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붓으로 전하는 위로
서정욱 지음 / 온더페이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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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붓으로 전하는 위로

서정욱 지음 | 온더페이지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찬찬히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아프다. 그 그림들은 그녀의 아픔을 말하고 있지만 반대로 그녀의 생명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프리다에게 그림이란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아마 의미 같은 것, 그런 것들을 찾는 것이 사치이지 않았을까? 그림은 바로 그녀 그 자신이었으므로 말이다.

10대 시절 그녀에게 찾아온 큰 시련은 프리다 칼로를 말하는 하나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녀의 그림 속 자화상들이 바로 그 사건을 떠올리게 하니까 말이다. 전차 사고로 인해 그녀는 가슴에서부터 골반뼈로 쇠가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 곁에 있던 한 사람, 바로 친구 알레한드로... 원래 그는 사고의 그 버스를 타지 않고 다른 버스를 탔다고 한다. 먼저 온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칼로가 양산을 놓고 오는 바람에 내렸다가 다시 타게 된 거라 하니 아마 사고는 어떤 운명이 아니었을까? 아마 프리다는 그 일로 인해 알레한드로가 스스로의 운명과 엮이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1928년에 그녀 나이 21살 때 바로 그 사람을 그린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프리다 칼로 그녀 자신이다. 어쩌면 그녀는 알레한드로를 그녀와 비슷하게 그림으로써 그 둘의 운명이 한곳에 있음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칼로는 이 그림을 완성한 후에 다시 숨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45살이 되던 해 작품을 꺼내 새로운 서명을 했다. 영원한 친구의 모습을 사랑을 다해 그렸다고 말이다.

또 하나의 사건이라면 아마 디에고와의 만남이리라... 디에고와의 만남이 그녀에게 축복이었는지 저주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 스스로는 축복으로 여겼음이 틀림이 없다. 그녀는 그를 너무도 뜨겁게 사랑했으므로... 물론 그 둘의 사랑을 지켜보는 제3자들은 불안 불안했지만 말이다. 결국 디에고의 바람기는 그녀의 동생에게까지 손을 뻗게 되고 그 둘의 관계에 충격을 받은 프리다는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이때에도 디에고를 잊지 못한다. 정말... 왜..라고 되묻고 싶을 만큼... 이 정도 상처받았으면 이제 그를 놓아줄 만도 하건만... 결국 1939년 그녀는 디에고와 이혼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이후로 다른 분위기의 화풍이 펼쳐진다. 어느 정도 자유로운 모습이 엿보이기도 하고 훨씬 더 주목받는 작품들은 내놓게 된다.

다시 생각해 보니 디에고란 인물은 프리다 그녀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짓을 해도 용서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인간의 전형을 프리다 칼로는 잉태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내보내서 온 힘을 다해 껴안았다. 비록 그녀 자신이 그의 가시 돋친 피부에 상처 입을지언정...

책 말미에 실린 그녀와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 조명에 대한 내용 역시 흥미로웠다. 마르크스주의의 위대함이 병자까지 건강하게 할 만큼 대단한 것이라는 그녀의 작품... 이로써 또 한 권의 책에 흥미가 생겼다. 좀처럼 손이 가지 않던 자본론이 갑자기 프리다로 인해 흥미로워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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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트레이 귀공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이미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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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트레이 귀공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이미애 옮김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015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단 한 가지를 더 얻기 위해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내어놓는 사람... 어쩌면 어리석은 자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야망이 큰 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역시 둘 다이겠지.. 야망이 크고 어리석은 사람,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을 과연 뭐라고 할까? 모든 것을 갖추고도 욕망에 이글거리는 눈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이, 한순간의 재미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날려버릴 용기? 가 있는 사람.. 그들이 유독 아끼는 것은 바로 하나, 스스로의 목숨이다. 죽음만을 두려워하는 벌벌 떠는 존재들...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 죽음이 집행유예된 상태이지만 그들에게는 현재의 시간, 쾌락이 선사하는 바로 지금 순간만이 유일하고 또 영원하다.

