 않은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나에게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예전에 직장생활 스트레스를 과도한 쇼핑으로 푼 적이 있었다. 특히 홈쇼핑의 현란한 말솜씨에 빠진 나는 물건을 사고, 다시 마음이 변해 반품하는 짓을 일주일에 한두번 꼴로 했던 것같다. 번번히 마주하는 콜센터 상담원... 나는 그들에게 무척 퉁명했으며, 나의 어리석고 상처받은 마음의 고름을 그들에게 쏟아냈다. 콜센터 직원이 심리치료사는 아닐진대, 왜 그들에게 나의 마음을 위로받고자 했을까...아이러니하게도 직장을 관 둔 동시에 그 병이 사라졌지만 그 시절 나는 병원에 가야할까...마음 먹을 정도로 몹시도 피폐해진 몸과 마음 상태를 견뎌야했다.

콜센터에 전화를 걸면 나오는 멘트가 있다. 지금 상담받는 직원은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라는 말... 그렇다. 사람은 모두 다 같다. 모두들 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싫어도 예의를 갖춰서 예의없는 사람을 상대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 사는 처세술을 배우기위해 콜센터만한 수련장도 없는 듯하다. 저자 역시 이 시절 이 곳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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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위의 낱말들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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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위의 낱말들

황경심 지음 | 소담출판사

한여름밤 자려고 누웠는데, 근처에 조용한 말소리가 들린다. 그 말소리들은 어떤 때에는 음악으로 탈바꿈하고, 또 어떤 때는 마치 영화 화면처럼 시나브로 눈 앞을 스쳐가기도 한다. 저자 황경신이 책 속에 쏟아놓은 활자들은 내겐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한여름날 밤의 음악소리처럼... 그녀의 글들은 삶이 그리고 살아있음이 어쩌면 조금은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꿈을 내게 심어준다.

그녀의 글들은 때론 이름모를 여행지 속으로, 영화 속으로, 음악 속으로, 사물들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저자의 잡지사 경력은 괜한 것이 아니였다. 난 저자를 잡지 페이퍼를 통해 처음 알았다. 처음 페이퍼 잡지가 나왔을때 잡지란 것이 이렇게 스타일리쉬하면서 읽을 거리가 풍성한 것이라는 걸 처음 알았던 것같다. 그동안 익숙하게 보아왔던 소위 미용실 패션 잡지가 아니었다. 글들은 살아있었으며, 그림, 사진들은 스크랩을 하고 싶을 만큼 수려하게 느껴졌다. 페이퍼 잡지는 그 시절 몇 천원이면 살 수 있었지만 역시 세월엔 장사가 없는지 월간으로 나온 잡지가 계간으로 바뀌었고, 값 또한 뛰었으니 말이다. 아마 여러 잡지들이 쏟아져나오는 경쟁의 시대, 더 질 높은 수준의 책을 발간해야한다는 창작자의 고뇌 또한 시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을 터였다. 다행히도 페이퍼는 아직도 여전히 건재하며, 이제는 잡지 시장도 너무나 다양해져서 사은품에 혹해 잡지를 구매하는 것이 아닌 잡지가 너무 읽고 싶어서 발행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역시 많아졌으니 이 또한 세월의 힘인 듯싶다.

페이퍼에서 한 두 페이지에서 읽었던 황경신의 에세이와 이야기들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만나 볼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달의 이면을 들여다 보는 일같다. 소소한 일상의 힘이 느껴지는 그녀의 필력이 몹시도 부러워지는 순간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글을 쓸 생각을 한다는 그녀... 아마 글은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그녀를 그녀답게 하는 매개체임에 분명하다. 커피를 내리고, 생각을 하고, 잠시 산책을 갔다가, 샤워를 하고, 또 다시 종이 앞에 마주 앉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그려진다.

소소한 이야기들을 읽자하니 나도 몹시 글이 쓰고 싶다. 저자가 여기저기 던져놓은 글감들이 나를 유혹한다. 그것들이 하나의 달의 낱말들이 된다. 작가가 여는 글에서 말한 것처럼 말랑하고, 따뜻하고, 뭔가 착하고 예쁜 것들이 내 마음 속에 소복히 내려앉는 기분이다. 그것들을 잘 엮고 마음밭에 뿌려 가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도 흩트려 버리지 않고 온전히 그러모아서 말이다.

어느 것이나 글감이 될 수가 있다. 책에서처럼 단어와 사물들 그 하나의 단서만을 가지고도 내 안의 구슬들을 엮을 수 있으리라... 그것들이 다 엮어지면 나도 아마 저자처럼 그럭저럭 내 인생이 마음에 든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여름날 시원한 대자리에 누워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다시 음미해보고픈 책 [달 위의 낱말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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