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위한 변론 - 무자비하고 매력적이며 경이로운 식물 본성에 대한 탐구
맷 칸데이아스 지음, 조은영 옮김 / 타인의사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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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위한 변론

맷 칸데이아스 지음 | 조은영 옮김 | 타인의 사유

요 며칠 날이 너무 좋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이다. 하지만 그만큼 아무거나 뭘하기도 좋다. 책 읽기에도 이만한 계절이 없다. 야외에서 돗자리를 펴놓고 몇시간씩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가져온 책을 보아도 좋은 그런 날이다. 화창한 어느날 미술관 전시회를 찾았다. 이름하여 미래도시전... 미래의 도시 모습을 상상하거나 현재의 모습을 되비추어보는 시간이 되었다. 어느 한 부스를 찾았는데 일명 가상공간 체험이었다. VR을 머리에 쓰고서 스틱을 이리저리 옮기면 사람의 발자국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어져있는 하얀 계단들... 발자국이 그 하얀 계단을 밟으면 여지없이 계단은 무너졌다. 결국 서 있는 것은 벼랑 끝, 한도 끝도 없는 낭떠러지 앞이었다. 인간이 닿는 발길이 바로 그런 길이라면... 현대의 과학 문명사회가 오직 지구생물의 파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면... 한 종의 번성을 위해 다른 종을 절멸시키는 행위가 그 얼마나 적대적이고 모두 다 멸망케하는 길인지 이제는 우리도 알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 책 [식물을 위한 변론]은 동물 등의 여타의 생명들에 비해 등한시해 온 식물들의 여러가지 모습들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그 결과는 식물들도 나름의 존재로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며 그 투쟁은 여타의 다른 생물 못지 않다는 것이다. 그 진화의 과정이란 새삼 놀라울 정도이다. 베르가못은 자신의 꽃의 형태를 벌새에 맞게 유지해서 기가막히게 공생을 해나고 있었고, 어떤 식물들을 스스로 꿀 같은 내어줄 것이 없으면 다른 방식으로 화분을 옮겨 줄 생명들을 불러 모았다. 너무 신기하고 놀라운 식물들의 세계다. 그리고 그 세계가 인간의 세계 등 여타의 세계와 어쩌면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것, 알고보면 식물, 동물, 그 분류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 역시 들었다.

간혹 모기나 파리 등의 여타의 해충이라 일컬어 지는 곤충들을 볼때면 그것의 효용이 무언지를 생각하게 된다. 다른 것은 다 떠나서 그냥 내 곁에서만 사라져주면 좋겠는데, 그것이 안된다면 은근히 그것들의 소멸을 바라는 상상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모든 상상 역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안다. 모기가 다른 곤충들의 훌륭한 먹잇감이 되며 파리 역시 그들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사라진다면 나비효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동식물이 절멸될지 모른다는 것 역시 무서운 일이다. 한 예로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이 무엇인줄 아는가? 바로 파리란다. 그것은 기가막히게 먼저 찾아와서 썩은 부위를 핥는다. 현대 과학수사에서 파리를 통해서 꼭 밝혀야할 시체의 사망시간을 추정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둔다고 하니, 이 또한 파리의 효능이라 할 것이다.

어느날 집에 단 하나 남아있던 화분을 엄마집으로 보냈다. 도저히 베란다가 없는 집에서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안되었을 뿐더러 때 맞춰 물을 주고, 분갈이를 하는 일이 생각보다 품도 많이 들고, 신경을 써야할 것이 많았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환경적인 요인이었다. 식물에서 필수불가결한 햇빛과 통풍... 그 두가지는 정말 필수적이다. 어쩌면 우리 인간을 위시한 동물, 그리고 식물들 모두 지구에서 생명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슷할 지 모르겠다. 누가 태양없이 살 수 있겠으며, 누가 바람없이 살겠는가? 자연이란 모두를 위해 평등하게 주어져야한다. 태양은 결코 인간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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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과 분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80
윌리엄 포크너 지음, 윤교찬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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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과 분노

윌리엄 포크너 장편소설 | 윤교찬 옮김 | 열린책들

한 가족상의 모습을 보면 그 나라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시대상의 분위기가 어떠한지를 가족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니, 참 인간의 세상이란 묘하다는 생각이다. 때는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산업혁명의 시기이다.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성장한 미국의 남부지방은 산업화를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 발판 삼아 시대에 발 맞춰 재빠르게 변화한 사람은 성공이라는 기회를 움켜줬지만, 망연자실 흘러가는 세월만 붙잡으려고 한 사람은 시대의 망령에 사로잡혀서 쇠락의 길로 떠밀려갔다. 책 [고함과 분노]에 등장하는 콤슨 가문에 벌어진 일도 후자와 유사하다.

