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시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8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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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시 2

살만 루슈디 |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과연 당신에게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악마의 목소리인가? 천사의 목소리인가? 개인적으로 살만 루슈디는 우리 내면에서 들리는 그 소리에 집중하고 그 중요성을 말하는 것 같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직 우리 사회는 그러한 배려심? 은 없다. 내가 옳다는 것만이 옳은 것이고, 다른 것을 말하면 그것은 그릇된 것을 넘어서서 악한 것이다. 그리고 악한 것은 타도할 대상이 되며, 상종 못할 그 무엇으로 전락한다.

살만 루슈디는 한 강연장에서 무슬림 시아파 사람의 공격을 받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 외에도 한 프랑스 교사는 자신의 수업 시간에 한 만화에 대해 언급했다는 이유로 무슬림 학생에게 죽임을 당했다. 왜 그렇게, 어떤 면이 그들을 분노하게 했을까?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만이 진리라고 강요하고 신앙을 심어준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한 사람의 맹목적인 믿음이란 과연 선인가? 악인가? 아... 나는 아직 이유를 알 지 못하겠다. 예수를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자들도 신을 믿고, 신에게 기도하고, 열렬히 부르짖었던 자들이었으니....... . 그때 예수는 이런 말을 한다. 주님, 저들은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그렇다. 이 말만이 진실이다. 그 눈에 찌꺼기가 쌓이고, 뿌옇게 가려진 채 사물을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이 안되는 법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하나이고, 본질은 단순한데, 이기적이고 야만에 가득 찬 사람들이 진실에 이르는 단순한 여정을 복잡하고 어렵게 호도한다.

어느 예언서를 읽으면 앞으로 전쟁은 종교로 인한 분쟁으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해서 멸망할 것이라는 다소 끔찍한 예언이 있기도 하다. 그 씨앗은 바로 중동이라고 말이다. 현재 이란에서 벌어지는 시위, 전쟁의 기운이 아직도 살벌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등을 보면 이 말이 현실이 아니길 바라고 또 바란다. 얼마 전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지속 중인 푸틴은 핵 공격을 운운하면서 다소 위험한 발언들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다른 이들이 다르게 살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파괴하고 점령하려 하는가?

얼마 전에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탄생]이 개봉했다. 열다섯 살의 나이에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한국인 최초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가 되지만 조선으로 돌아온 지 겨우 일 년 만에, 그의 나이 스물다섯에 병오박해로 순교한 안드레아 신부...... . 종교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머물러야 하는지 그를 보면 조금 알 수 있지 않을까? 남에게 총과 칼을 들이대는 종교는 더 이상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그 속에 있는 신은 악이다. 남에게 한 빰을 내주는 것, 작은 보리빵마저 굶주린 이웃을 위해 나누는 것... 바로 그것 아닐까? 정답은 바로 삶 자체에 있다. 진리는 바로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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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데스의 유산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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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데스의 유산

나카야마 시치리 ㅣ 문지원 옮김 | 블루홀 6

역시 나카야마 시치리다.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어떻게 사회적인 주제들을 이렇듯 미스터리와 섞여서 훌륭하게 비벼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 그여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의 주인공들은 영원한 악인도 그렇다고 온전한 성인도 없는 이유다. 단지 인간이기에, 사람이기에 틈이 있고, 그 틈의 벌어짐 정도의 차이랄까?

닥터 데스라고 불린 의사는 안락사를 통해 환자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준다. 그에게 그런 권한이라는 것이 애초에 어떻게 주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환자들과 유가족들은 그의 손길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그는 그것을 주는 존재였다. 고통이란 것은 무엇일까? 고통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아무리 타자를 이해한다고 해도, 공감한다고 해도 그 고통까지 대신 경험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고통이 개인적 체험이라면 죽음은 어떠할까? 죽음은 고통과 비견할 수 없는 체험이다. 일생에 한번, 필연적으로 거쳐서 영원한 그곳,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할 체험 의식이다. 죽음이 만일 행복하거나, 짜릿하거나, 즐겁다는 그런 경험으로 여겨진다면 좋겠지만 죽음이란 항상 고통스럽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변의 이웃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고통으로의 해방을 위해 독한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받고, 나중에는 모르핀 투여를 통해 고통의 희미함을 느껴보려 한다. 결국엔 죽음으로 간다. 이럴 때 어쩔 수 없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닥터 데스를 추적하고 끝내는 검거했던 형사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한다. 범인은 잡았지만 죄는 잡지 못했다고 말이다. 이누카이에게는 난치병이 있는 딸이 있다. 그 아이의 고통의 모습을 매일 보면서 그 역시 훗날 어떤 선택을 하리라 장담하지 못했으리라...... . 하지만 그의 딸은 아마 잘 회복될 것 같다. 한번 싸워보겠다고 씩씩하게 마음을 먹었으니 말이다.

