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개 이야기
마크 트웨인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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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 이야기

마크 트웨인 | 내로라

슬프다. 개의 시점으로 전개된 이 소설에서 난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무궁한 슬픔만이 밀려왔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누구는 개를 그저 인간의 소유물로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애완 동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뿐더러 더구나 여기 대한민국은 개 식용이 아직도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개 뿐이랴...... .

얼마 전부터 개 사고에 관한 기사가 유독 많았던 적이 있었다. 대형견에 의해 물림 사고에서부터 소형견 사고, 들개가 아이를 공격하는 사건까지 말이다. 이런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흔히 뒷북들을 열심히 친다. 그동안 등안시 했던 온갖 종류의 법부터 나오고, 입마개니 개줄 의무화니 등 등의 것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다. 그 후 또 얼마동안은 잠잠해진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가 과연 개와 그리고 견주의 잘못만일까? 도시화로 인해 변해가는 산과 들, 입양에 대한 무지로 인해 키우기 힘들다 싶으면 몰래 유기하는 사람들, 동물들에 대한 유기가 휴가철에 빈번하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소설은 어느 용맹한 개의 이타심에 대해 말하고 있으면서 인간의 잔혹함에 초점을 두고 있다. 어미가 자식을 지키지못하는 마음은 개나 사람이나 같은 것이다. 얼마전 곰 우리 탈출사건이 있었다. 새끼 곰이 쓸개즙을 빼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에게 울부짖으면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우리를 탈출한 어미곰... 그 어미곰은 새끼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아마 단장이 끊어지는 고통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말이다. 과연 왜 그런 일은 아직도 지속되는가? 왜 마크 트웨인이 경고했던 이 시절보다 지금의 상태는 한 시도 나아지지 않았는가? 이제 좀 달라질 때도 되지 않았나? 과학의 발달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고 칭송하는 오늘날에 인본주의, 인문주의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라는 뼈아픈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여러 책들이 말하고 있다. 세상은 인간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고 말이다. 지구 너머에서 지구를 보면 이 작은 파란 행성은 온통 생명으로 넘실댄다. 지구 이외의 행성에서는 아직 그 어떤 생물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 없다.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이 작은 파란 행성에서 조차도 더 넓은 땅을 차지하고, 더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싸우고 또 싸우지 않는가? 온통 생명으로 가득 찬 이 행성에서 인간이라는 이유로 다른 종을 절멸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지는 않은가? 과학은 이제 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한다. 다른 한 종을 희생시켜서 인간을 번성시키는 대신에 말이다. 모든 종을 위한 과학이 되어아한다. 그것이 바로 지구를 빌려서 백년도 못 사는 인간이 해야할 사명인 것이다.

더 이상 인간만이 잘 사는 푸른 행성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미 알지 않는가? 인간도 자연의 한 일부일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모든 생명들이 푸른 행성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인간만의 지구는 존재할 수 없다. 지구 상에 작은 종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얼마나 많은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모두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벌의 위기 라고 말하는 때이다. 그것은 곧 인간의 위기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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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반
헨리 반 다이크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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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반

헨리 반 다이크 | 내로라

책을 읽으면서 또 다른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 짜라투스트라가 조로아스터라는 사실... (조로아스터의 발음이 독일식으로 짜라투스트라 이다.) 니체는 자신의 이상적 분신으로 짜라투스트라를 언급한다. 과연 그가 말한 조로아스터교는 어떤 믿음의 공동체일까? 기회가 닿는대로 책을 찾아서 읽고싶어진다. 책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책이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흥미롭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인 아르타반은 조로아스터교인이다. 난 처음에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이란 것은 고대의 것 중에서 훼손이 되지않은 태초의 상태 그대로라 여겨졌기 때문에 신성시한 것 이었고, 그들은 불꽃과 냄새로 신에 대한 경배를 표현했다고 한다. 아르타반의 여행길... 그의 목표는 하나였다. 그 옛날부터 별자리를 통해 알고 있던 구세주의 존재...그를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타반의 여행길은 순탄치않다. 33년의 세월동안 그의 목표는 오직 단 하나였지만 그는 눈으로 보이는 목표대신 과정을 통한 진정한 목표를 이루었다. 그의 말대로 구세주를 찾아 가는 과정에서의 걸림돌 또한 그 목표를 이루게 해 준 또 다른 수단이었다.