아이를 양육하기를 저버린 어머니, 장남에게 막대한 짐을 지우고서 나머지 가족들을 나몰라라한 아버지, 부모가 있어도 부재의 아픔을 느끼면서 캐디에 대한 감정의 혼란으로 끝내 잘못된 선택의 길로 내몰린 장남 퀜틴, 막내 벤지에게 살가운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돌보지 않았던 장녀 캐디, 오직 돈과 현실에만 집착하는 삶을 살게된 차남 제이슨,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오로지 세상을 감각적으로 인지하게 된 막내 벤지, 그리고 그 집안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 하녀 딜지, 모두가 콤슨 가의 한 가운데서 살아온, 그 시대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지내온 이들이다.

책의 제목은 포크너가 멕베드의 한 장면에서 연상해서 차용해온 거라고 하는데, 여기서 의미하는 사운드가 막연한 의미가 있는 소리가 아닌 막연한 소음, 의미없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기에 어떤 책에서는 사운드를 소리로, 음향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열린책들에서는 고함으로 번역해놓은 듯하다. 의미없는 메아리... 만약 나라면 어떻게 사운드의 의미를 해석했을까? 비명? 울부짐? 아... 역시 어렵다.

책은 전부 4부로 구성되어있는데, 첫 장에서는 벤지의 시선으로, 두번째 장은 장남인 퀜틴의 시선, 세번째는 차남인 제이슨의 시선, 마지막 장은 다른 장과는 달리 3인칭의 관점으로 쓰여진 딜지의 입장에서 콤슨 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첫 장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벤지의 입장으로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수월한 면이 있었다. 가장 괴로웠던 장은 아무래도 장남 퀜틴의 시선에서 씌인 둘째 장이었다. 콤슨 가의 사남매 중 유일하게 자신의 장을 갖지 못한 인물은 장녀 캐디인데, 그녀는 곳곳에서 그녀를 관찰한 이들이 캐디에 대해 묘사해주고 있었다. 벤지에게 캐디는 엄마와 같았고, 퀜틴에게 캐디는 연인이었으며, 제이슨에게 캐디는 타락한 누이였다.

소설에서 말하는 고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모두가 어떤 것을 말하고자하지만 그것이 소리로 전달되지 못하고 각자의 가슴안에서만 우물거리는 느낌, 소리치는 느낌이 든다. 뭔가 답답하고 막연하고 억울하지만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못 잡는 것같은 것.... 여기 콤슨 가 가족의 비극의 원인은 무엇보다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의 부재였다. 아이들 역시 아이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부모가 되려고 했다. 어머니의 자리, 아버지의 자리에 어린 자신들을 끼워맞춰야했으니 그 가족이 제대로 설 리가 없다. 고함이 제대로 된 소리로 울리고, 분노의 자리가 제 자리를 잘 찾아서 울릴때 소통이 가능하리라...... . 여기에 희망이 있을까? 어떤 웅얼거림이 제대로 된 소리로 울릴 수가 있을까? 비극은 기가막히게 되물림되지만, 그 비극을 끊는 길도 무척 간단하다. 가족 중 한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자리를 지키고 있을때 가족이란 울타리는 그것만으로도 지켜진다.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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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여자들
메리 쿠비카 지음, 신솔잎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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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여자들

메리 쿠비카 장편소설 | 신솔잎 옮김 | 해피북스투유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순식간에 불행해져 버린 사람들이 나온다. 한 순간의 욱하는 감정, 아니면 이것만 아니면 괜찮아 하는 눈감고 아웅하는 식의 감정처리로 그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나락으로 떨어진다.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으면 그만인것을... 그리고 그 죄라는 것이 순간의 우발적인 것이라면 정상참작이라는 것도 있을텐데... 여기 이 소설에서는 그 모든 것을 뒤로 한채 한 가정을 파멸시키는 것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의 시점이 여러겹 겹쳐지고 소설의 양상은 11년 전과 후로 빠르게 그려졌다. 그리고 읽기 힘들었던 장면들도 있었다. 아동학대로 일컬어지는 묘사는 시종일관 불편했지만 정말로 사이코 패스라면 그보다 더한 짓도 했을 지도 모르므로, 불편하지만 알아야할 진실이라는 생각으로 눈쌀을 찌푸리며 아이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읽어내려갔다.