책 [밸런트레이 귀공자]에서 집사 매켈러가 말하는 껍데기라는 부분... 아, 정말 공감한다. 그 자신이 리처드슨의 소설 [클러리사]를 낭독하는 귀공자의 재주에 감탄하지만 그가 모든 예술작품들은 한 번도 그 자신에 결합되어 생각하지 못하는 공감 능력이 결여됐다고 판단하는 부분은 경악스러웠다. 모든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언변과 잘생긴 용모의 소유자, 순발력과 재치 등의 인간이 갖출 수 있는 모든 이점을 갖추고도 그에게 없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남들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래서 매켈러는 귀공자가 판지를 붙여서 만든 인간 같다고 했을까? 가면의 얼굴을 한 번 치면 텅 빈 공간이 드러날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고 그가 말하는 데, 이 비어있는 부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간혹 이해 안 되는 일들이 있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전쟁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총을 겨누고 자신이 가진 땅을 확장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희생을 강요하거나 요구한다. 책 뒷부분의 해설을 참고하자면 아마 저자가 말하는 빈 공간은 문명의 빛을 전달하여 원주민을 교화하겠다는 인도주의적 이념으로 무장한 채 아프리카에 간 식민주의자 커츠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텅 빈 인간은 소리도 요란하다. 그들은 항상 시끄러운 꽹과리를 두 손과 양 발에 걸치고 온갖 것들을 다 끌어모으고 말도 되지 않는 것들에 스스로 의미를 붙이면서 정쟁만을 일삼는다. 그것이 그들은 유일한 생존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밸런트레이는 동생 헨리에 대한 처절한 복수와 증오심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다름이 아닌 스스로 결정하고 그가 만든 것이다. 사실 그의 방황은 그 자신의 선택이었다. 듀리스디어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 명은 봉기에 가담해서 반역자의 편에 서고, 한 명은 조지왕에게 충성하는 길을 택해야 하는데 아무도 밸렌트레이에게 반역에 가담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자라는 이유로 그가 남아있길 바랐다. 하지만 이 역시 그의 선택이 아닌가? 정치적 이유가 아닌 순전히 부를 축척하고픈 개인적인 욕심에 의해서 말이다.

스티븐슨이 창조한 사악한 천재 밸런트레이...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허무하고도 어리석은 일들에 낭비하는 사람들... 미워하는 일에 시간을 쏟는 일만큼 어리석고도 불행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것만큼 생의 저주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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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카즈무후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2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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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카즈무후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012

이 사람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동 카즈무후]는 예전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 사실을 다룬다. 책을 읽으면서도 왠지 기시감이 드는 것은 최근의 한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장동료가 자신의 아내의 성폭행 한 줄 오해하고 그다음 날로 찾아가서 흉기를 휘두른 사건이다. 후에 자신의 아내와 그 동료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이미 한 가장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했으므로 말이다. 그런 의심의 싹은 과연 어디서 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은 과연 언제인가?

책 [동 카즈무후]에서 주인공은 절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의심의 눈동자를 외부로만 돌린다. 자신의 아내 카피투, 그리고 친구였던 에스코바르... 왜 그는 스스로의 의심 자체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책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역시 의심하게 한다. 정말 카피투가? 정말 에스코바르가? 실로 교묘하게 써 놓은 마샤두의 걸작이 아닐 수가 없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카피투가 친구였던 에스코바르의 장례식에서 흘렸던 눈물과 눈빛, 바로 그것이 의심의 시작이자 하나의 트리거로 작동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에서 느껴지는 친구 에스코바르의 무언가... 아마 이것은 그에게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을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은 모두 벤치뉴의 시선에서 씌었다. 그의 아내 카피투의 말도, 그의 친구 에스코바르의 변명도 없다. 아내는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의 변심에 말문을 닫았으며 친구 에스코바르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오직 그에게 증거는 아들이었다. 아들 에제키에우의 모습만이 그에게는 불변의 진리다.