예전에 읽은 책 중 [자유 죽음]이란 책이 있었다. 왜 우리는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주어진 그 무언가로 생각하고 받아들여하는가? 죽음 역시 자율적으로 죽을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살아남았지만 일평생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지병으로 고통받았던 작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으로 세상과 작별을 했다.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사형에 대한 집행 유예자이다. 그 사형이라는 형이 언제 집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집행자가 누구를 먼저 데려갈까? 그 순서에 노소도 없고 돈도 없다. (물론 젊으면 확률이 더 줄어들고, 돈이 많으면 치료법의 선택이 훨씬 더 자유로울 테니 그 경중은 예외가 될 수도 있겠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행여 안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 집행의 순서가 아직 스스로의 차례가 아니라고 말이다. 아니면 애써 모른 척하는가? 아닐 거야... 나에겐 안 올 거야... 같은 희망을 품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미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온몸이 망가져있고, 끔찍한 고통의 연장 밖에 삶을 이어갈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당신 역시 스스로 닥터 데스를 찾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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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나사의 회전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6
헨리 제임스 지음, 민지현 옮김 / 미래와사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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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헨리 제임스 | 민지현 옮김 | 미래와 사람

소설을 읽고 있으니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뉴질랜드 여행 가방 시신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창고 경매로 판매된 여행 가방 안에서 아동 시신 두 구가 나온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더욱 놀라운 점은 해당 사건의 용의자가 바로 그 아이들의 엄마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알'에서 다룬 내용을 살펴보니 40대 한국계 해당 여성은 뉴질랜드에서 남편과 사별한 후 이상한 망상에 시달렸다고 한다. 아이들이 대신 갔어야 한다는 둥... 이 말을 남편 장례식장에서 했다고 전해지니 참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영상에서는 아이들의 아버지가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놀아주는 반면 어머니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유령 엄마처럼 보이는 건 나만이 느끼는 걸까?

책 [나사의 회전]에서 등장하는 화자인 가정교사는 면접을 본 순간에 그녀 자신의 고용주인 독신 남자에게 반한다. 그의 잘생긴 외모로 인해 호감을 갖게 되고 가정교사일을 수락하게 된다. 블라이로 들어선 순간 어떤 불안한 감이 그녀 스스로를 엄습하지만 이내 플로라의 모습으로 안심하게 되면서 입주 교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그곳에서 그녀의 눈에 목격된 두 명의 유령... 사실 유령은 그 어떤 악한 짓을 하는 것이 포착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유독 그 유령들이 아이들에게 사악한 생각을 심어주고, 마침내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녀 자신이 아이들의 수호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유령의 존재를 묻기는 두려워한다. 그녀는 용기 있게 그로스 부인에게 자신이 본 것을 털어놓고 그 두 명의 유령이 전 가정교사인 미스 제셀과 그 집의 하인이었던 피터 퀸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야기의 절정은 그녀가 마일스에 대해 상담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아이들의 삼촌에게 편지를 쓴 후에 일어난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플로라... 간신히 갖은 고생을 하며 플로라를 찾지만 그녀가 호수 너머로 분명하게 보았던 미스 제셀의 유령의 이미지를 플로라도 그로스 부인도 보지 못한다. 그녀는 플로라와 그로스 부인을 블라이로부터 떠나게 한 후 마일스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 왠지 사악한 기운은 아이들이 아니라 그녀 자신인 것 같은 이 느낌은 무엇인가? 그녀가 아이들을 구하기로 했다면 그 집에서 머물면서 그들을 감시할 것이 아니라 미리 그들의 보호자와 연락해서 블라이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궁금해했던 바로 그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이들에게 물었어야 했다. 아이들의 눈에도 미스 제셀과 피터 퀸트의 모습이 보이는지... 그들은 어떤 사람으로 다가왔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일스가 퇴학을 하게 된 이유를 바로 마일스가 집으로 온 날 묻던지, 아니면 학교로 전화해서 이유를 명확하게 알아야 했다.