많은 이들이 꿈은 크게 가져야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그 큰 꿈이 행여 좌절이 되었을때 그 차후의 꿈을 이룰 동력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타반의 꿈이 과연 큰 꿈이었을까? 아르타반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작은 길도 큰 길도 모두 꿈의 길이다. 꿈이 크던, 작던 이루고자하는 소망에는 변함이 없다면 꿈의 내용보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는 목표가 아니라 그 목표를 향해가는 여정이 중요한 것이고, 이미 여정에 정직했다면 그 목표는 이뤄진 것이라는 진리를 아르타반은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굳이 끝을 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목표가 이뤄졌는지, 이루지지않았는지는 그 사람의 마지막의 모습을 봐야지만 알 수가 있다. 조르아터교의 묘미는 여기에 닿아있다. 그것은 바로 본질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종교라는 사실이다.

아르타반의 여정은 실로 무모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여행길에 올랐고,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아야했다. 하지만 아르타반은 포기하지않았다. 친구들의 비난을 모두 수용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의심했지만 바로 자신 속에 심어있는 신앙의 본질, 구원자의 본질을 찾아서 여정에 오른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도 구원자를 못만났지만 그는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구원자의 본질을 찾아헤맸던 그 시간에 그는 스스로의 본질과 대면한 것이리라...... . 때로는 삶, 그 자체를 묵묵히 살아가는 것 자체가 위대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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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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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 최성은 옮김 | 민음사

방대한 관심사가 들어있는 종합선물같은 토카르추크의 첫 에세이집이다. 그녀의 사상과 관심사, 글에 대한 자세와 미래에 대한 걱정 및 기대 등이 모두 담겨있었다. 에세이라고 치부되기 보다는 왠지 인문서적같다고나 할까? 내겐 그런 느낌의 책이었다.

올가는 [방랑자들]이라는 여행자에 관한 소설로 처음 접한 작가이다. 이 책에는 그녀가 여행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도 나와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가 온전히 즐기는 여행을 떠날 수 없으리라는 것 또한 알 수있었다. 지금도 이곳 저곳을 여행한 여행서들이 쏟아져나오고, 각종 sns 마다 여행담이 그득하다.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기획할때면 인터넷으로 이미 그곳을 여행한 사람들의 여행담을 살펴본다. 왠지 그래서안자 더이상 여행이란 예전처럼은 설레이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여행은 온전히 낯설음의 체험이었다. 배를 타야지만 갈 수 있었던 그 때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당장이라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곳을 이미 인터넷을 통해 경험할 수 있고 말이다. 텔레비젼에서는 대리 여행이라도 해주듯이 여러 연예인들을 등장시켜 해외여행 프로그램을 쏟아내기도 한다. 분명 낯설음은 멀어졌다. 이미 익숙한 것, 이미 한 번 본 듯한 풍경들이 주위에 가득하다. 그리고 진실은 언제나 외면된다. 태평양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쓰레기섬들, 가난한 동아시아의 사람들이 쏟아내는 청바지 염색의 염료들, 각종 옷감의 폐자재들, 런던 혹은 도쿄 뒷골목의 홈리스들....... . 이미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무시한 채 좋은 풍경, 맛있는 먹거리들을 찾아다닌다. 전쟁과 기후 이상으로 인해 유물들은 파괴되거나 불 타고 있고, 지구 한 편에서는 음식물이 남아돌아 버려지는 반면, 한 쪽은 기아로 허덕인다.