누구보다 행복한 가정에서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소중한 가정을 이끌어간 메러디스의 잘못된 결말은 과연 어디서 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과연 셸비와의 일로 엃히게 된 출산 중 사고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취기어린 그리고 오지랖이 넓었던 그녀만의 개인 사정때문이었을까? 문제는 언젠가는 벌어지게 되어있고, 터질 것은 터진다. 메러디스는 아마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었다. 그 날 그 사건을 다른 식으로 처리했더라면 말이다.

가장 불쌍한 것은 순식간에 엄마를 잃은 아이와 학대받는 아이이지 않았을까? 어둠을 벗삼아 살아가야했던 그리고 소년을 불어내어서 스스로의 생에 의지를 만들어내야했던 유괴된 소녀... 그리고 메러디스의 딸 딜라일라, 또 그들의 실종과 죽음을 목격하면서 생기를 잃어갔던 메러디스의 남편 조시와 메러디스의 아들 레오, 누명이 씌워져서 억울한 옥살이를 10년 넘게 하고야 마는 셸비의 남편... 한 여자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 마을 이웃 모두가 한 순간에 불행해졌다. 행복은 차츰 차츰 전파되지만 불행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순식간에 빨아들인다. 불행의 파급력은 폭탄과도 같다. 그리고 그 파편 역시 어디로 튈 줄 모르는 것이다.

메리 쿠비카의 소설들을 하나 둘 읽으면서 그녀가 만들어낼 세계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그녀의 세계는 바로 이웃의 세계이다. 내 이웃, 내 사람, 내 주변의 이야기를 이렇게 멋진 한편의 추리소설로 옮길 수 있다니 몹시도 놀랍다. 간혹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느끼게 되고, 그런 이웃을 두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도 느낀다. 또 반면 잘못된 인연을 맺어 평생 고통받는 사람들도 있으니, 역시 인연이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보면서 한가지 드는 생각은 이러하다. 좋은 인연을 만드는 일이란 항상 감사하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사는 일이라는 것 말이다. 그리고 잘못된 일이라고 판단이 들면 어떤 유혹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항상 그것에 걸맞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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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맛있는 하루를 보내면 좋겠어 - 츠지 히토나리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인생 레시피
츠지 히토나리 지음, 권남희 옮김 / 니들북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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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맛있는 하루를 보내면 좋겠어

츠지 히토나리 지음 | 권남희 옮김 | 니들북

과연 요리란 무엇일까?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재료들을 다듬고, 스프를 끓이고, 고기를 삶고, 나물을 데치고... 그런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아마 드물 것이다. 기본적으로 요리란 배푸는 것을 전제로, 또한 나누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같다. 그러함으로 요리에는 정성이니, 시간이니 하는 말들이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전 동생내외와 놀이공원에 놀러간 일이 있었다. 날도 좋았고, 가을날의 정취를 만끽하기 충분한 날이었다. 기분좋게 싸온 김밥을 내밀었는데, 대뜸 내동생이 나보고 누나 요리는 3분요리란다. ㅎㅎ 엄청 빨리하지만 맛은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정성이 없다는 말이다. 아니, 기껏 아침에 일어나서 김밥까지 싸 온 누나에게 그것이 할 소리인가? 마음같아서는 벌컥 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어떤 면에서는 인정하는 바여서 참았다. 나의 요리는 일명 빨리 빨리와 실험정신을 기본으로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먹을 때에는 맛있게 먹었으면서 결혼하고 입맛이 변한 건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다니... (아니면 그 당시에는 배고파서 먹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 츠지 히토나리의 일명 요리 에세이는 아빠가 아들에게 쓴 연애 편지를 방불케한다. 하나 하나 설명이 구체적이고 그의 사랑이 느껴진다. 그는 싱글 대디가 된 후 아침마다 일어나서 쌀을 씻으면서 스스로에게 지지않을거야하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고 한다. 나 역시 본격적으로 밥을 한 건 결혼한 이후였는데, 저자처럼 이러한 각오는 없었던 것같다. 그의 지지않아는 점점 맛있게 할거야로 바뀌었졌고, 주방에 들어가는 일이 그에게는 하나의 해방구로 작용했다. 아들에게도 말한다. 주방을 도피처로 삼으라고 말이다. 주방은 절대 널 배신하고 않는다고 말이다. 씻는 소리, 밥 뜸들이는 소리, 볶는 소리, 데치는 소리...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찬 주방, 하지만 넋놓고 있다가는 큰일난다. 절대 사람은 한번에 두가지 이상을 하기 힘든다. 깜박잊고 나물을 다듬다가 금새 달걀찜을 태우고 마니까 말이다. 그처럼 주방이란 곳은 사람에게 할 일을 준다. 그리고 잡일을 잊게한다. 거기다가 내 요리를 맛있게 먹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루의 피로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면서 그리고 즐기면서, 이야기하면서 풀 수 있으니 말이다.