이야기는 엉성하게 베일에 싸여있는 것을 그저 모른 척하는 데에 커다란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녀 자신이 똑똑한 척, 블라이를 이끌어가는 선장인척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위험한 존재였다. 유령은 아무 짓도 하지 않지만 그녀 자신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제목 [나사의 회전]에서 나사란 단어는 이 책에서 총 세 번 정도 등장한다. 두 번은 더글러스(이 이야기에 대한 원고를 지닌)가 익명의 손님들 앞에서 대화할 때고, 나머지 한 번은 가정교사가 마일스와 대면할 때이다. 그녀는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성을 한 번 더 조인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압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곧 치명적인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아... 왜 가정교사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들으려하고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여주지 않았던 것일까? 아이들을 지키는 힘은 어른의 간섭과 집착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의 지나친 관심은 그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마저 무력하게 하는 존재가 돼버리기 쉽다. 이제 더 이상 조이는 나사... 그 회전의 방향은 다른 쪽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바로 스스로를 조이는 쪽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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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시대를 기억하다 - 사회적 아픔 너머 희망의 다크 투어리즘
김명식 지음 / 뜨인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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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시대를 기억하다

사회적 아픔 너무 희망의 다크 투어리즘 | 김명식 지음 | 뜨인돌

여행하면 어떤 여행이 떠오르는가? 나는 항상 여행이 이상했다. 쉬러 간다고 하면서 여행 후가 더 피곤한 느낌, 아마도 많이 경험해 봤을 것이다. 여기 왔으니, 저기도 가봐야 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고, 또 주말이 끼면 숙박비는 어떠한가? 요즘은 호텔이니 펜션이니 독박 풀빌라니... 너무도 많은 옵션이 있고, 게다가 값은 비싸다. 한번 여행이란 것을 갈라치면 각오를 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할까? 여행은 떠남이다. 낯설게 하기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낯설게 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또한 여행이 아닐까? 그리고 여행이 꼭 먹으러 가고, 좋은 경치를 보러 가야 하는가? 사진을 남기러 떠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사진조차도 핸드폰 사진첩에 남아서 언제고 사라질 텐데 말이다.

현대는 새로운 여행법이 필요하다. 최근에 텔레비전에서 다크 투어에 대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생소했다. 왜 다크란 말에 투어를 붙이는 것일까? 혹여 거기에 희생된 사람들의 유족들은 자신들이 괴로웠던 공간 그 자체가 여행지처럼 느껴지는 것에 반감을 갖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여행지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참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이나 재해의 현장을 돌아봄으로써 그것을 기억하는 것, 바로 그 기억이 유족이 그리고 희생자들이 바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크 투어리즘을 부르는 다른 말로는 블랙 투어리즘 혹은 그리프 투어리즘이 있다고 한다. 국립국어원에서 역사교훈 여행이라 지칭하고 있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재난 현장이나 참혹한 역사적 현장을 둘러보는 일은 경건하게 여겨진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는다. 여행이라고 해서 꼭 들뜰 필요는 없다. 이런저런 순간들이 여행의 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직까지 팽목항을 가보지 못했다. 어떤 곳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아직 그 사건은 현재도 진행형이니... 또 우리는 얼마 전에 그런 공간을 또 얻게 되지 않았던가... 이태원... 이제 이태원 세 글자는 더 이상 외국인 거리나 힙한 거리가 아닌 많은 젊은이들이 압사당한 참혹한 공간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같다.

책 속에 나온 공간 중 인상 깊은 곳이 바로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과 지상의 서소문 역사 공원이다. 그곳에 노숙인 예수라는 작품이 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인근에서 얼어 죽은 노숙인을 기리기 위해 그의 작품에 직접 축복하고 교황청에 설치한 작품이다. 이미 여러 나라에 설치가 되었다고 한다.