올가의 동물에 대한 생각도 무척 흥미로웠다. 동물의 고통은 인간보다 더하는 것, 그것은 바로 동물들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동물들의 고통은 외면해야하는 것일까? 기독교에서 가지는 철학들의 모순된 점을 지적한 것 또한 흥미로웠다. 내가 아는 성경에서 모든 생물에 이름을 지어주고 생육하고 번성케하는 것은 창세기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말이었다. 하지만 어떠한가? 생물은 번성케하는 대신 지배하고, 먹고, 심지어는 멸종케한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공감한다는 것이다. 너를 나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서 모든 것들은 인간 중심의 사고로 귀결되고, 어쩔 수 없음으로 여겨진다. 고기를 안먹고 어떻게 살아? 어쩔 수 없잖아? 동물은 어차피 죽는 존재야... 등 등으로 더 이상 인간은 머리 아픈 고민을 하기 싫어한다. 외면이 사실 가장 쉬운 방법이다. 말 못하는 모든 동물에게 현실은 거대한 아우슈비츠인데 말이다.

그외에도 서술에 대한 그녀만의 이야기, 문학에 대한 생각들이 너무 방대하고 멋있다. 그래, 세상에 필요한 건 어쩌면 다정함이 다 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연결자들이다. 풀포기 하나, 개미 한 마리 마저 말이다.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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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집, 여성 - 여성 고딕 작가 작품선
엘리자베스 개스켈 외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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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집, 여성

여성 고딕 작가 작품선 | 엘리자베스 개스켈, 버넌 리, 루이자 메일 올컷, 메리 셸리 |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여성들의 공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네명의 작가가 [공포, 집, 여성]이라는 타이틀로 한 곳에 뭉쳤다. 개스켈은 [회색여인]을 통해서, 버넌 리는 [오키 오브 오키허스트, 팬텀 러버], 소설 [작은 아씨들]로 잘 알려진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은 [비밀의 열쇠],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으로 알려진 작가인 메리 셸리는 단편인 [변신]을 통해 색다른 고딕소설의 새로운 방향을 열어 주었다.

흔히들 이 당시에는 여성을 흡사 열등한 자 취급을 하면서 남성보다 한 등급 낮은 존재로 취급했다고 한다. 여성들이 글을 쓰는 것도 가명 뒤에 숨어서 몰래 써야했으니 말이다. 유명한 제인 오스틴 역시 거실 한켠에 놓인 작은 탁상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이유는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종소리가 울리면 재빨리 쓰던 것을 감춰야했으므로 말이다. 소설가 메리 셸리 또한 그녀의 유명한 책 [프랑켄슈타인]을 가명으로, 즉 남성의 이름으로 발표해야했고 말이다.

첫번째 단편인 [회색여인]은 여성의 공포가 얼마나 극단으로 치닫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잘못된 결혼의 끔찍한 결말, 그리고 그것을 추격하는 한 남자의 잔인한 복수극...흡사 요즘 뉴스판을 달구는 일명 스토킹 보복을 방불케한다. 여성의 잘못이 아님에도 여성이 죄인 취급받고, 결국 그 여성은 그 속에 갇혀서 헤어나질 못한다. 얼굴빛 마저 회색으로 변한 불행한 여인이다.

두번째 단편은 다소 이름이 길다. [오키 오브 오키허스트, 팬텀 러버]... 다른 제목으로도 알려져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광기어린 한 남성의 집착이 부른 잔인함이랄까... 과연 러브록은 실재하는가? 부부라는 자들이 한 남성을 끔찍히 살해하고, 그 살해된 남성 러브록에 대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이 부부는 스스로의 죄 값을 살면서 치룬 것같다. 평생을 그 공포 속에서 살아야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유령을 보면서 까지 말이다. 아니, 그 유령이 실재하는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말이다.