오늘날에는 정확한 유전자 검사가 있으니 이를 가릴 수가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검사가 없었으니 오직 생긴 대로 판명했을 따름이다. 사실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말이다. 우리나라 소설 중에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화자는 생식능력이 상실됐는데 이를 숨기고 결혼을 한다. 곧 이은 아내의 임신... 화자는 아내가 낳은 아기가 자신의 핏줄이 아님에도 발가락이 닮았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인가? 서양에서는 다른 점을 찾기 바쁘지만 동양에서는 비슷한 점을 억지스럽게 찾아낸다. [동 카즈무후]의 주인공 벤치뉴는 밀어냄을 택했다. 그의 의심은 아내를 밀어내고, 아들을 밀어냈다. 그는 그 덕에 후련하고 속 시원했을지 모르나 그 외의 사람들은 불행했다. 특히 타지로 쫓겨나 외롭게 죽은 아내 카피투를 생각하면 그의 행동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 수 있다. 반면 김동인 소설 속 화자는 스스로에게 장막을 쳤다. 스스로 잘 못 안 거라고, 진실조차 외면하는 방법을 쓴다. 그 결과 스스로는 곪아버렸을지 모르나 외부로 그 상처가 삐져나오지는 않았다.

에제키에우란 선지자 에스겔의 포르투갈 식 이름이라고 한다. 에스겔서에는 이런 대이 있다고 한다. 부모의 죄는 아이들에게 대물림 될 수 없으며 스스로의 죄는 스스로 짊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춘기 시절의 벤치뉴, 변호사 시절의 벤투 산치아구, 그리고 마지막 의심과 분노의 시절인 동 카즈무후... 과연 어떤 것이 그의 진짜 모습이었을까? 그가 진정으로 살고자 한 시절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과 가까웠을까? 삶의 모습은 결국 스스로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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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장난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3
로베르토 아를트 지음, 엄지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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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장난감

로베르토 아를트 | 엄지영 옮김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013

나는 앞으로 죽은 사람처럼 인생을 살아갈 겁니다. 내 눈에는 인생이 그렇게 보여요. 거대한 노란 사막처럼 말이죠.

263 페이지

언뜻 생각하기론 실비오 저 말은 절망의 말처럼 들리지만 맥락을 이해하면 얼마나 희망에 가득 찬 말인지 알 수 있다. 주류사회에서 밀려난 작가 아를트의 소설 [미친 장난감]은 그 자신이 반영된, 어찌 보면 자전적인 내용인 듯싶다. 돈이 없어도, 교육을 못 받아도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다짐, 끝까지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한다.

돈이 있는 자는 돈이 있기 때문에 윤락한 환경 속에서 매끄러운 문체를 개발할 줄 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급하고 새롭고 진기한 것들이 많기에 그는 글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아를트 같이 돈은 없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쓰겠다고 마음가짐만 갖고 있는다면 문체가 어떻든, 맞춤법이 어떻든지 간에 그 글은 읽히는 글로 쓰여진다. 전자의 글이 오로지 자기 집안사람들만을 위한, 소수들을 위한 글쓰기라면 (흡사 정치인들의 에세이 같은) 후자의 글은 스스로가 반영된 피와 땀이 서린 글쓰기다.

실비오는 책을 통해 꿈을 꿨다. 하지만 그 책이란 것은 거대한 자본의 상징이었다. 어느 것 하나 스스로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가 그토록 갈망하면서 읽었던 도둑들의 이야기인 장르 소설 로킹볼을 읽고 그는 위대한 도적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책에서 읽은 장면, 장면들은 그의 기억 속으로 스며들어 체험하지도 않았는데 흡사 경험한 것처럼 그에게는 읽힌다.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던 날 그들은 루소를 떠올리면서 위로 삼기도 하고, 실비오는 자신의 발명품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로킹볼의 모습을 떠올린다.

소설 속에서는 문학을 돈에 비유해서 신랄한 비평을 한다. 훔친 도서관 책들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때론 너무도 적확해서 전율이 일 정도이다. 절판된 책에서 나올 수 있는 돈, 고등수학 서적에 대한 판단, 보들레르 시인의 전기에 대한 냉철함 (결국 이는 푼돈으로 취급된다.) 등 등은 오늘날에서도 책의 가격을 매기는 데 이와 비슷하다는 것에 놀라운 마음이 든다.