벤치에 노숙인이 누워있다. 그는 머리 위까지 무언가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유독 발만 나와있다. 그 발 한가운데 보이는 상흔... 예수님의 십자가 상흔을 연상케한다. 성경 마태 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노숙인 예수가 놓여있는 벤치 주변에 실제 노숙인이 있는 현실 역시 존재하는 것...

가고 싶은 여행지가 너무 많이 생겼다. 무슨 무슨 관광지가 아니라, 제주도 4.3 평화공원 내에 있는 비설, 오림 터널공원, 매헌 시민의 숲, 그루네발트역 17번 선로, 분서 기념 도서관 등 등 아...... . 이제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 머리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발이 기억하도록 애쓰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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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7
에밀 졸라 지음, 강충권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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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2

에밀 졸라 | 강충권 옮김 | 민음사

요즘 내가 기다리는 요일이 있다. 바로 금, 토, 일이다. 새삼스럽게 휴일을 왜 기다리는지 ㅎㅎ 하지만 다름 아니라 그날 유일하게 보는 드라마가 방영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바로 요즘 시청률 20퍼센트로 향해간다는 그 드라마...[재벌집 막내아들]이다. 나름 현실과 비교가 되고, 이미 시 시절을 지내온 사람으로 어떻게 그려지고, 주인공이 의지를 가지고 앞날을 통쾌하게 헤치고 가는지 나름 공감하면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그 드라마에 달린 댓글을 보면 좀 가관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재벌집 막내아들을 국밥집 좌파 아들로 바꿔야 한다는 댓글도 있고, 땀 흘려서 일한 돈을 왜 자식에게 물려주면 안되는 거냐?라는 댓글까지... 대한민국은 미묘하게 갈라져 있는 듯하다. 목소리 큰 사람들의 댓글은 바로 그 균열이 큰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말이다.

왜 노동자는 주인이 되지 못하는가? 왜 꼭 재벌이 나오고, 검사가 나와야지만 먹히는 소재가 되는가? 이 드라마는 노동자도 나오고, 재벌도 나오고, 검사도 나오고, 더군다나 주인공 막내아들은 재벌의 옷을 입고 태어났지만 그 태생의 뿌리를 잊지 않는 소위 말하는 좌파적인 캐릭터이다. 이 책 역시 노동자가 주인공인 탄광촌의 현실을 다루었다. 아마 책 그대로의 내용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졌다면 잘 안됐을 것도 같다. 노동자와 자본가만 있으니 말이다. 재벌, 법조인, 출생의 비밀... 뭐, 그런 양념을 좀 더 추가한다면 모를까 싶다.

최근 화물연대 파업으로 연일 뉴스가 시끄럽다. 소위 정부는 화물연대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업무 개시명령을 시행함으로 그들의 요구에 협상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맞는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파업에의 강경 대응으로 인하여 정부 지지율이 상승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과연 그렇게 타협할 꺼리조차 되지 않는 것인가? 안전 운임제란 화물 차주에 대한 적절한 운임 보상으로 과속, 과로, 과적 운행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하니 그 취지의 선량함은 충분히 와닿는다. 안전 운임제의 유효기간은 올해 말까지다. 각종 규제나 효력이 일정 시간이 되면 사라지는 것이 일몰제인데, 바로 그 안전 운임제의 일몰제 폐지를 요구하는 것이 화물연대 파업의 이유이다. 왜 이렇게까지 반대해야 하는 것일까? 안전 운임제에 대해 효과를 보고 실효를 거뒀으면서도 굳이 이것을 폐지하겠다는 속셈은 뭐, 뻔히 보인다.

제르미날에서 나오는 자본가들의 속셈... 4부 7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부르주아 자본은 어딘가 신비로운 장막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을 먹여 살리는 이 아사지경인 사람들의 생명을 빨아먹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해설에서 언급하고 있는 미노타우로스의 동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아무리 먹어도 계속 배고파하는 미노타우로스... 결국 욕망은 먹을수록 더 배 고픈 법이란 말인가? 현실의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는 과연 누구일까? 고전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상 이치를 발견하는 것은 참 통쾌하지만 한편으로는 변함없다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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