세번째 단편인 [비밀의 열쇠]는 [작은 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품이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도 그녀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소설의 결이 다르지만 정체불명의 남성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나타나는 장면은 지금 이 시대에 스릴러 영화로 만들어도 될 만큼 소재가 특출했다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 소설 [변신]은 다소 악마와의 거래라는 측면에서 색다른 공포 신화를 엿보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공포를 먹고 사는 많은 정체불명의 것들이 있다. 서양에서는 웬디고, 동양에서는 장산범 등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인 신비아파트를 보면 세상 그렇게 많은 귀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서 더 나아지는 삶은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항상 그들의 승리다. 결코 인간은 악마를 이길 수 없다. 그들과 타협하거나 거래한다면 결국엔 먹히는 법이다. 악마를 상대하는 가장 현명한 법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광야에서 했던 일이 바로 그러한 것 아니던가? 결코 굴복하지 않는 것, 결코 꼬임에 넘어가지 않는 것 말이다. 인간은 항상 욕심에서 넘어진다. 그리고 악마는 기가막히게 그것을 공략한다. 욕심없는 인간이여,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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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철학자 - 키르케고르 평전
클레어 칼라일 지음, 임규정 옮김 / 사월의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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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철학자

키르케고르 평전 | 크레어 칼라일 | 임규정 옮김 | 사월의 책

모든 것에서 실패한 이는 과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과연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인간이라는 것 그 자체의 의미란 무엇일까? 오래 전에 이 세상에서 머물렀고, 지금은 가고 없는 그 존재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왜 살아가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고 말이다.

지금 세상은 누구보다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받는 자들이 많은 세상이다. 일명 절망에 빠진 자들이 그득하다고나 할까? 아마 키르케고르가 지금 현 시대에 존재했다면 기겁할 일이다. 왜냐면 지금의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그 절망 자체에서 헤어나오려는 노력 그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절망 속에 허우적 댈 뿐이다. 그리고 스스로 절망하는 것에 그치지않고 다른 남들까지 그 구덩이 속으로 끌어들인다. 자, 같이 절망하자. 이 시대인들아. 우리 이 희망없는 시대에 절망으로 축복하자구나...하면서 독배를 들이킨다.

키르케고르는 누구보다 인생의 실패자였다. 그는 아들로서, 학생으로서, 그리고 연인으로서 모두 낙제자였다. 그런 그가 그런 경험들을 스스로의 안으로 돌렸다. 외부에서 문제를 찾는 대신 스스로 안으로,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갔다. 그러면서 발견한 것이 바로 신 앞에 선 단독자... 과연 우리 모두는 왜 존재해야하는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신이란 누구인가? 그는 말한다. 하나님은 결코 꼬드기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믿어주길 바라지를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악마처럼 속삭이지 않는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분은 오직 신뿐이었고, 그것은 그 당시 기독교와는 달랐다. 그는 타락한 종교에서 희망을 찾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모두가 진실로 투명해지길 바랬다. 누구에게? 바로 스스로에게 말이다.

얼마전 [안나]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나온 주인공이 하는 말이 있다. 인간이란 혼자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쓰는 존재라고 말이다. 인간은 스스로 조차 속이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것도 너무 유능하게 말이다. 우리는 왜 그것을 하는가? 우리는 왜 그것을 갖고 싶은가? 우리는 왜 성공해야하는가? 우리는 왜 .... 우리는 왜.... 정확히 사실을 알고 직면해야한다. 남들을 따라 살아서는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 결코 될 수 없다. 어쩌면 나를 아는 것이 나를 살리는 일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유일한 나라는 존! 재! 라는 것이니까.

키르케고르의 소설같은 평전을 읽으면서 가독성이 너무 좋아서도 있겠지만 그 인물 자체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어떤 인간인가? 키르케고르가 영감을 준 철학자는 너무나도 많다.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릴케, 카뮈, 사르트르...등 등 말이다. 절망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절망에 빠져있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돌을 밀어올리는 삶이야말로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의 삶이니까 말이다. 돌을 절망으로 치유한다면 말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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