오늘날 출판시장을 보면 이제는 살 만한 책 자체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알록달록한 그림책들, 000 수식어의 화려한 수상 이력, 이슈되는 작가의 배경, 고급 화질의 사진으로 장식된 책들 등등 ... 문고판은 점점 귀해지고, 저마다 판형을 크게 하고 무슨 무슨 에디션, 무슨 무슨 컬렉션, 한정판 표지 등등을 내세운다. 세계문학의 경우는 나오는 출판사들이 너무 많아서 어떠한 것을 골라야 할지 헤매게 된다. 아... 그 속의 내용으로 평가를 해야 하는데, 이미 겉모습에서 패배를 당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도 역시 자본의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비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생은 아름답고 찬란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아르세니오 비트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의 찬란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알았다. 그것이 비록 영원하지는 않을지라도 믿는다는 것을... 그와 악수를 나누다가 돌아서면서 의자에 부딪혀 넘어질 뻔했다는 것... 삶이란 것이 언제든 스스로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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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4
보리스 비앙 지음, 이재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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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보리스 비앙 소설 | 이재형 옮김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014

딱 100페이지만 읽고 일어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나를 그렇게 놔주질 않았다. 결국 친구와의 약속시간에 늦고 말았다. 보리스 비앙의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그가 다른 이름인 버넌 설리번으로 발표한 누아르 소설이다. 친구인 폴 베르농과 재즈 피아니스트인 조 설리번에서 빌려 온 이 이름은 후에 사람들의 세간에 오르내린다. 과연 이런 누아르 소설을 창조해 낸 작가 버넌 설리번은 과연 누구인지 말이다. 이 소설은 보리스 비앙이 영어판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고 알려졌는데 이로 인해 엉겁결에 보리스 비앙은 영어 원서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위해서 영어로 소설을 다시 썼다고 한다. 소설의 성공이 참 묘하게도 작동했던 지점이었던 같다. 거짓을 참으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거짓을 참으로 만들기 위해 증거 또한 만들어 내야 하다니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화자 리 앤더슨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설은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 앤더슨을 미국 남주 지역 도시 벅턴으로 보내지면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는 형식이다. 앤더슨이 겪은 일은 초반에 언급된다. 그는 거의 백인에 가까운 흑인이지만 사람들의 이목에는 그는 여전히 흑인이었으며, 그의 집안은 흑인 집안이다. 앤더슨의 어린 동생이 백인 여성을 사랑하게 되지만 이는 곧 비극적인 죽음으로 이어진다. 바로 여자아이의 아버지와 오빠가 동생을 죽였으니 말이다. 아마 이 당시에는 흑인과의 접촉 만으로도 커다란 이슈로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서로가 서로를 전염병 보듯 했을 그 살벌한 풍경이 연상된다. 영화 [그린 북]에서도 상당히 충격적인 차별에 대해서 나오는데 막상 그것을 겪어본 자가 아니라면 차마 이해한다고 말하지도 못했을 그런 종류의 인종 차별이리라...... .

리 앤더슨은 동생에 대한 죽음으로 인해 백인 사회에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벅턴에 온 계기는 형인 톰이 그를 살리려고 보냈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복수의 장을 여는 시작점이 된다. 여기서 아주 완벽한 사냥감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앤더슨은 치유되지 못할 병에 걸린 사람으로 보인다. 어차피 그는 동생의 죽음으로 스스로도 죽였다. 아무리 외모가 백인 같아도 그는 백인은 아닌 것이다. 아무리 노래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 목소리 역시 흑인 블루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소설 속을 관통하는 폭력, 그리고 그보다 더한 폭력으로 묘사되는 섹스... 흡사 여성에게 가하는 잔인한 성적 묘사는 몹시도 폭력적으로 그려져 사실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왜 리 앤더슨은 복수의 대상을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고, 그저 그를 좋아했던 여성으로 삼아야 했는지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처음부터 흑인임이 알려졌더라면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을까? 그래, 아마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형 톰에게 친구 클렘이 존재했던 것처럼...... . 결국 마지막에 그의 복수심은 채워졌을지 모르지만 그의 무덤에 찾아오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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