저자의 잡다한 지식은 주방 이외의 세계로 넓혀나간다. 갖가지 향신료에 엃힌 이야기서부터, 갖가지 프랑스 요리와 외국식 요리, 또 디저트 까지 그의 레시피를 읽어나가다 보면 나도 누군가에게 요리를 하고 싶어진다. 물론 나에게는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두 녀석이 상시 대기중이기도 하고 말이다. 미슐랭 가이드에서 일하는 어느 기자처럼 냉철한 혀를 지니고 있다. 맛없는 건 가차없이 밷는다. 절대 식도로 넘기지 않는다. ㅎㅎ 기가막히다.

이제 나도 저자처럼 빨리 빨리, 어서 어서 대신에 맛있게 할거야를 외치면서 주방에 서야겠다. ㅎㅎ 3분 요리의 오명을 언젠가 벗을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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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연대
수잔 글래스펠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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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연대

수잔 글래스펠 | 내로라

실화를 바탕을 둔 글은 그 자체로 위대한 울림을 준다. 이는 영화든 소설이든 뭐든 마찬가지인 것같다. 그리고 때론 현실이 더욱 더 소설보다 더하다는 진실도 우리 역시 알고 있다.

수잔 글래스펠의 소설 [마음의 연대]는 1900년대에 발생한 존 호색 살인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존이라는 남자는 도끼로 두 차례나 강타당한 모습의 끔찍한 몰골로 발견되었다. 그 옆에 있던 자는 바로 그의 아내였던 마가렛... 마가렛은 집에 강도가 들었으나 자신은 자고 있었기에 강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진술한다. 열 명의 아이들을 둔 마가렛은 사는 동안 내내 남편의 폭력성으로 힘들었다고 진술하며 그 폭력이 아이들에까지 미칠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녀의 막내 아이는 그녀 나이 마흔 살에 얻은 아이였다고 하니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무척 컸을 것이다. 법정에서 배심원은 모두 그녀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결정적 증거가 없었음에도 모든 정황 증거는 마가렛을 향했고, 그녀의 진술은 철저히 무시됐다. 이로 인해 농장 부인들의 끔찍했던 삶이 재조명되고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을 아마 수잔은 눈여겨 보았으리라...그녀는 저널리스트로서 이 사건을 심층 보도했다. 1심의 불편했던 판결 뒤에 어려있는 현실의 차가운 민낯을 말이다. 여성들의 연대 덕분인지, 철저한 투쟁 덕분인지 몰라도 마가렛의 재판은 결국 2심에서 뒤집어 졌으며 마가렛에 대한 세번째 재판은 열리지 않은 채 사건의 진상은 오리무중으로 남아있는 상태로 마무리 되었다. 수잔은 단막극 [사소한 것들]과 지금 이 단편 소설인 [마음의 연대]를 통해 그 당시 어려웠던 여성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마음의 연대]에서 등장하는 여인 미니 포스터와 그녀에 대한 사소해보이는 증거들을 감춰준 이웃인 헤일 부인과 피터슨 부인의 이야기는 여성들만이 통하는 연대와 그 애틋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짜고짜 그녀를 범인으로 특정하고 그 증거부터 찾는 헨더슨 검사의 모든 촉은 범인은 바로 미니 포스터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의 탁월한 식견을 무시하는 바는 아니지만 죄인이라는 것을 특정해놓고 사건을 수사하는 방식은 어쩌면 너무 무책임한 것같다. 이에 문득 얼마전 재미있게 본 드라마 [천원짜리 변호사]가 생각났다. 그 드라마에서도 오랜 시간 소매치기를 일삼은 가장이 어느날 마음의 결심하고 자신의 손을 돌로 내리친다. 하지만 우연치않게 들어간 공중화장실에서 넘어질뻔한 취객을 부축하면서 또 다시 소매치기로 몰리고 만다. 그가 오랜 시간동안 소매치기를 일삼아왔다는 그 정황이 바로 불리하게 작용하는 이유가 되면서 여기에 천원짜리 변호사가 나서는 사건이었다.

세상에는 분명 억울한 피해자도 있다. 하지만 변호사 덕택에, 혹은 운 덕택에 죄를 저지르고서도 피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죄의 결과만을 보지말고 상황 자체를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모든 이들에게 생겼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 때 제 삼의 눈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오직 스스로만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내리는 판결은 어쩌면 법이 내리는 판결보다 더욱 더 가혹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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